## 836화
박수와 함께 퀸텟 연주자들이 대기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들 사이에선 열정과 에너지가 넘쳤다.
알렉산드라는 그들 모두를 독려한 뒤 연주자 대기실의 남은 의자에 앉았다. 무대 상황을 비추는 모니터가 빛났다.
잠시 모니터를 바라본 알렉산드라는 옆에 남은 한 연주자를 바라보았다.
“…….”
타티아나는 말없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검보랏빛 드레스는 소매가 길어서 팔을 내리면 그 손을 전부 감추었다. 하얀 목만 길게 드러났다.
마치 새 같다는 기분을 느끼며 알렉산드라는 그녀가 움직이길 기다렸다.
잠시 후 타티아나가 슥 고개를 돌려 알렉산드라를 마주했다.
“알렉산드라. 올라가 보셔야 하지 않나요?”
타티아나는 콘서트 디렉터인 알렉산드라가 남아 있다는 것에 의문을 표했다.
그녀의 말대로 본래 알렉산드라는 이곳이 아니라 연주회를 총괄하여 바라볼 수 있는 콘서트 디렉터룸에 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대기실에서 지켜보는 것을 택했다.
어차피 무대 준비는 이미 스테이지 매니저가 빈틈없이 모두 해냈다.
조명과 음향 등도 전문가들이 모두 제자리에 위치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무대에 변화가 있는 건 인터미션 때니까 그때 따로 한 번 다시 확인하면 된다.
다양한 각도로 무대를 촬영 중인 카메라들 역시 데니스 프로듀서가 확실하게 맡아 주고 있었다.
이 홀에서의 방송시스템은 몇 번이나 증명된 바 있었기에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지금 콘서트 디렉터룸에 가서 총괄 지휘를 맡는다 하더라도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큐시트에 맞추어 사인을 내릴 뿐이다.
그것보다 알렉산드라는 지금 옆에 있는 타티아나를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싶었다.
혹여나 문제가 있다면 가장 빠르게 케어해야 할 테니.
“올라가도 할 게 없어서.”
“……?”
“다른 콘서트 디렉터님들은 안 그럴 수도 있죠. 각자 스타일이 다르겠거니 하세요.”
타티아나도 연주자 경력이 있는데 이상함을 느낄 만도 했다.
알렉산드라는 그녀가 걱정된다고 할 순 없어서 대충 얼버무리며 이해해 주길 바랐다.
잠시 후 무대에 오른 연주자들이 각자 자리를 잡고 연주 준비를 마쳤고, 곧 홀 전체가 정적에 빠졌다.
타티아나 역시 말을 멈추고는 다시 모니터 쪽으로 신경을 쏟았다. 알렉산드라 역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음악이 시작되었다.
‘좋은 시작이야.’
엔리케 그라나도스의 피아노 퀸텟 op.49.
처음 이 곡을 리허설로 들었을 때도 알렉산드라는 강렬한 음색에 잡아먹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연습실에서도 강력했던 다섯 연주자의 음악은 콘서트홀이라는 가장 거대한 악기의 도움을 받아서 더더욱 화려하게 울려 퍼졌다.
‘역시…….’
알레그로로 계속되는 음악은 스페인의 정수를 담고 있었다.
게오르기는 그 부분을 너무나 인상적으로 잘 살려냈다.
현악기들이 앞장서서 주 멜로디를 잡아 나가는 사이 아나스타샤의 피아노도 그 옆을 잘 지켜 주었다.
아나스타샤에 대해선 걱정이 많았지만, 그녀는 그런 걱정 등을 모두 불식시키겠다는 듯 선명한 연주를 자신 있게 내보였다.
그 무대 내용을 보고 있는데, 옆에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
슬쩍 옆을 보니 타티아나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녀를 보며 알렉산드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흘 전 직접 알렉산드라를 찾아와 연주회에 대한 이야기를 한 건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였지만, 그중 진짜로 의도를 공고히 했던 건 타티아나뿐이었다.
아나스타샤는 그 후에 콰르텟 연주자들과 함께 한 뒤에야 비로소 무대에 서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 결정에 대해 타티아나는 감사해하며 신뢰를 보이기도 했지만 사실 굉장히 많이 우려하고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훌륭하게 합주해 내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정말 걱정할 필요 없었네.’
겨우 몇 분 연주한 것이지만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퀸텟은 이전까지의 그 어떤 리허설보다 뛰어난 연주를 지금 무대 위에서 펼치고 있었다.
게오르기의 바이올린은 보다 격렬하게 선율을 이었고 다리아가 음악을 더더욱 증폭시킨다.
그리고 그 밑의 선율엔 카일의 비올라와 첼로의 솔렌이 마치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 그물처럼 팽팽하게 버텨 주고 있었다.
그 모든 악기들의 조화 속에서 때론 뒤로 숨기도 하고 앞으로 나서기도 하면서 이 음악의 수준을 높게 끌어올리는 건 당연히 아나스타샤의 몫이었다.
가장 까다로우면서도 무거운 역할을 아나스타샤는 완벽하게 해냈다.
“…….”
정열적인 스페인의 선율이 연주되며 1700명의 청중의 집중을 15분간 한데 끌어모았다.
그 모든 것이 화려하게 맺어졌을 때, 정말 천둥과도 같은 거대한 박수 소리가 홀을 뒤덮었다.
대기실 벽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원래 기획처럼 서주로 시작되진 못했지만 이 정도면 거의 완벽에 가까운 연주회의 개막이었다.
“브라비.”
알렉산드라가 청중들을 따라 박수를 치며 옆을 보니 타티아나 역시 짧게 박수를 치곤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선 강한 신뢰가 느껴졌다.
박수도 멎고 청중들이 비로소 진정했을 때, 사회자가 무대 위로 올라와 다음 곡을 소개했다.
이번엔 40분 동안 프라하로 떠나는 여행이었다.
‘드디어.’
가장조로 찰랑이는 피아노의 파도. 그 위로 나지막이 첼로의 선율이 얹어진다.
좌우로 흔들거리는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다 보면 잠들어 버릴 것 같다.
그 졸음을 깨우는 것처럼 바이올린과 비올라, 그리고 피아노가 강렬한 화성을 세우며 중심이 되는 음악을 꺼내 들었다.
안토닌 드보르작의 피아노 퀸텟 2번 op.81.
체코의 대표적인 작곡가 중 한 명인 드보르작이 남긴 수많은 작품들 중 하나로 현대에도 상당히 귀한 퀸텟으로 여겨지는 곡이다.
40대 중반으로 작곡에 대한 능력이 최고조에 달한 시점 드보르작은 독일과 영국, 러시아 등을 방문하며 각국의 음악가들과 교류하고 연주회도 하면서 그 외연을 넓혀 가던 시기였다.
편견 없고 노력가로 유명했던 드보르작의 명성은 음악에서도 여실히 묻어난다.
이때의 드보르작이 작곡한 곡들은 체코 민족음악 특유의 뉘앙스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음악성들을 총망라한 하나의 집대성 같은 느낌을 가져온다.
‘이렇게 섬세하게…….’
당연히 곡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연주자들에게 요구되는 조건들 또한 많아진다.
쉽게 읽어 내기 어려운 특별한 리듬, 폭넓게 사용되는 화성 등을 활용하여 섬세한 표현을 해낼 수 있는 음악성은 필수적이다.
한순간도 방심할 틈 없이 집중하면서 다른 연주자들과의 조화를 잘 맞춰 나가야만 했다.
단순히 테크닉이 조금 좋다고 해서 쉽게 연주할 수 있는 곡이 결코 아니었다.
물론 아나스타샤는 테크닉은 물론이고 음악적인 지능도 굉장히 높은 연주자였다.
그녀는 변화무쌍하게 앞뒤로 왔다 갔다 했던 그라나도스의 퀸텟 때와는 달리 이번엔 견고하게 한 자리를 잡고 서서 음악의 큰 기둥을 이루었다.
이 곡은 경력 있는 연주자들 사이에서도 꽤 많이 트러블이 터져 나오곤 하는 난곡이었으나, 아나스타샤를 중심으로 모여든 다섯 연주자들에겐 전혀 그럴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춤곡과도 같이 흔들거리는 리듬의 주제가 재차 반복되면서 악장의 완성도를 높이고, 점차 잦아들었다가 서서히 속도와 크기를 더해 나가다가 조성이 바뀐 듯 장엄한 분위기에서 클라이맥스로 진입했다.
넓은 음역을 다루는 피아노는 옥타브로 연주된다. 아나스타샤는 손을 펼쳐 건반을 짚었다.
마치 손을 휙휙 날려 짚는 것 같은데 터져 나오는 소리는 네 개의 악기와 맞먹을 정도로 컸다.
그녀가 피아노를 다루는 테크닉은 여느 프로 연주자들과 비교하더라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그렇게 연타되는 옥타브와 격렬한 현악기들의 조화 속에서 1악장이 마무리되었다.
“…….”
땀을 닦을 새도 없었다.
고요 속에서 아나스타샤가 곧바로 2악장의 시작을 열었다. 애가란 뜻의 제목인 둠카였다.
짤랑이는 종소리는 문가에서 들려온다.
사람인가 싶어 돌아보면 아무도 없다. 유령처럼 왔다 간 바람이 종을 흔들고 있다.
혹시나 해서 종을 가져다 놓은 집주인은 기대를 안고 고개를 들었다가도 실망하며 다시 엎드린다.
그렇게 울적한 바람의 장난이 몇 번 계속된다. 이윽고 집주인은 고개조차 들지 않게 된다.
종을 울려도 꼼짝 않는 집주인에게 미안하다는 듯 바람은 마지막으로 멀리 흘러갔다가 그녀가 기다리는 사람을 데리고 왔다.
퀸텟이 연주하는 그 이미지는 너무나 애틋하고 아름다웠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조용히 기뻐하는 모습은 시골 정경을 그리는 한 폭의 수채화와도 같다.
잠시의 기쁨은 곧 시간과 함께 떠내려가고, 다시 꿈결과도 같은 바람의 장난과 기다림의 애상이 어우러지며 음악으로 파고들었다.
9분간 이어지는 감미로운 노래에 취할 때쯤, 조금 더 빠른 음악의 붓질이 지금까지의 감상들 위에 칠해졌다.
‘아나스타샤가 정말 대단한데…….’
이 둠카에 속한 악장은 대부분의 표현을 피아노에게 맡기고 있었다.
다른 악기들 역시 부드럽게 음악을 이루지만 그것은 배경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반복되는 모든 멜로디가 다르고 리듬에도 변화가 생긴다.
생각을 하면서 만들어 나가려면 대체 얼마나 연구가 필요한지 상상이 안 갈 정도로 깊이가 있는 음악이었다.
그 깊이를 속으로 아나스타샤는 천천히 손을 집어넣는다.
손가락 한두 마디에서 손목, 팔, 어깨까지.
이쯤 하면 더 이상 뻗지 못하지 않을까 싶은데도 아나스타샤는 더더욱 팔을 뻗는다.
그러면 한참이나 밑까지 그녀의 손끝이 톡 하고 가서 닿았다.
그 닿는 느낌은 무대와 홀을 타고 절절하게 전달되었다.
그동안 알렉산드라는 이런 표현력에 있어선 타티아나가 보다 앞서는 부분이 많고, 아나스타샤는 테크닉이 뛰어난 편이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 역시 어마어마하게 뛰어난 음악성을 지닌 피아니스트였다.
그 점을 여실히 보여 주며 아나스타샤는 2악장도 끝마쳤다.
이어서 폴짝거리며 뛰노는 분위기의 스케르초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볍게 건반을 다루며 아나스타샤가 짧은 악장을 어렵지 않게 연주해 냈다.
이런 경쾌한 모습도 굉장히 인상적이다.
그러면서도 아나스타샤는 무대 전체에 넓은 음악의 파도를 흩뿌렸다.
모두가 미처 그 파도의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 때, 갑작스럽게 마지막 4악장이 시작되면서 화려한 끝으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
무작정 뛰쳐나가는 느낌은 드보르작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너무 속도를 내지 않고 정갈하게 박자를 맞추어서 한 발자국씩 착실하게 나아간다.
금방이라도 땅 위에 깃발을 꽂고 클라이맥스를 장식할 것 같은 구간에서도 이 음악은 잠시 쉬었다가 발걸음을 옮기곤 했다.
이 잘 정돈된 하나의 행진에선 앞을 막아서는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나아갈 것 같은 강력한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폭력적이지도 않다는 뜻과 같았다.
청중들을 숨 막히게 하지도 않고 멀리 있는 넓은 목표를 향하는 우아한 행진은 모두에게 편안한 마차에 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좋은 해석이야.’
동유럽의 리듬부터 서정적인 분위기, 그리고 기품 있는 행진까지.
프라하에서 시작된 긴 여행은 40분이나 진행되는 동안 여러 번 주제도 바뀌었지만, 마지막에 이르러서 통일성을 갖추고 하나의 음악으로 향해 갔다.
모든 악기가 한 번에 울리며 홀을 울린다.
마지막으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상쾌한 발걸음을 끝으로 드보르작의 퀸텟은 하나의 작품으로 이 자리에서 연주되었다.
“브라바!”
다시 폭발할 것 같은 환호가 터져 나온다.
모니터를 바라보던 알렉산드라는 음악이 끝나고 나서야 1부가 끝났다는 것을 인지했다.
그만큼 깊게 감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마지막 리허설 전에 그렇게 걱정했었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알렉산드라는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완전히 해결된 건 아니었다.
홀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
시작 전만 하더라도 웅성거림이 꽤나 컸지만, 방금 두 개의 퀸텟이 대부분의 의심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본래 1부엔 에르네스트의 역할이 없었다. 그가 필요했던 건 듀엣 연주를 메인으로 했던 2부.
그 2부를 이제 타티아나가 홀로 감당해야 할 차례였다.
“…….”
알렉산드라는 다시 옆을 바라보았다.
말없이 앉아 있는 타티아나는 이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본격적으로 연주자로서 움직이기 위해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는 것은 멀리에서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강렬했다.
알렉산드라는 지금 그녀에게 말도 걸기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