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838화 (838/1,277)

##  838화

가까이에 있는 것만 1700명.

무대를 비추고 있는 카메라 너머를 의식한다면 수만 명은 될 사람들 앞에서 타티아나가 고개를 들었다.

낡은 가로등 불빛처럼 흐릿한 조명이 그녀의 모습을 드러냈다. 보기 드문 백금색 머리칼은 안개처럼 모호하다.

그 위를 타고 흐르는 쇠약한 빛은 드레스로 떨어져 저마다 흘러내리다가 바닥에 채 닿지 못하고 스러졌다.

그러한 미약한 빛의 윤곽은 잔뜩 웅크린 검보랏빛 실루엣을 그렸다.

작게 옹송그린 어깨와 하나밖에 보이지 않는 팔만이 모든 것을 이루고 있다.

타티아나가 직접적인 움직임을 그렇게 보이진 않았지만, 아리엘에겐 그 빈약한 형체가 무척이나 또렷하게 느껴졌다.

아리엘이 약한 연민을 느낄 찰나였다.

타티아나가 허공에 들고 있던 왼손을 스르륵 움직였다.

“……!”

거기에 있는 건 고통이나 상실감뿐만이 아니었다.

타티아나의 하나뿐인 손은 건반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허공을 가로지른다.

단순한 손짓일 뿐인데도 그 손끝에 무언가 걸리기라도 한다면 타티아나가 콱 틀어쥐어 비틀어 버릴 것 같단 기분이 들었다.

섬뜩한 기분을 느끼며 아리엘은 얼어붙었다.

타티아나가 느끼는 감정은 단순한 안타까움만이 아니었다.

목적지를 분명히 하지 않는, 시릴 정도로 서슬 퍼런 감정이 함께한다.

그것은 아리엘이 느꼈던 상심과도 닮아 있었다. 신에 대한, 혹은 곁에 있는 아무나에게 향했던 분노.

심장을 쿡 찌르고 들어오는 그 감정에 깜짝 놀라며 움츠렸을 때, 타티아나가 들어 올렸던 손을 건반 위로 내렸다.

“…….”

조성을 잘 느낄 수 없는 흐릿한 음.

한 손으로만 번갈아 가며 연주되는 음들은 더듬거리면서 선율을 찾아 나간다.

간신히 조금 높은 곳까지 닿았나 싶었던 한 가닥의 선율은 곧 한계를 맞이한 듯 절뚝거리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세상에 남아 있는 왼손 연주곡은 그리 많지 않다.

아리엘은 그중 몇몇 곡들밖에 알지 못하지만, 이 곡에 대해선 일전에 들어 본 적이 있어서 떠올릴 수 있었다.

레오폴드 고도프스키의 엘레지elegy.

폴란드 출신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서 고도프스키는 독학으로 피아노를 익혔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를 아울러 손꼽히는 대가로 불린다.

하지만 많은 존경과 명성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년은 순탄치 않았다.

세계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적 문제와 아내의 병, 가족들의 문제. 여러 가지가 그를 괴롭히며 몰아세웠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그가 작곡한 곡이 바로 이 왼손으로만 연주하는 엘레지였다.

‘이런 곡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된 것 같아.’

비르투오조로 이름이 높았던 고도프스키는 왼손만을 위한 연습곡들도 여럿 작곡했다.

그 덕에 왼손만으로 연주하는 곡들을 모아서 음반으로 낸 연주자들도 있었고, 아리엘은 그 음반을 통해 이 엘레지도 들어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스피커를 통한 몇 번의 감상은 이 곡이 가진 강렬한 감정을 절반도 채 드러내지 못했다는 걸 그녀는 깨달았다.

주변에서부터 다가오는 진동은 아리엘을 순식간에 사로잡았다. 소름 끼치는 감각이 전신에서 다가온다.

“…….”

클래식적인 정통성 있는 구조적인 아름다움이나 정갈함이 느껴지진 않는다.

어떻게 보더라도 이해하기에 쉬운 곡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건 이 곡이 현대음악적 특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만큼 사람의 마음이 이해하기에 어렵기 때문이기도 했다.

슬픔과 고통, 격노, 우울 등 다양한 감정들이 뒤섞이며 선율 사이를 파고든다.

멍하니 선율을 읽어내던 아리엘은 한 가지 의문을 느꼈다.

어째서 고도프스키는 수많은 곡들을 작곡하면서도 엘레지라는 이름을 붙인 단 한 곡은 왼손만을 사용해 연주하도록 작곡했을까.

이 안에 담긴 너무나 많은 감정들은 양손뿐만이 아니라 입을 벌려 소리를 지르고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표현하더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는데, 고도프스키는 그 모든 것들을 제한하고 최소화하여 왼손 하나만을 허락했다.

그 이유가 비르투오조로써 자신의 실력을 뽐내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조용히 상념에 잠겨 음악과 그것을 연주하는 타티아나를 지켜보며 아리엘은 비로소 그 해답을 깨달았다.

‘저 모든 게…….’

한 손을 제약당한 피아니스트는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게 된다.

타티아나의 오른팔은 축 늘어져 드레스 아래에 감추어져 있다.

그녀가 똑바로 허리를 펴고 있음에도 실루엣이 전체적으로 무너져 있는 것처럼 느꼈던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반쯤 무너져 있는 인간의 모습에서 느낄 수 있는 참혹함은 아리엘을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멈추지 않는다.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것 같은 형체가 흐릿하게 보이는데도, 다시 남은 손으로 건반을 짚는다.

연달아 끌어 올려지는 선율이 들려온다.

“…….”

오른손을 축 늘어뜨린 채 연주하는 이끌어내는 표현력은 점점 더 완전해지고 있었다.

만약 이 곡을 편곡해서 양손으로 연주했다 하더라도 결코 이 정도 연주는 해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아리엘은 생각했다.

피아노에서 직접 무대를 타고 들려오는 소리는 마치 직접 마주하고 있는 사람의 노랫소리와도 같았다.

가슴 깊이 파고드는 그 진동은 비통함을 노래하는 제목에 걸맞게 무척이나 처절하면서도 아름다웠다.

“…….”

만약 마이크를 들고 이야기를 했다 하더라도 삐딱한 기분으로 청중석에 앉은 아리엘의 태도를 되돌려놓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어떤 말도 곧이곧대로 들을 수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피아노를 통해 전해져 오는 타티아나의 엘레지는 그런 그녀를 단번에 납득시켜 버릴 정도의 참담함을 담고 있었다.

‘어떻게 무대에 설 수 있는 거지.’

타티아나의 심경이 너무나 잘 이해되어서, 역설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신은 난해하고, 심술궂기까지 하다.

저런 감정을 연주할 수 있다는 것에 아리엘은 경외감을 느꼈다.

피아노 앞에 앉기까지의 수많은 고뇌와 힘겨움.

그런 것들을 타티아나는 여실히 드러내었고, 그 모든 것을 고도프스키의 곡을 빌려 한 손으로 연주하면서 지금 이곳에 없는 에르네스트에 대한 마음과 존중 또한 드러냈다.

“…….”

에르네스트의 팬으로서 강행된 연주회에 대한 의문과 불만 등을 가지고 있던 아리엘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타티아나와 이 연주회에 관여하는 사람들은 사고를 마치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 고심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걱정하고 슬퍼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한자리에 불러들였을 뿐이었다.

이 연주회홀은 아리엘뿐만이 아니라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 모두를 위한 장소였다.

이곳에서 타티아나는 자신 또한 다르지 않음을 보여 주었다.

그녀 주위를 맴도는 음악의 진동은 격렬하게 휘감아 도는 감정들의 색과 같다.

그 흐름 속에 동화되면서 아리엘은 자신에겐 있고 타티아나에겐 없는 한 가지를 깨닫는다.

바로 절망감이었다.

‘어떻게 부조리함을 느끼면서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어?’

아리엘은 에르네스트가 다시 피아노 앞으로 돌아오길 간절히 기원한다.

하지만 그것이 곧 기적이 있지 않고서야 어려울 것이란 생각 역시 동시에 하고 있었다.

그건 그녀가 비관적인 사람이라서가 아니었다.

실제로 수많은 전문가들이 그런 예상을 하기도 했고, 아리엘도 팔 부상으로 은퇴한 피아니스트를 알기 때문이었다.

다시 멀쩡한 모습으로 에르네스트가 회복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하긴 어려웠다.

상식을 근거로 하는 절망은 그 무엇보다 강력하게 그녀를 장악하고 주변으로 퍼져나간다.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청중들이 비슷할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가장 앞 무대에 서 있는 타티아나는 조금 달랐다.

한 팔을 축 늘어뜨린 채 그 누구보다 절망하고 있어야 할 것 같은 그녀는 결코 무기력하게 패배하지 않았다.

다시 타티아나의 왼손이 도약하며 떨어져 있는 음들을 이어 붙인다.

“…….”

잠시 멈춰 버린다면 바로 쓰러져 버릴 것 같은 연주이지만, 멈추지 않고 다음 건반을 누른다.

끊임없이 건반을 연주하는 타티아나는 조금 더 강렬하게 손끝에 힘을 주면서 무대 위로 음악을 퍼뜨려 나갔다.

한 손 연주엔 당연히 한계가 있을 것 같았지만, 타티아나는 그런 건 아랑곳하지 않았다.

처음엔 슬픔, 그리고 공감 등을 느끼던 아리엘은 이제 앞서 나가는 타티아나를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단지 옆에 머물러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모두가 방향을 잃고 있을 때 앞서 나가 길을 밝혀 주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되는 거야……?’

첫 주제를 조금 변형시킨 연주가 다시 한번 들려온다.

그 소리는 홀을 한 바퀴 돌아 다시 피아노 속으로 들어가선, 다시 증폭되어 터져 나갔다.

아리엘은 마치 그 소리가 눈에 잡힐 듯 보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을 마지막으로 치솟던 음은 결국 타티아나를 멈춰 세웠다.

모두를 이끌고 앞서 나아가던 타티아나의 앞을 거대한 장막이 가로막는다.

타티아나는 거칠게 장막을 젖히지 않고 조용히 서서 바라본다. 그렇게 보다가, 손을 내려놓았다.

음악이 가져다주는 마지막 이미지는 강렬하게 모두의 뇌리에 자국을 남겼다.

“…….”

고도프스키의 엘레지. 3분가량의 짧은 연주는 끝났다.

피아노 소리가 잦아들고 적막이 홀을 덮어도 그 뒤를 박수 소리가 채우는 일은 없었다.

아무 소리도 없이 고요함만이 주변에 가득했다.

원래 뒤숭숭한 분위기였음에도 1부에서 퀸텟의 뛰어난 연주엔 아낌없이 박수와 환호를 보내 줬던 청중들이 지금은 모두 말없이 입을 벌린 채 무대의 타티아나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음을, 모두가 인지하고 있었다.

‘이야기가 남았어.’

정신이 무너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타티아나는 그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바로 보면서 한 손만으로 무대에 섰다.

그렇게 한 손으로도 보다 쉬운 선택들을 할 수 있었을 터다.

보다 화려하고 희망적인 메시지들을 보내서 쉽게 달래고 진정시키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타티아나가 음악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직접 듣고 체감한 아리엘은 분명히 그렇게 확신했다.

그랬다면 박수도 많이 받을 수 있었겠지.

하지만 타티아나는 그런 거짓을 피아노로 노래할 수 없다.

누구보다 솔직하게 엘레지를 노래하며 슬픔을 함께했다.

그러면서도 절망하지 않고 발걸음을 앞으로 옮긴다.

청중들이 말없이 그녀를 따를 수 있었던 건 이 어렵고 복잡한 음악이 지금 타티아나의 진심임을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그녀가 장막 앞에서 멈춰 섰다.

아리엘은 숨을 쉬는 것도 잊고 그녀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

타티아나는 물끄러미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리엘은 언젠가 에르네스트가 무대 위로 돌아온다면, 비슷한 모습을 할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모두가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고요 속에서 이윽고 흐릿하게 웅크려 있던 실루엣이 움직인다.

조명도 조금 더 밝게 주변을 비췄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이 옆얼굴을 가려서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그녀가 무언가 준비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타티아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왼손으로 머리칼을 어깨 뒤로 넘긴 그녀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훨씬 커졌…….’

타티아나는 장막을 손으로 확 끌어내렸다.

흐느끼는 울음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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