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9화
에르네스트는 병실에 설치되어 있는 텔레비전을 지금까지 한 번도 켜지 않았다.
혹여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면 견디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비슷한 이유로 그는 인터넷도 잘 하지 않았다.
병실에 누워 있는 모든 시간은 수술을 준비하여 팔을 안정시키고 음악을 듣거나 작곡하는 데에 사용했다.
그러나 오늘 에르네스트는 텔레비전을 켜 놓고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
문화부 주최의 가을 연주회.
매년 하는 정규 연주회의 생중계가 텔레비전에서 방송되고 있었다.
그가 불과 얼마 전까지 준비하던 연주회였다.
‘다큐멘터리는 아예 내보내지 않네.’
그들의 준비 등을 연주회 앞과 인터미션 사이에 내보내기 위해서 촬영도 많이 했었는데, 역시 그걸 편집해서 내보내긴 어려웠는지 연주회 시작 전 화면은 그저 계속해서 홀 안을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불완전함과 어수선함이 벌써부터 느껴진다.
에르네스트는 이렇게 되리란 걸 예상했으면서도 타티아나에게 연주회를 종용했고, 결국 그녀가 받아들이게 했다.
이 화면은 바로 그 결과였다.
“…….”
타티아나는 강인한 연주자이다.
인간으로서의 다정함이 그녀의 균형을 흔들어 놓고 있지만, 에르네스트는 그 따뜻한 면모가 속박이 된다면 과감하게 뿌리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경애하는 타티아나가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나아가길 희망했다.
그 이후 프로그램 등을 물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어렴풋이 예상가는 곡들은 몇 곡 있었다.
본래 듀엣으로 연주하기로 했었던 헝가리 광시곡 2번 등이었다. 타티아나는 혼자서도 충분히 그 곡을 연주할 수 있었다.
그렇게 에르네스트 없이 혼자서 고난도의 곡을 완벽하게 연주해 내는 모습은 오롯한 피아니스트로서 완전해진 타티아나를 청중들 앞에서 증명하는 계기가 될 터였다.
여러 의견들이 끼어들지도 모르겠지만, 타티아나는 그 모든 잡음들을 실력으로 찍어누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고 나면.
타티아나를 속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른 누구든. 물론 나 역시.’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고 다짐하면서 에르네스트는 연주회 중계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치 못한 첫 프로그램에 경악했다.
‘고도프스키의 엘레지……?’
이런 큰 무대에선 사실 피아노 솔로로 홀을 가득 채우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심지어 타티아나는 한 손을 거두어들이고 연주를 시작했다.
소매가 긴 드레스를 입은 타티아나가 슬픔의 노래를 읊조리는 모습을 화면으로 지켜보며 에르네스트는 할 말을 잃었다.
왼손만으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타티아나는 그 누가 보더라도 분명하게 알 수 있을 정도로 에르네스트를 위하고 있었다.
어째서 저 애가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까.
되레 모든 걸 손에 쥐고 오른 바람에 타티아나는 더 어려운 무대에 서야만 했다.
에르네스트는 이런 걸 원하지 않았지만, 그의 진실된 마음이 바로 지금 위로를 얻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속박도 다정함도 없이 타티아나가 홀로 당당하게 무대를 휩쓰는 광경을 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 역시 진실이다.
그러나 이렇게 타티아나가 자신을 내버려 두지 않고 돌아봐 주고 있다는 사실은 그를 벅차게 만들었다.
그러한 감정을 자각하고 나서야 에르네스트는 마치 지금까지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 사실이 부끄러워져서 그는 텔레비전을 꺼 버릴 뻔했지만, 지금 타티아나를 제대로 직시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깨닫곤 조용히 텔레비전에 집중했다.
“…….”
음악은 이미 고도프스키가 아닌 타티아나의 것이 되어 있었다.
세세한 표현력을 강점으로 하는 타티아나의 실력은 이 무대에서도 여실히 발휘되었다.
화면 너머로 느껴지는 음악만으로도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흩뿌리는 감정들에 이미 청중들이 모두 동화되어 버렸음을 느꼈다.
연주가 끝났을 땐 박수조차 없었다.
이 음악의 가치를 따져본다면 굉장한 실례였지만, 이것은 1700명의 마음이 동시에 합의한 경의의 표시였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뻗어 있던 분위기들이 한데 정갈해졌다.
그 전부가 지금 타티아나와 에르네스트에게 향한다.에르네스트는 지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병실에 있을 뿐이지만, 언젠가 저 무대에 서서 답가를 들려줘야 할 것 같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그저 한 손으로 연주하는 답가를 바라고 이 무대에 선 것이 아니었다.
“에르네스트, 지금…….”
막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던 의사는 에르네스트가 텔레비전으로 연주회를 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뒷걸음질 쳐서 나가려 했다.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지금 이 무대를 한 사람에게라도 더 보여 주고 싶었다.
“들어오시죠, 바쁜 일입니까?”
“아뇨, 그건 아니니…… 다 보고 나면…….”
“시간 괜찮으시다면 와서 앉으세요. 같이 보죠.”
의사는 조금 주저했지만 에르네스트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서라도 지금 옆에 있을 필요가 있다고 느꼈는지 곧 그의 옆에 와서 섰다.
음악에 집중할 상황이 아니니 굳이 앉아서 볼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에르네스트는 신경 쓰지 않고 다시 텔레비전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천천히 들어 올렸던 타티아나의 손이 건반으로 낙하한다.
“…….”
연달아 울리는 거대한 옥타브.
얼굴 높이에서 건반 위로 떨어진 손은 튕겨 올랐다가 다시 질척하게 파묻힌다.
이어서 타티아나는 다시 왼손을 뽑아 내던졌다.
그리 높이가 높지도 않았지만, 마치 수십 미터 위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엄청난 깊이와 무게감이 있었다.
옆에 서 있던 의사가 움찔했다. 스피커로 들어도 소름 끼치는 이 음향이 홀을 가득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몇 차례 건반에 튕겼다가 파묻혔던 왼손은 결국 진득하고 검은 진흙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점점 더 깊게 빨려 들어간다.
이대로 타티아나가 그대로 피아노 속으로 끌려 들어갈 것 같다는 기분이 들 때였다.
소매 속에 감추어져 있던 그녀의 오른손이 모습을 드러냈다.
“…….”
긴 소매가 스르륵 흘러내리고, 타티아나는 오른손으로 파묻혀 있던 왼손을 천천히 일으켜 세운다.
배려가 담긴 도움이 아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더 깊은 곳으로의 낙하.
마른 나무와 강철 현은 죽음과 지옥의 이미지를 선명하게 그려 내었다.
‘이 선곡은…….’
에르네스트는 이 곡의 정체를 잘 안다. 몇 번이나 연구하고 실제로 레퍼토리로 삼았던 곡이기도 하다.
프란츠 리스트의 순례의 해 2년 이탈리아. S161 모음곡 중 7번 곡.
단테를 읽은 후, 소나타풍의 판타지.
속칭 단테 소나타라 일컬어지는 곡이다.
“…….”
13세기 이탈리아의 시인 두란테 델리 알리기에리는 단테라는 약칭으로 유명하다.
이 위대한 시인이 지옥과 연옥, 천국을 통과하는 여정을 그린 서사시는 지금까지도 이탈리아의 헤리티지로 손꼽히는 작품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작품을 읽고 떠올린 감상을 리스트는 악보 위에 옮겼고, 그것은 곧 클래식 세계에서의 헤리티지가 되었다.
수백 년 동안 각각의 세계에서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응축된 가치를 쥐고, 타티아나는 거침없이 음악을 무대 위에 풀어놓는다.
“…….”
지옥의 습기가 느껴진다.
에르네스트는 어쩐지 익숙하다고 생각하며 이 곡을 연습하기 전에 연구했었던 본래 서사시를 떠올렸다.
‘인생의 여정 중간에서, 난 어두운 숲속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올바른 길을 잃어버린 까닭일지니.’
그 첫 독백은 에르네스트가 느끼는 공허함과도 닮아 있었다.
어두운 숲은 무섭고 으스스해서 방향 감각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단테는 헤매며 길을 찾다가 산기슭에서 떠오르는 햇살을 보고 무작정 그쪽으로 향하는데 그의 앞을 표범, 사자, 늑대가 올라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다.
어떻게든 올라가고 싶은 단테와 그 앞을 막는 세 마리의 짐승.
그때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나타나 저 위로 올라가고 싶다면 길을 인도해 주겠다고 제안하고, 단테는 그를 따른다.
베르길리우스가 안내하는 길은 지옥과 연옥, 천국을 가로지르는 길이었다.
몇 번이고 낙하하여 도착한 지옥의 입구.
단테는 조심스럽게 두리번거리고, 신중하게 발을 내딛는다.
“…….”
타티아나는 섬세하게 건반을 움직이며 발소리 하나까지도 선명하게 구분해 내며 선보였다.
엄청난 수준에 이르렀던 그녀의 실력은 그만큼 가치 있는 대곡을 만나 한층 더 상승했다.
에르네스트는 이 곡의 제목을 알고 있기에 조금 더 빠르게 이해하며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었지만, 만약 아무것도 모르고 곡을 듣는다 하더라도 타티아나가 무엇을 그려 내는지 느끼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았다.
지금 타티아나의 역할은 단테가 아니었다.
단테는 청중들이고, 타티아나는 베르길리우스다.
세상에서 건반 아래의 안내자라 불리는 타티아나는 오늘 저승 세계의 안내를 맡아 손짓했다.
청중들은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그 손짓에 따랐다.
더듬거리면서 지옥의 문을 지나서고 나면 진정한 불길을 마주하게 된다.
‘건반 아래의 안내자라 했던가.’
타티아나의 독주회 후에 언론 등에서 이야기하던 그녀의 별명이 떠올랐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라는 이름의 주목도가 높기에 아직 많이 쓰이진 않지만, 에르네스트는 그녀에게 그 별명이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건반을 눌러 내림으로써 음악을 바닥으로 깔아 무대를 만들고 청중들을 이끈다.
양손으로 반복되는 빠른 옥타브의 연속은 하나의 긴 프레이즈로 이어지며 지옥의 배경을 그린다.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타들어 갈 것 같은 불길과 유황이 타는 냄새. 울부짖는 사람들의 모습들.
원작에서는 이 사람들과 대화를 하기도 하지만, 리스트가 음악적으로 재해석한 이 곡에선 지옥은 그야말로 하나의 이미지로 존재할 뿐이다.
그 정중앙을 베르길리우스이자 타티아나는 가로질렀다. 지옥의 배경이 스쳐 지나간다.
단테이자 에르네스트는 그 뒤를 따르며 지옥에 떨어졌을 때의 고통을 떠올렸다.
실제로 체감한 그 절망적인 기분은 여기에 있는 사람들의 비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다른 점이 에르네스트를 지옥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 있게 했다.
타티아나가 그를 안내하고 있었고, 이따금 뒤돌아봐 준다는 것이었다.
“…….”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의 대리인으로서 이곳에 있는 타티아나는 불길이 치솟는 9개 지옥의 이미지를 그 무엇보다 강렬하게 표현하면서도 그 위를 지나가며 안도할 수 있게 했다.
갑자기 바닥에서 악마가 솟아올라 창으로 그를 찌르고 머리칼을 낚아채어 끌어내리지 않을 것이란 확신.
안내자와 함께 다른 곳으로 향할 것이란 믿음. 실제 단테도 느꼈을 그 확고한 믿음이 에르네스트를 움직였다.
타티아나는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에르네스트가 더 이상 두려움에 떨고 있지 않다는 것을 표정으로 확인하고는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그때부터 이미 그들이 서 있는 길은 지옥의 한가운데가 아니었다.
악마적인 스타카토의 연속은 이미 천사들의 나팔 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타티아나 역시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아니었다.
“…….”
환한 빛이 가득하다. 그들은 지옥의 출구에 서 있었다.
세례를 받지 못한 베르길리우스는 천국을 안내할 수 없기에 이때부터 안내자의 역할을 맡은 건 단테가 사랑한 여인인 베아트리체였다.
타티아나의 연주가 서서히 느려진다.
건반을 다루는 힘 역시 가벼워졌다.
건반을 꾹 딛고 다음 건반을 딛는 것이 아니라, 그 위를 아주 여리게 터치하기만 한다.
그녀의 긴 소매가 살짝 흔들렸다.
어느새 그녀는 천천히 허공을 걷고 있었다.
길게 늘어지거나 흐릿해지지 않고 한 걸음씩 확실하게 천국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른다.
에르네스트가 멍하니 올려다보니 뒤에서 들리는 발소리가 멎었음을 인지한 타티아나가 다시 뒤를 돌아본다.
그녀는 결코 그를 버려 두고 홀로 가지 않는다.
한 계단 내려오기까지 하면서 타티아나는 그에게 손을 내민다.
만약 움직이지 않는다면 타티아나가 여기까지 내려와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에르네스트는 무릎을 움직여 계단을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