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7화
아나스타샤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 어색해 보일 수가 없었다.
중앙음악학교의 학생임을 나타내는 군청색 교복은 그녀가 평소 자랑스러워하기도 했고 스타일만 놓고 보아도 자신에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옷이었지만, 지금은 어쩐지 이 옷을 입고 가야 할 곳으로 간다는 것이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저번 주부터 있었던 일들과 연주회가 그녀를 학교로부터 먼 곳으로 떼어놓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
방 옆에 있는 사일런트 피아노를 내려다보았다.
연주회가 끝난 후에도 아나스타샤는 스스로 확인하듯 몇 번이나 건반을 연주했었다. 그녀는 확실히 피아노 연주자로선 회복했다.
타티아나가 보여 주었던 헌신과 믿음을 일부나마 지키고 따르기 위해서 아나스타샤는 몇 번이고 피아노 앞에 앉을 수 있었다.
그때만큼은 그 어떠한 것도 그녀를 제약하지 못했다.
그러나 교복을 입고 학교로 가는 건 망설여진다.
그곳에 자신의 자리가 아직 있을까.
‘차라리 진학할까.’
연주회가 끝난 후 그녀는 몇 곳의 음악원의 입학처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녀가 원하기만 한다며 언제든 들어오게 해 주겠다는 제안이었다.
특히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걸려 온 전화는 그녀를 꽤 크게 흔들었다.
이전 같았으면 아직 그럴 생각 없다고 칼같이 거절했겠지만, 아나스타샤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생각을 좀 해 보겠다고 전했다.
기차로 4시간쯤 걸리는 훌륭한 음악원으로의 진학. 아주 적당한 거리와 시간, 그리고 계기였다.
별로 이상하지 않겠지. 그렇게 떠난다 해도.
에르네스트는 그녀에게 아깝지 않느냐며, 자신이 다 나으면 그때 제대로 마주 보고 이야기하자고 달래듯 말해 주었다.
바보 같을 정도로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자신이 그 정도로 강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겐 연주회 무대에 서서 역할을 다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평생 눈앞에서 사라질 생각은 없었다.
그건 모두가 불행해질 최악의 선택일 테니까. 대신 먼 곳에서 이따금 만나는 것 정도로.
조금 먼저 음악원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실력을 쌓고. 그 애들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가 줄 수 있는 정도라면.
그 정도면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하지만 스스로 만족할 수 있을 거라 예상하는 선을 아무리 그어 놓는다 하더라도 결국엔 그 선을 지키지 못하고 만다는 것을, 아나스타샤는 이전까지의 경험으로 충분히 체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욕심이 결국 타티아나마저 망가뜨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이따금 짓쳐들어오며 그녀의 목을 조여 왔다.
교복을 입은 모습이 갈수록 더더욱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아나스타샤는 신경질적으로 재킷을 벗어 던졌다.
블라우스 단추를 풀어 버리려다가 잘 되지 않아 힘으로 뜯어 버리려던 찰나였다.
“……약속했었네.”
연주회가 끝난 후 타티아나는 그 무엇보다 빠르게 병원으로 향하려 했다.
그런 그녀를 홀로 보내기 위해 아나스타샤는 학교에서 보자는 약속으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만약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타티아나를 납득시키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반쯤 즉흥적으로 했던 약속이었는데, 그 약속이 지금 아나스타샤를 옭아매었다.
만약 오늘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면 타티아나는 불안해 할 것이다.
그 상태로 학교에서 모든 주목을 혼자 상대해야 할 상황에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일단 학교에 가자. 가서, 타티아나를 보며 적어도 며칠간은 안정이 되어 줄 필요가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수술을 받고 재활을 제대로 시작하게 된다면 좋은 이야기들을 할 수 있게 되겠지.
좋은 이야기들을.
“…….”
아나스타샤는 벗어 놓았던 재킷을 다시 걸쳐 입고는 방 밖으로 나왔다.
밖에선 일리야가 쇼를 하고 있었다.
식사용으로 사놨던 빵들을 다시 오븐에 굽는 것 같았는데, 왜 접시란 접시는 다 나와 어질러져 있는 건지 모르겠다.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일리야는 손을 팔랑 흔들더니 자기 앞에 있는 접시를 가리켰다.
“스콘 먹을래?”
“아니.”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툭 내뱉고는 현관 쪽으로 향했다.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저 멀리서 일리야의 한마디가 그녀를 멈춰 세웠다.
“학교 가는 것 맞지? 아나스타샤.”
아무것도 아닌 질문인데도 그 목소리는 신경을 거슬렀다.
딱히 불신이나 감시의 질문이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일리야는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고. 두 사람은 서로 터치하지 않는 걸 불문율로 하는 남매였다.
하지만 서로 상관하지 않는다 하여 염려하지도 않는 건 아니었다.
동생을 걱정하는 마음이 거기에 담겨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걸 느끼면서도 아나스타샤는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럼 내가 교복 입고 어딜 가겠어? 이 근처 돌아다니면 30분 안에 경찰이 중앙음악학교 학생이 이 시간에 거리에서 뭐 하고 있냐며 붙잡을걸?”
농담이 아니라 정말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이 교복을 입고 오전에 거리를 돌아다니는 건 사람들의 시선을 엄청나게 끈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다.
애초에 학교에 갈 생각이 없었다면 그냥 쉬겠다고 했을 것이다.
아나스타샤는 그 정도 강단도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학교도 음악도 그녀를 속박하지 못한다. 그녀는 그런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학교에 오기 어렵겠지?”
“……지금 그 말이 왜 나와?”
“혹시나 싶어서.”
하지만 지금 그녀는 분명 속박되고 있었다.
타티아나가 기다리고 있을, 병실에 있을 에르네스트는 가지 못할 학교로 가 봐야 한다는 것에.
음악원으로 진학하는 것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더 강해진다.
그녀는 이런 상황을 길게 버티지 못할 거란 걸 서서히 깨닫고 있었다.
“…….”
현관으로 향하다 말고 멈춰선 채 노려보고 있는 아나스타샤를 바라보던 일리야는 식탁 앞으로 서서히 걸어 나오며 말했다.
“내가 네 교우관계에 신경 써 오지도 않았고 그럴 자격도 없지만 말야.”
너무 어렵게 생각하진 말라는 투로, 일리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널 기다리는 친구들도 많을 거야. 그렇지 않아? 아나스타샤.”
“…….”
아나스타샤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 노려보기만 했다.
다른 친구들이라 해 봐야 몇 명 안 된다.
친하게 지내는 건 발렌티나와 타티아나 정도고…… 그 외엔 한승우나 리처드, 바르바라, 안드레이. 그리고 아나톨리와 류보비, 사샤…….
혼자 생각하던 아나스타샤는 생각보다 너무 많아지는 이름들에 약간 당황했다.
어느새 이렇게 많아졌지?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정말 없었는데.
그 애들이 전부 기다리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은 별로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의식하게 되니 그녀를 학교로 끌고가던 의무감들 말고도 궁금증 등이 서서히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 동생을 가만히 관찰하던 일리야는 손을 뻗더니 옆에 있는 스콘을 집어 들며 다시 물었다.
“진짜 이거 안 먹을래?”
“됐다고.”
뜬금없는 말이 귀찮고 짜증 난다.
아나스타샤는 퉁명스레 거절하고는 다시 휙 돌아서선 현관에 섰다. 슬리퍼를 벗고 구두를 막 신으려던 순간이었다.
목 근처에서 향긋한 냄새가 올라왔다. 없던 식욕도 갑자기 생기는 냄새였다.
그리고 그것이 빵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빵이 아닌 사람이 풍기는 위협의 냄새가 그것을 뒤덮어 버리며 아나스타샤의 뒤를 장악했다.
무언가에 겨누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멈춰 섰다.
냉랭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속삭였다.
“움직이지 마. 머리에 잼 묻는다.”
“……뭐 해 지금? 묻히기만 해 봐. 죽여 버릴 테니까.”
“지금 상황 파악을 못 하나 본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오늘 시간표에 대해 말해 봐.”
이 인간이 장난치는 건가 지금?
장난을 받아 줄 기분이 전혀 아닌 아나스타샤는 확 짜증을 내며 험한 소리를 냈다.
“별 미치…… 읍!”
그런데 막 입을 열자마자 아나스타샤의 입안으로 스콘이 들어왔다.
짜증과 분노가 섞인 눈으로 휙 돌아보자 일리야는 이미 그녀의 팔이 닿지 않는 범위 밖으로 물러서 있는 상태였다.
어떻게 행동할지 다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 싱글벙글 웃으며 일리야가 말했다.
“그것만 먹고 가.”
바닥에 뱉어 버릴까 싶었지만 그랬다간 일리야가 생각 이상으로 상처받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동시에 그딴 걸 왜 신경 쓰고 있냐는 생각이 들다가도, 일리야의 눈을 보고 있자니 독하게 대하기가 힘들었다.
별수 없이 아나스타샤는 스콘 하나를 다 먹었다.
냉동 스콘을 오븐에 구워서 잼을 얹은 것뿐이지만, 도저히 기분이 나쁠 수가 없을 정도로 맛있었다.
아나스타샤는 그 기분을 부정하듯 짜증스럽게 말했다.
“수…… 콜록, 숨 막힌다고!”
“내 고문 기술을 알았다면 앞으론 까불지 말도록.”
“미친 거 아냐 진짜!?”
동생이 짜증을 내건 말건 일리야는 실실거리며 다시 식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계속 쳐다보고 있는 아나스타샤에게 툭 한마디 했다.
“왜? 뭐?”
“…….”
말을 말자.
애초에 논리 같은 게 통하지 않는 인간이다.
여기서 더 화를 내면 그게 말려드는 일이라 생각하며 아나스타샤는 마지막으로 흘겨보고는 등을 돌렸다.
하지만 현관을 쾅 닫고 엘리베이터에 탔을 때, 아나스타샤는 자신이 웃고 있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었다.
스스로 이렇게 단순한 사람이었나 생각하며 그녀는 일부러 인상을 쓰다가, 결국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간지럼에 당한 거랑 비슷한 거야. 어쩔 수 없었던 거라고.’
일리야가 한 것이 그 나름의 위로인지 뭔진 모르겠지만 아나스타샤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속으로 계속 짜증을 내며 학교로 향하는 지하철에 올랐다.
오늘따라 사람들도 많은데다가 심지어 중간에 15분 정도 멈춰서기까지 하는 바람에 그녀의 짜증은 점점 더 강해져 갔다.
당연히 스콘 하나로는 아무것도 해결이 안 된다.
아나스타샤는 교복을 벗고 이곳을 뜨는 생각을 독하게 되뇌었다.
일리야와도 먼 곳에 살게 되면서 오늘 아침같이 귀찮은 일은 없겠지. 그건 괜찮은 거잖아?
앞으로도 아나스타샤는 더 독해질 필요가 있었다.
에르네스트에게 맞서고 타티아나에게 솔직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그 애들과 멀어져야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스스로 그런 생각을 공고하게 다져 나가며 아나스타샤는 학교에 들어섰다.
그리고 문을 열고 친구들을 마주했을 때,
자신이 그렇게 독한 사람이 되지 못하리란 것을 직감했다.
“…….”
반가움에 가득 찬 눈빛을 보내는 반 친구들과 그 가운데에 있는 타티아나.
아나스타샤는 이 아이들이 결코 자신에게 의혹을 보내거나 사라지길 바랄 것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안녕.”
“어서 와요, 아나스타샤.”
타티아나 싱긋 웃으며 인사해 왔다.
마치 아나스타샤를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아이들이 길을 터 주었고, 그녀는 타티아나의 옆자리에 앉았다.
갑자기 주목을 받으니 조금 어색하다. 가방을 내려놓는 아나스타샤의 입에선 그녀도 모르게 변명부터 나왔다.
“오늘 지하철에 갑자기 문제가 생겨서 중간에 멈춰 섰더라고…….”
“그랬나요?”
“어…… 응, 그리고 아침에 나가려는데 일리야가 갑자기 시비를 걸기도 했고…….”
“그랬었군요.”
무슨 말을 해도 다 들어 줄 것처럼 타티아나는 가만히 앉아서 그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는, 환하게 웃었다.
“그래도 이렇게 늦지 않게 왔네요.”
타티아나 역시 잠깐 지나치듯 했었던 약속을 잊지 않고 있었다.
오늘 멋대로 굴었다면 이 애가 얼마나 실망했을까. 아나스타샤는 속으로 안도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짧은 인사가 끝나자마자 옆에 서 있던 바르바라가 잘 되었다는 듯 끼어들어 말했다.
“안 그래도 네 이야기 하고 있었어 아나스타샤.”
“응? 나? 무슨 이야기?”
“당연히 연주회 이야기지!”
바르바라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방금까지 있던 흐름에 포함시키듯 아나스타샤를 주인공으로 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녀가 꽤 신경 써 주고 있는 것 같아서, 아나스타샤 역시 신경 써서 대답하고 웃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점점 더 마음이 약해진다.
아나스타샤는 가까운 음악원도 아니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나서 자신이 혼자서 잘 해나갈 수 있을지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함을 느꼈다.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타티아나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넌지시 말했다.
“오늘 정말 지각이 걱정되는 분이 있네요.”
“누구?”
“……아뇨, 걱정 안 해도 되겠어요.”
타티아나가 했던 말을 주워섬기는 모습은 흔하지 않다.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교실 문이 벌컥 열리며 갈색 단발머리의 여학생이 들어왔다.
그 새된 목소리가 어쩐지 안 들린다 했어.
아나스타샤는 자기도 모르게 웃으며 발렌티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거기에 이어 타티아나도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발렌티나. 좋은 아침이에요.”
“올 거면 올 거라고 말을 하라고! 너희 둘 다!”
난데없이 버럭 성질을 내며 발렌티나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올 거면 말을 하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학생이 학교에 오는 게 그리 특이한가?
아나스타샤는 그런 당연한 이야기를 장전하며 발렌티나의 말을 맞받아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까이에 다가온 발렌티나는 멈추지 않고 그대로 두 사람을 끌어안았다. 옆을 보니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당황한 아나스타샤가 굳어 있는 사이 타티아나는 부드럽게 발렌티나를 다독였다.
“울지 마세요. 발렌티나.”
“안 울었거든? 내가 왜 울어? 너네 때문에?”
“…….”
발렌티나의 울먹이는 목소리를 들으며 아나스타샤는 이대로 있다간 자신도 울어 버릴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때문에 일부러 발렌티나의 옆구리를 간질였다. 기겁하며 발렌티나가 튕겨 나갔다.
발렌티나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아나스타샤를 노려보았다. 눈물이 맺힌 그 표정을 보며 아나스타샤는 깔깔거리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