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8화
우리가 돌아온 것을 기뻐해 준 것은 친구들뿐만이 아니었다.
1교시인 음악사 수업에 들어온 류드밀라 선생님은 앞에 앉아 있는 나와 아나스타샤를 보자 정말 눈에 띌 정도로 반가워하셨다.
“연주회는 방송으로 잘 봤어요. 아나스타샤, 합주 실력이 깜짝 놀랄 정도로 좋아졌더군요. 그렇게만 해 준다면 앞으로도 걱정이 없겠어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타티아나…… 몇 년 전에 타티아나를 합격시킨 것이 정말 최고의 선택이었단 생각이 드네요.”
류드밀라 선생님은 정말 자랑스럽다는 듯 말씀하셨다.
편입 시험 때 구세프 선생님은 날 떨어뜨리려 했었다.
이분께서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난 정말 많은 분들의 도움과 기적 위에 서 있었다.
수업을 많이 들을 기회가 없어서 류드밀라 선생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긴 어려웠지만, 그래도 이럴 땐 진심 어린 말을 돌려 드리고 싶다.
“저도 이곳에서 공부하고 졸업하기로 한 것이 최고의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듣기만 해도 기분 좋은 말이네요.”
그 정도로 충분하다는 듯 류드밀라 선생님은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곧 선생님의 시선은 창가 쪽 비어 있는 한 자리를 스쳤다가, 조용히 교과서로 돌아갔다.
이 교실의 빈 자리는 신경 쓰지 않기엔 너무 크게 느껴진다.
바로 음악사 수업이 시작되었다. 선생님은 교과서를 펼치며 페이지를 불러 주셨다.
난 그 페이지를 따라 펴면서 아직 만나 뵙지 못한 선생님들을 떠올렸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치 않다. 특히 구세프 선생님은 에르네스트의 일로 가장 복잡하실 테니까.
연주회에서 내가 한 일들을 어떻게 생각하실진 모르겠다.
하지만 한 번은 제대로 만나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전 내내 흘러간 수업시간은 내가 그간 넘어간 진도를 따라잡는 것과, 앞으로 해 나가야 할 일들을 생각하는 일로 바쁘게 흘러갔다.
잠깐 집중한 것 같은데 점심시간이 되어 있었다.
“오늘은 다들 점심에 할 거 없지? 다 같이 내려가서 먹자. 어때?”
“그래. 타티아나, 아나스타샤도 가는 거지?”
바르바라의 제안에 모두가 응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보통 우리는 오전 수업이 끝나면 각자 스케줄에 따라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점심시간도 자유롭게 쓰는 편이었다.
때문에 삼삼오오 모여서 식사하긴 해도 단체로 우르르 가는 일은 드물다.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우리 식당 급식비도 올린다고 하던데, 들었어?”
“더 나아지려나?”
“드디어 지긋지긋한 메뉴 돌림 안 봐도 되는 거냐?”
“그게 아니라 물가상승 때문에…….”
열여섯 살들이 할 만한 이야기들이 주변에서 오간다. 가만 듣기만 해도 즐거워서 난 아무 말도 않고 포크를 들었다.
잡담이 오가는 식사가 끝나고, 그때까지 쭉 함께 모여 있었던 아이들은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연습이나 레슨, 클럽 활동 등 바쁜 이유들이 많았다.
“나도 가야겠어. 내일 봐, 타티아나.”
“예, 내일 뵈어요.”
바르바라가 손을 흔들며 식당을 빠져나갔다.
아직 점심때인데도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 우리에겐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난 그녀와 손을 마주 흔들어 주었다.
레슨이 있는 발렌티나도 시간에 맞추어 떠났고, 잠시 시간이 있는 나와 아나스타샤는 식당 근처의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
잠시 우리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같은 일을 겪고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 우리들은, 지금 역시 거의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임이 분명했다.
너무나 따뜻한 분위기.
아직 돌아오지 못한 한 명이 있는데 이런 환대를 받아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친구들도 선생님들도 그걸 몰라서 우릴 반겨 준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 둘만이라도 제자리에 다시 돌아와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걸 모를 수가 없었다.
난 학교로 돌아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 벌써 나도 모르는 사이 일상적인 생활이 가능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움직일 수 있는 힘은 학교 그 자체가 아니라 이곳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조금씩 전해져 오고 있는 것이었다.
허리를 살짝 숙이고 있던 아나스타샤는 먼 어딘가를 보며 말했다.
“만약 네가 쉬겠다고 했으면 나도 쉬었을 거야.”
“오늘요?”
“응. 아마 오늘. 혹은 내일도.”
우린 연주회 전에도 무단결석했었다.
이미 그렇게 된 상황에 연주회가 끝나고 나서도 며칠 정도 더 쉰다고 해도 아마 크게 이상하진 않을 터였다.
이유라면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학교로 돌아가는 것을 관성적으로 하루 미루고 이틀 미루다 보면 결국 점점 어렵게만 될 뿐이다.
때문에 난 정확한 때에 되돌아갈 수 있길 바랐다. 그게 여러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기도 할 테니까.
아나스타샤는 옆머리를 빙글빙글 돌리더니 희미하게 웃으며 날 돌아보았다.
“그런데 이렇게 와서 보길 잘한 것 같아. 그렇지 않니?”
“……후후, 그렇네요.”
“응…….”
여전히 아나스타샤의 얼굴엔 어두운 기색이 머물러 있었다.
연주회를 잘 해내고 나서도 마음의 짐을 내려놓지 못한 건 그녀 역시 나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하지만 학교에 돌아와서 몇 시간을 보내며 빠르게 좋아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녀도 날 보며 그렇게 느끼는 걸까.
그렇다면 아마 학교에 빠지지 않고 다니게 하고 싶다는 마음 역시 나와 같을지도 모르겠다.
서로 더 깊은 이야기는 하지 않고 잠시 우린 그렇게 두서없는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렇게 표면을 훑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했다.
“오늘은 뭐 할 예정이니?”
“글쎄요, 우선 정규 레슨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선생님을 뵈러 갔다가…… 오늘은 스터디룸에 있겠네요. 밀린 과제를 할 생각이에요.”
“과제? 아, 과제. 우리 그냥 그거 몰랐다고 하고 빼면 안 될까?”
“안 돼요.”
“연주회 했었잖아. 같이 안 해 버리면 괜찮을걸?”
“연주회는 연주회고 과제는 과제잖아요? 기간이 전혀 안 맞는다면 모를까, 지금부터 해도 할 수 있고요.”
“……내가 미쳐.”
아나스타샤는 중얼거리며 머리를 짚었다. 그러나 정말 단순히 과제가 싫어서 이러는 건 아닐 것 같단 느낌이 든다.
난 은근히 웃으며 그녀를 이다음 약속으로 끌어당겼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스터디룸에 오신다면 제가 아까 받아 놓은 과제들 가르쳐 드릴 수도 있는데.”
“네가 그러면 나한텐 선택권이 없잖니?”
“왜 없나요? 절 설득하시면 되죠.”
나 역시 과제가 너무나도 하고 싶어서 이렇게 고지식한 태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 제안에 반드시 따를 필요는 없다.
아나스타샤가 우선시하는 이유가 있다면 언제든 그쪽으로 향할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물끄러미 날 보더니 곧 크게 웃어 버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타티아나 널 공부하지 말라고 설득하라고? 그냥 내가 하고 말지.”
“……절 잘 알고 계시네요. 그렇게 나오면 반항하고 싶어지는데요.”
“아하하하, 그래? 그랬니?”
한참을 깔깔거리고 웃던 그녀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따가 스터디룸에서 봐.”
다시 볼 약속을 하고 나면 언제든 불안하지 않게 있을 수 있다.
난 가만히 앉아 아나스타샤가 복도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천천히 일어섰다.
***
오늘 내 레슨은 없었다. 점심시간에 잠깐 들린 것이라 이야기할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미하일 선생님은 날 보자마자 달력을 가져다 놓더니 출결 기간 등 행정상 신경 쓸 만한 것들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미인정 결석은 어쩔 수 없이 평가로 남겠지만, 내게 전화로 미리 말했던 3일간은 제대로 연주회 준비 허가 기간으로 빼 두었단다. 그러니 큰 걱정은 안 해도 괜찮을 것 같구나.”
“아…… 감사합니다.”
“감사는, 네가 제때 전화를 줘서 다행이지.”
만약 내가 전화를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미하일 선생님이 우리 집에 전화를 하셨을까?
그 전화는 당연히 보호자인 아버지에게 갔을 테고…… 그러면 일이 어떻게 복잡해졌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연주회를 하기로 마음먹자마자 미하일 선생님께 전화로 알린 게 얼마나 잘한 일인지 새삼 생각하며 고개를 들자, 선생님과 눈을 마주쳤다.
그 후 연습하는 내내 선생님은 내게 일절 터치하지 않고 알아서 하게 두셨다.
난 그것 또한 선생님이 내게 하시는 레슨이라 생각했다.
스스로 세운 기준과 이유를 따라 무대에 오를 수 있는 연주자가 되는 건 이런 연습을 통해서만 할 수 있는 일일 테니까.
하지만 결론적으로 미하일 선생님은 내게 미안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 마음을 어렴풋이 이해한 나는 옅게 웃으며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연주회 내용에 대한 레슨은 언제 부탁드리면 될까요?”
지난 무대에선 내가 할 수 있는 가능한 최선의 음악을 올려놓았지만, 3일 안에 혼자 준비한 내용엔 당연히 빈틈이 존재했다.
프로그램이든 해석이든 테크닉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난 선생님으로부터 레슨을 받아서 더 완전한 음악으로 재현해내고 싶었다.
때문에 평상시처럼 그렇게 말했더니, 미하일 선생님은 멍한 얼굴로 날 보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셨다.
이전에 선생님은 내가 이미 더 낫다고 말씀하신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난 그런 건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 뚜렷한 태도를 본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다. 그럼 레슨은 내일 하자꾸나.”
“내일…… 알겠습니다.”
“나도 한 번 더 보면서 연구를 더 해 와야겠어. 하하.”
기분 좋게 웃으며 선생님은 수첩에 무언가 적어넣으셨다. 나 역시 머릿속 스케줄에 레슨 일정을 새겨넣으며 안도했다.
내일도 기대감을 안고 학교에 올 이유가 하나 늘었다는 건 고무적인 일이었다.
수첩을 닫아 안주머니에 넣으며 미하일 선생님이 천천히 말씀하셨다.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해도 괜찮겠지만, 당장 네게 해 주고 싶은 말도 있구나. 타티아나.”
“해 주세요.”
“힘들었을 텐데, 잘했다.”
“…….”
단어만 놓고 보면 참 흔한 칭찬이다. 어떤 연주회든, 어떤 결과든 받을 수 있는 짤막한 칭찬.
하지만 지금은 그 몇 마디가 미하일 선생님이 느끼는 최대한의 진심을 내게 전해 주신 것이라는 걸, 난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나야말로 고맙구나. 타티아나. 구세프도 그렇게 생각하겠지.”
마지막 한마디엔 정말 여러 가지 의미들이 겹쳐 있었다.
선생님의 제자로서 내가 무너지지 않고 무대에 선 것, 음악가들의 강인함을 증명해 보인 것, 그리고 에르네스트를 저버리지 않고 끝까지 함께 서기 위해 노력했던 것.
내가 얼마나 어렵게 올랐는지, 잘 해내려고 노력했는지 알아주신다는 생각에 살짝 목이 메었다.
목소리를 내면 떨릴 것 같아서 난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은 낮게 웃더니 의자에 비스듬히 앉으며 말씀하셨다.
“그럼…… 내일 보자꾸나.”
“예, 선생님.”
조용히 레슨실 문을 닫고 나오자 떨림이 조금씩 커져 갔다.
이미 에르네스트에게 충분히 도움이 되었다는 걸 확인했으니 사실 다른 기대는 전혀 없었다.
다른 사람의 평가나 기대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선생님의 이런 진솔한 이야기는 내 마음에 또 다른 큰 위로가 되어 주었다.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크게 틀리지 않았다는 걸 내가 믿는 사람들이 증언해 주었다.
때문에 난 스스로를 믿을 수도 있었다. 믿고 있는 사람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을 부정하는 건 모두를 배신하는 일이겠지.
대신 난 이 행복을 돌려주는 것을 목표로 살고 싶었다. 그것 외에 바라는 건 전혀 없었다.
수술 후 다시 보자던 에르네스트, 레슨을 해 주겠다는 미하일 선생님. 그리고 스터디룸에 오겠다던 아나스타샤.
여러 가지 약속들을 떠올리다가, 그중 가장 가까운 약속을 따라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