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9화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가 학교로 돌아왔다는 소문은 반나절 만에 전교에 퍼졌다.
피아노과는 물론이고 다른 기악과 학생들 사이에서도 이 소식이 들리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성악과의 류보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 선배 왔다던데? 우리 부전공이기도 한 피아노과 타티아나 선배.”
“연주회도 끝났으니까 이제 와도 되는 건가?”
“에르네스트 선배는?”
“몰라, 같이 왔다는 이야기는 없는데. 대체 얼마나 크게 다쳤길래 계속 병원에 있는 거지?”
“얼마 안 다쳤더라도 치료는 잘 받아야지. 피아니스트잖아.”
합창실에서 친구들이 모여 잡담을 나누는 사이 류보비는 그 안에 끼지 않고 폰만 만지작거렸다.
마음 같아선 당장 전화라도 걸고 싶었다.
아니면 메시지라도. 정말 괜찮은 거냐고, 오늘부터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학교 나올 수 있는 거냐고.
하지만 수업 시간에 메시지를 보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일뿐더러, 가능하다 하더라도 못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쉽게 말을 걸거나 할 수 있었다면 진즉에 타티아나를 만나러 갔을 것이다.
물론 타티아나가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녀가 처한 상황이 어려웠다.
에르네스트가 입원을 할 정도로 큰 부상을 입고 나서, 타티아나는 딱 하루 간신히 학교에 나왔다가 결국 견디지 못했는지 결석하고 말았다.
그때만 해도 류보비는 당장 찾아가서 위로해 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겨우 며칠 만에 솔로 프로그램을 완성해선 연주회를 성공시키고는 그야말로 주말 내내 최고 화제로 오르내렸다.
그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무대에 오른 연주자 타티아나는 강인하고 완벽한 사람처럼 보이니까.
연주회를 잘 해낸 연주자에게 무슨 문제가 있겠냐면서 다른 사람들은 이미 만족해하고 걱정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평소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류보비로선 마냥 기뻐할 수도 없었다.
‘괜찮은 걸까…….’
타티아나는 결코 심약하거나 정신력이 약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건 연주자로서 스스로를 통제하는 힘이 강할 뿐이다.
평소에 그녀가 얼마나 다정하고 친구들을 아끼는 사람인지 봤다면, 에르네스트가 사고를 당한 후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역시 예상할 수 있었다.
류보비가 느끼기엔 타티아나가 무대에 오른 건 기적이 아니라 초인적인 무언가에 가까웠다.
당연히 초인에겐 그만큼 견뎌냈어야 했던 부분들이 있을 터였다.
그 부분들이 타티아나를 혹시나 길게 괴롭히거나 변하게 하진 않을지, 류보비는 그것이 두려웠다.
수업이 끝나고 식사를 하러 내려가서도 류보비는 주변을 둘러보며 타티아나가 혹시 있나 찾아보거나, 폰을 만지작거리며 산만하게 있었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즈음, 그녀는 찾고 있던 타티아나가 아닌 다른 한 친구를 발견했다.
“뭐 해? 류보비.”
아나톨리가 말을 걸어왔다. 류보비는 그의 얼굴을 보는 것도 꽤 반가웠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잠시 고민하다가 천천히 이야기했다.
“타티아나 언니랑 아나스타샤 언니 학교에 왔다는 이야기, 들었지?”
“응.”
아나톨리는 담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도 별생각 없어 보이는 아나톨리가 조금 밉다.
류보비는 혼자만 머리 아파 하는 것 같아 억울해하며 그에게 말했다.
“어떻게 하지?”
“……무슨 소리야?”
“가서 만나고 싶은데, 만나서 뭐라고 해야 해?”
타티아나가 연주회를 준비하는 기간 내내 응원하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도 혹시 잘못된 일일까 봐 아무것도 못 했다.
그리고 연주회도 못 가고 텔레비전으로 보면서는 그 실력에 멍하니 빠져들 뿐이었다.
너무 압도적인 실력이라서 류보비는 이렇다 저렇다 평할 말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그저 멀게만 느껴지는 거리감.
그런 걸 혼자만 느끼면 상관없었지만, 타티아나가 혹여나 그마저도 슬퍼할까 싶어 류보비는 하나부터 끝까지 다 걱정이었다.
하지만 아나톨리는 그 두서없는 걱정에도 간단하게 답했다.
“꼭 뭐라고 해야 하는 거야?”
“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해? 그것 때문에 난 전화도 메시지도 아무것도 못 하고 있는데.”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 아마 누나가 먼저 이야기할 테니까 말야.”
류보비가 벌컥 화를 내자 그제야 아나톨리는 자신도 너무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다시 말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여전히 알아듣지 못할 내용이었다.
눈을 부라리며 노려보자 아나톨리는 뭘 그렇게 힘이 잔뜩 들어가 있냐는 듯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우리는 잘 들어 주면 되겠지.”
“경청?”
“그래, 너도 배웠었지?”
“응. 그…… 잘 들어주는 것도 어려운 일이라고.”
“잘 아네.”
그러면서 아나톨리는 딱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보며 류보비는 깨달았다.
아나톨리도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겨우 최선일 뿐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것을.
타티아나가 결코 사람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한다는 것도, 그러면서도 속으론 정말 여리고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도. 전부 알고 있다.
하지만 어린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별로 없었다.
그중에 가장 간단하고 가장 강력한 방법 중 하나가 바로 타티아나의 옆에 있어 주는 것이었다.
거리감을 느낀다고 해서 멀찍이 피하지만 않는다면, 분명 타티아나는 기뻐해 주리라.
아나톨리의 말을 이해하고 나서야 류보비는 그가 옳다는 걸 깨달았다.
고개를 막 끄덕이려던 류보비는 갑자기 아나톨리도 침착한데 자기만 바보같이 굴었던 것 같아서 확 짜증이 났다.
“잘난 척하지 마. 아나톨리. 내가 너보다 성적 좋거든?”
“내가 언제 그랬다고…….”
“……흥.”
아나톨리를 억울하게 만들고 나서야 만족한 류보비는 그제야 웃을 수 있었다.
마음 정리는 어느 정도 된 것 같다. 당장은 힘들더라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류보비가 다시 양손으로 폰을 잡고 무어라 메시지를 보낼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아나톨리가 그녀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럼 가자.”
“응?”
“안 갈 거야?”
“어디로?”
또 짜증을 내기 직전인 류보비가 고개를 까딱이며 묻자 아나톨리는 손가락으로 천장 위쪽 어딘가를 가리켰다.
“스터디룸.”
“어?”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애초에 아나톨리와 처음 만났던 것도 타티아나를 중심으로 한 스터디그룹에서였다.
타티아나가 만약 이 두 사람을 생각한다면 거기로 와 줄지도 모른다.
아마 이제 막 연주회가 끝났으니 바로 레슨이 있진 않겠지? 피아노과의 교육이 어떻게 돌아가는진 모르겠지만 류보비는 혼자서 타티아나가 그곳에 있을 확률을 계산해 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고민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아나톨리는 휙 돌아서더니 먼저 계단 쪽으로 향했다.
류보비는 생각하던 걸 얼른 치워 버리곤 허둥지둥 그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스터디룸 앞에 도착했을 때, 그녀가 계산하던 확률은 의미가 없게 되었다.
“류보비, 아나톨리.”
“언니!”
분명히 현실에 존재하는 타티아나가 의자에 앉아 무언가 보다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거짓말이나 환상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를 보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계속 고민하던 것 역시 아무 의미 없었다. 류보비는 바로 달려가선 타티아나에게 안겼다.
그런데 앉아 있는 타티아나에게 안기려다 보니 허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고, 어깨로 들이받는 것이나 다름없는 모습이 되었다.
타티아나의 의자가 옆으로 휘청거릴 정도였다.
깜짝 놀라 떨어지니 타티아나는 목 근처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류보비는 기겁하며 물었다.
“그, 괘, 괜찮아요!?”
그렇지 않아도 타티아나는 한창 예민할 때였다. 잘 알면서도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하다니, 화를 내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별일 아니라면 괜찮다는 듯 웃었다.
“아하하, 괜찮아요. 괜찮아. 키가 언제 이렇게 컸죠?”
키가 큰 건 류보비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실 조금만 더 크면 이제 타티아나와 별반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늘 한참 크고 멀어 보이던 타티아나가 눈앞에선 이렇게 가깝다.
류보비는 그 사실을 새삼 느끼면서 허둥거리며 재차 사과했다.
키만 크면 뭐 해? 난 제대로 하는 게 없는데. 미안하고 창피할 뿐이었다.
타티아나는 괜찮다며 다시 류보비를 끌어당겨 안았다.
부드럽게 다독이는 따뜻한 온기가 그녀를 안정시켜 주었다.
한참 동안 느끼지 못했던 그 다정함에 잠깐 빠져 있던 류보비는 몇 초나 흐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었다.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든 류보비는 일단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연주회 너무 좋았어요. 그, 전 피아노과가 아니지만 그래도 그…….”
곡명을 대고 무엇을 느꼈는지 이야기하는 건 여섯 살짜리도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류보비는 타티아나가 연주한 음악들이 무슨 곡인지조차 몰랐다.
급하게 만들어진 그녀의 프로그램은 연주회에서 소개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계속 실수하고 당황하는 일밖에 벌어지지 않았고, 그 점이 점점 더 류보비를 안절부절못하게 만들었다.
그런 그녀의 양손을 타티아나가 침착하게 붙잡았다. 그리고 조곤조곤하게 이야기한다.
“제가 너무 불친절했네요. 학교 일도 그렇고 연주회도, 다른 것들도…….”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후후.”
타티아나만큼 친절한 사람도 드물 텐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류보비가 열심히 반론을 생각하고 있는데, 타티아나는 그럴 필요 없다는 듯 양손을 살짝 흔들었다.
정신을 차리며 다시 바라보자 그녀가 말했다.
그 눈빛은 당장 이렇게 마주 보고 있는 순간에 집중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요. 학기 시작하고 초에 잠깐 보고는 계속 바빠서…… 그렇죠?”
류보비가 고개를 끄덕이자 타티아나는 미안해하며 웃었다.
“앞으론 자주 얼굴 비출게요. 이야기도 많이 하고요. 류보비. 약속해요.”
그 약속이란 말은 다른 친구들과 흔히 하는 약속과 무게감이 전혀 달랐다.
타티아나는 정말로 이곳에서 류보비와 있는 시간을 소중하게 여길 사람이었다.
사실 이미 피아니스트로서 최고의 대우와 주목을 받고 있는 타티아나라면 훨씬 더 대단하고 재미있는 사람들과 노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잘은 몰라도 이 작은 스터디룸이 아니라 넓은 세상 어딘가에서 타티아나를 원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을 것이란 걸 류보비는 직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필요로 하지 않고 타티아나는 단지 이 순간만을 원했다.
그 사실에 류보비는 순수한 기쁨을 느끼며 다시 한번, 이번엔 훨씬 조심스럽게 그녀와 포옹했다. 타티아나는 기쁘게 웃었다.
***
최근 며칠은 평온하고 긍정적으로 흘러갔다.
언론 등에 흥미본위로 떠돌던 기사들은 정말 온건해졌다.
특히 에르네스트에 대한 불안을 증폭시키는 억측 기사들은 온데간데없이 전부 사라졌다. 신기할 정도였다.
저번에 본 이즈베스티야의 라시드가 그 부분은 어떻게든 해 주겠다며 약속했던 것이 떠오른다.
설마 정말 그가 손을 써 준 걸까.
하지만 그가 어떻게 한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로 확실하게 조용해질 줄은 몰랐다.
에르네스트의 쾌유를 비는 유명 인사들의 위로와 안부 등이 줄을 이었다.
그가 세상에서 얼마나 사랑받는지 한 번 더 확인하면서, 나 역시 거기에 기대를 한 줌 보탰다.
내가 한 일은 거기까지였다.
“오늘도 두 건 거절했습니다.”
“고마워요.”
늦은 오후, 연습실에서 차를 마시며 난 오늘 있었던 일들을 빅토르에게 보고받았다.
그가 지금 말하는 두 건은 바로 언론에서의 인터뷰 일이었다.
연주회가 끝난 후 정말 많은 언론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다. 심지어 방송국에서 특별 방송에 출연하지 않겠느냐는 제안도 있었다.
하지만 난 전부 거절했다.
난 이 연주회의 의미를 이미 충분히 전달했고, 거기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길게 이야기할 생각이 별로 없었다.
사람의 말은 부정확하기도 하고, 마치 내가 이 상황을 이용하는 것 같은 모습은 절대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내 개인번호는 세간에 노출되지 않았기에 인터뷰 요청들은 전부 빅토르에게 들어갔고, 그가 알아서 해결해 주어서 난 신경 쓸 일이 없었다.
이럴 때 깔끔하게 해결해 주는 걸 보면 그는 내 경호원이자 친구이며 매니저이기도 했다. 월급을 더 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 그리고…… 오늘 수술날인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가 보시겠습니까?”
“…….”
즐거운 생각을 하고 있는 것도 잠시였다. 빅토르가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오늘 드디어 에르네스트의 상태가 수술을 해도 될 정도로 안정되어서 곧바로 수술하게 되었다.
마음 같아선 그 옆에 가서 기도해 주고 싶다.
물론 이 일이 벌어진 걸 보면 내 기도는 아무 효과도 없고 저주나 아니면 다행이겠다 싶지만, 그래도 만약 에르네스트가 날 찾는다면 난 바로 그곳에 있고 싶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수술 전이 아니라 후에 보자고 했었지.
그건 그 나름의 마음의 강함이리라.
내가 있으면 혹시나 불안해할까 봐, 아예 보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멍하니 앉아 있기만 할 수는 없었다.
난 세연에게 일전에 배웠었다.
이럴 때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바로 스마트폰을 들고 전화부터 걸었다. 빅토르는 말없이 자리를 피해 주었다.
병원 안이니 늘 통화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단지 받든 못 받든 전파로 된 내 기도가 그쪽으로 향하기를 바라며 수화음을 듣고 있었다.
이윽고 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 타티아나.
아마 시간이 조금 더 남긴 했지만, 지금도 수술 준비 중일지도 모른다. 난 작게 물었다.
“지금 전화 괜찮나요?”
- 괜찮겠지 뭐.
대수롭잖다는 듯 툭 말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난 어쩐지 웃음이 나와 버릴 것 같아서, 간신히 참아냈다.
그가 이렇게 강하게 이겨 내려 한다면 정말 어떤 일이든 괜찮을 것 같다는 기분 좋은 확신이 마음 가득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