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855화 (855/1,277)

##  855화

가볍게 내 머리를 흔들어 놓은 구세프 선생님은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떠나셨다.

난 문이 저절로 닫힐 때까지 멍하니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타티아나.”

뒤편에서 날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미하일 선생님이 안경을 내려놓으며 말씀하셨다.

“구세프는 진심으로 네가 해낸 일들을 자랑스럽게, 그리고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단다.”

의심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이었다.

내가 조용히 바라보자 미하일 선생님이 힘없이 웃으며 이어 말했다.

“그러니 어렵게 대하지 말려무나.”

“…….”

구세프 선생님도 내가 불편해한다는 걸 알기에 자리를 피해 주신 것이다.

여전히 에르네스트가 병실에 있는 이 상황에서, 난 할 수 있는 것들을 가까스로 하나씩 하고 있을 뿐이지 구세프 선생님이나 에르네스트의 부모님 등 중요한 분들은 사실 제대로 뵙는 것조차 어렵게 느끼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그분들이 속마음이 어떻든 날 어떻게 대해 주실지 알 것 같아서 더더욱.

어깨를 움츠리고 있자 미하일 선생님이 테이블을 툭툭 쳐서 날 불렀다. 따뜻한 차 한 잔이 내 앞에 놓였다.

마시지도 않고 향만 맡았을 뿐인데도 잔뜩 움츠러들었던 어깨와 마음이 조금 풀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살짝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쓸어내려 정리했다.

차로 목을 축이며 잠시 기다려 주신 미하일 선생님은 그다음으로 내가 고민 중인 주제를 꺼내 놓으셨다.

“공로 예술가라……. 괜찮은 직위지. 자잘한 우대정책들은 빼놓고 실질적인 것만 보자면 여러 선출직에도 유리하고 대관료 할인 등의 혜택도 있으니까.”

미하일 선생님도 꽤 오래전부터 공로 예술가였고, 구세프 선생님은 심지어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인민 예술가 칭호를 받은 분이셨다.

자주 뵙는 분들이다 보니 어쩐지 그리 어렵지 않게 느껴지지만, 공로 예술가를 흔하게 볼 수 있는 건 러시아 최고의 음악학교인 중앙음악학교에서나 가능한 환경이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범상치 않은 사람들뿐이기 때문에 화려한 이력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현실적으론 공로 예술가를 모두 추려 봐도 그리 많지 않다. 수천 명 중 한 명이 간신히 받을 수 있다.

러시아에서 음악가로 살며 훈장을 받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있는데, 미하일 선생님은 예전 일을 생각하시는지 웃으며 말씀하셨다.

“내가 그걸 받은 건 서른 살도 넘어서였단다.”

“…….”

“그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대단하구나. 타티아나.”

진심 어린 칭찬이 이어진다. 그 목소리에서 난 선생님이 다시 한번 날 인정해 주셨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비록 한참이나 어리고 여전히 제자이지만 그럼에도 한 사람의 음악가로서 나아가는 걸 선생님은 응원하고 계신다.

그런데 지금 난 머뭇거리며 발을 앞으로 내밀지 못하고 있었다.

그 부분을 미하일 선생님은 꿰뚫어 보셨다.

“하지만 네가 지금 고민하는 건 나이 같은 문제가 아니겠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나보다 어렸을 때 훈장을 받은 친구도 난 알고 있다.

나이 같은 건 전혀 고려 대상도 아닐뿐더러 받는 건 어릴 때일수록 더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계산에 앞서 훨씬 더 근본적인 무언가가 내 심장을 움켜쥐고 있었다.

연주회를 하고 나선 조금 나아졌고,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 뒤엔 더더욱 편해졌다.

이전처럼 손을 떨 정도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에르네스트를 볼 때마다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힘든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난 완전히 자유롭게 내 스스로를 풀어둘 수 없었다. 연주회 이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그 때문이었다.

“제가 지금 느끼는 기분을 솔직히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래, 말해 보려무나.”

“에르네스트를…… 넘어뜨리고 간다는 기분이 자꾸만 들어요…….”

처음으로 이야기한, 정말 진심 어린 말이었다. 난 이 말을 에르네스트는 물론이고 그 누구에게도 한 적이 없었다.

미하일 선생님이 진지하게 날 바라본다. 난 말을 더듬거나 반복하지 않도록 집중하며 말했다.

“전 혼자서 많은 이목을 끌어 버렸죠. 그렇게 되리란 건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어요. 때문에 연주회만으로 그 이목을 최대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한 이용하고, 충분한 설득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그 이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했는데…….”

“네 생각보다 반응이 너무 뜨거웠구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인터뷰와 방송 등을 거절하는 정도였다면 앞으로 일주일 정도면 거의 사그라들었을 터였다.

하지만 훈장 수여는 정말 예상도 못 한 것이었다.

난 천천히 이어 말했다.

“만약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그 애와 마주쳤다면 전 망설이지 않고 그 애를 눌러 버리려 했을 거예요. 거리낌 없이. 그 후에도 결과가 어떻든 후회 없이 마주할 수 있었을 테고요.”

그 애 역시 전혀 주저하지 않고 날 꺾어 버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우린 그런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서로의 명예와 자존심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무대가 아닌 곳에서 모든 것이 벌어진다.

“하지만 콘서트홀이 아닌 학교 계단에서, 그리고 그 애가 가지고 있던 공로 예술가까지…….”

“타티아나, 잠깐만.”

중얼거리는 내 말을 끊으며 미하일 선생님이 물어보셨다.

“에르네스트가 그렇게 말하든?”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르네스트는 당연히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나만큼이나 그 애 역시 입장이 완고하니까.

“아뇨, 모두 자신의 운이 나빴을 뿐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할 뿐이죠.”

“그러면 네 생각은 에르네스트를 무시하는 것 같은데.”

그럴지도 모르겠다.

정말 괜찮다고 몇 번이나 이야기하는 그를 두고 나는 계속 속앓이를 하며 신경 쓰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난 정말 여러 가지와 마주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단지 겁에 질려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에르네스트가 어떤 생각으로 날 바라보는지,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어떤지, 내 마음 속에 자리잡은 죄책감은 어느 정도인지 그 모든 것들을 고려해서 움직이고 있다.

“저도 바보는 아니에요, 선생님. 단지…….”

난 목소리를 낮추며 생각하다가, 전날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신중하고 싶을 뿐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내가 얽매인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난 언제나 신중하고 싶을 뿐이다.

매번 괜찮다고 하면서도 에르네스트가 혹시나 상처받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내색하지 않는다고 해서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다. 심지어 무의식중에도 아플 수 있다는 걸 나는 잘 안다.

그런 것들을 고려하다 보면 쉽사리 움직이기 어렵다.

미하일 선생님은 유심히 날 바라보셨다. 난 이 정도 말로는 부족했나 싶어서 한 가지 더 덧붙였다.

“아, 그리고 그 이유뿐만이 아니에요. 전 이번에 제가 맡았던 2부의 의도가 제 침묵으로 완성되리라 생각해요. 때문에 연주회와 관련된 일들은 하지 않으려는 거예요.”

“그래, 네 침묵이 훨씬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오고 있다는 건 나도 안다.”

“아마 몇 개월 정도…… 에르네스트가 잘 회복해서 재활 소식이 들려 올 즈음에 제가 활동하기 시작한다면 알맞으리라 생각해요.”

그동안 깊게 생각하면서 세워 놓은 몇 가지 계획들이 있었다.

협연 연습과 콩쿠르를 기준으로 두고 있던 건 크게 바뀌지 않았지만, 그사이 내 활동 범위에 대해선 에르네스트를 기준으로 할 생각이었다.

시간이 꽤 있으니 그가 재활에 들어가 준다면 나도 조금은 콩쿠르 준비에 열중할 수 있을 터다.

난 여러 가지를 병행할 생각도 염두에 두면서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내 계획을 들은 미하일 선생님은 웃음을 길게 흘렸다.

“하하…… 대체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는 건지.”

내가 연주회가 끝나고 몇 개월 후까지를 생각하면서 모든 완성도를 고려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놀랐는지 미하일 선생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떻게 봐도 일반적인 방식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미하일 선생님은 다시 찻잔을 들어 한 번에 다 마셔 버리곤 미소를 지었다.

적어도 내 방식이 선생님이 느끼기에 나쁘지 않았다는 걸, 나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선생님이 천천히 말씀하셨다.

“타티아나. 난 네가 연주회의 의도를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것을 칭찬해 주고 싶구나. 그 방식엔 찬성하마. 넌 신중하고 현실적인 사람이니 대체로 일을 그르치지 않지. 아마 네가 하고자 하는 대로 한다면 큰 문제 없으리라 생각한단다.”

모든 인터뷰를 거절하고, 공로 예술가까지 거절하려는 것이 아무 이유도 없는 바보 같은 짓이 아니라는 걸 미하일 선생님은 확실하게 이해해 주셨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내 판단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 역시, 다시 한번 짚어 주신다.

“하지만 네 활동 전부가 오해가 되리라 생각하며 겁먹고 있을 필요는 없단다.”

그 말만으로는 어떤 뜻인지 알 수 없어서 난 설명을 부탁드리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미하일 선생님은 다시 안경을 쓰시더니 손가락을 들고 허공의 한 지점을 짚으며 말씀하셨다.

마치 지금 이 공간을 떠도는 소리의 진동을 찾아내는 것처럼.

“네가 사람의 언어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단다. 생각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오해를 만든다고 생각하니 넌 필요할 때만 입을 열고 대체로 침묵하는 편이지. 지금처럼.”

“그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게 아니니 걱정 말거라. 아까 말했듯 네 방식엔 찬성이다. 말은 적게 하는 게 좋아. 특히 우리 같은 예술가들은.”

설득은 음악으로 충분하다. 말은 곧 완성도를 해치고 흐트러지게 만든다.

내가 반드시 필요한 인터뷰 외에 대외활동을 하지 않는 건 그러한 지론이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미하일 선생님은 그 점을 흡족하게 여기면서도, 내가 너무 치우치지 않길 바라시는 듯 보였다.

“하지만 말이다, 때론 말도 음악만큼이나 강력한 신뢰를 지닌단다.”

선생님은 바로 내가 납득할 만한 예시를 덧붙였다.

“네가 연주회 마지막에 했었던 약속이나, 지금 우리들이 나누는 이런 대화들처럼 말이지.”

그 말은 도저히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진솔하게 들려서 내 마음에 파고들었다.

음악에서 그치고 싶어 하는 날 설득하는 선생님의 목소리는 내 행복을 바라는 것 외엔 그 어떠한 의도도 없었다.

멍하니 바라보니 선생님은 옅게 웃으며 들어 올렸던 손가락을 다시 책상 위로 내렸다.

“인터뷰어가 있는 인터뷰는 네가 온전히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거절하는 게 좋다고 치자. 하지만 훈장 수여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구나.”

“……무엇이 다른가요?”

“단상에 서서 연설을 하게 될 테니 말이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난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면서도 막상 수여식에 대해선 상상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공로 예술가 훈장 수여식을 본 적은 없다.

하지만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영화제에서 몇몇 배우들이 단상에 올라 상을 타 가고 수상 소감 등을 말하는 장면은 알고 있다.

“연설이요……? 연설이 있나요?”

“당연하지.”

난 지금까지 그냥 정부에서 지정한 어떤 장소에 드레스를 입고 가선 수많은 카메라 앞에 서는 광경만 막연하게 떠올리고 있었는데, 만약 텔레비전에서 본 것과 크게 다르지 않게 비슷하게 흘러간다면 내 생각보다 꽤 많은 것들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이전과는 다른 부분에서 고민이 많아졌다.

내 표정이 바뀐 걸 본 미하일 선생님은 가볍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그 연설만 명확하다면 아무 문제 없겠지. 되레 네가 구상한 연주회를 더 확실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될지도 모르고.”

“…….”

항상 이랬다.

미하일 선생님은 이 세계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경험자로서, 내가 놓치고 지나가는 것들을 다시 한 번쯤 돌아볼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그렇게 찾아낸 것들은 내 행동에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가끔은 조금씩, 그리고 때때론 아주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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