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6화
생각해 볼 만한 부분들이 있음을 깨달은 뒤 행동하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난 받았던 번호로 전화를 걸어선 아직 결정을 내릴 수는 없으니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싶다며 미팅을 요청했다.
문화부 쪽 사람은 꽤 당황해했지만 내 요청도 합당하다고 생각했는지 바로 받아들여 줬다.
서로의 스케줄 문제를 고려해 여유 있게 날을 잡고, 며칠이 지나 약속했던 시간이 다가왔다.
“…….”
난 차량 뒷좌석에서 손거울을 보며 스스로의 모습을 체크했다.
중요한 자리이니만큼 조금 더 어른스럽게 보이게 해 주겠다며 나제즈다가 도와줬었는데…… 사실 이렇게 봐선 뭐가 그리 큰 차이가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어차피 이전에 교복 차림으로 문화부 장관 앞에서 리허설도 해 본 적이 있었다.
이번에 가는 미팅에서 어떤 공직자가 나온다 하더라도 문화부 장관만큼 높은 사람이 있진 않을 테니, 그렇게까지 큰 긴장이 되진 않았다.
행정 업무를 보는 직원 정도만 한 명 와서 이야기를 하게 되지 않을까? 난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며 앞머리 끝을 매만지고 있었다.
“혼자서 괜찮으시겠습니까? 아가씨.”
그런데 나보다 빅토르가 더 긴장되는 모양이다.
지금까지 내가 어른들을 상대하는 걸 몇 번이나 봐 왔지만, 그래도 그는 매번 걱정이 많다.
난 방긋 웃으며 말했다.
“위험한 사람을 만나러 가는 건 아니잖아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무서운 오빠처럼 같이 가 주실래요?”
“그거야말로 전혀 도움이 안 될 것 같군요.”
빅토르가 허허 웃었다.
만약 나 혼자서 만나면 안 될 사람을 만나러 가는 거라면 그가 큰 도움이 되겠지만, 문화부에서 나올 사람을 압박한다 해서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어차피 나 혼자서 결정지어야 할 일이다. 때문에 난 아버지도 오빠도 없이 홀로 그 자리로 향하기로 했다.
“무슨 말인지는 말아요. 그래도 걱정하진 마세요. 제가 확인해야 할 것들만 확인할 생각이니.”
“확인이라…….”
내 말을 듣고는 무언가 예전 일을 떠올리듯 중얼거리던 그는 차가 막 신호에 걸려 멈춰 섰을 때, 내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의 얼굴엔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거 아십니까? 예전에 유리 님도 종종 비슷한 말씀을 하셨던 것.”
“그런가요?”
“꼭 그렇게 말씀하시고 난 다음엔 원하는 것을 이루곤 하셨죠.”
아버지와 난 본래 닮을 이유가 없지만, 서서히 닮아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건 듣기에 꽤 기쁜 말이었다.
빅토르는 짧고 선명하게 이야기하며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바라시는 대로 되길 바랍니다.”
내게 바라는 대로 하라는 말을 해 주는 사람들은 정말 많다.
그리고 난 내게 그렇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폭넓게 주어져 있다는 것도 자각하고 있다.
그렇기에 더더욱 침착하게 바라본다.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더 많은 기준과 정체성들의 총체인 나는 더더욱 가까이에서 스스로를 판단하며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찾아 추구할 필요가 있었다.
들고 있는 손거울은 내 얼굴과 머리칼만 비추지 않고 그 너머의 무언가를 드러내는 듯했다.
모스크바 중심부에서 밑으로 조금 내려오면 고급 주택들이 들어서 있는 카모프니키 지구가 있다.
대표적인 부촌 중 하나이지만 평소엔 잘 올 일이 없는 곳인데, 이렇게 오게 되니 색다른 기분이다.
미팅 약속을 잡은 레스토랑은 이곳의 중심가에 있었다. 빅토르는 그 앞까지 날 데려다주었다.
근처에 있겠다고 하는 빅토르에게 인사하고 차에서 내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멋진 파인다이닝이었다.
처음 약속을 잡았을 때부터 난 조금 다른 의미에서 부담감을 느꼈다.
이런 곳에서 식사를 하려면 꽤 비쌀 텐데, 할 이야기가 그리 대단하진 않기 때문이었다.
난 그저 공로 예술가 명예칭호와 훈장 수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결정을 내리기만 할 생각이었다.
예상컨대 길어 봐야 15분 남짓이면 끝날 이야기다. 그런데 문화부 쪽에선 점심시간에 식사 약속을 잡아 버렸다.
꽤 신경을 써 주는 것 같은데 거기에 대고 불편하니까 그냥 지하철 앞 벤치에서 만나자고 할 수도 없어서 받아들였지만, 이제 보니 괜히 식사를 하기로 했나 싶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난 그 안으로 들어섰다.
‘이곳에서도 제일 비싼 곳 아닐까……?’
파인다이닝답게 화려하고 세련된 인테리어가 예술작품처럼 눈을 즐겁게 한다.
난 지금까지 많은 곳들을 가 봤지만 이곳은 그중에서도 상당히 고급스러운 축에 속했다.
일단 예약이 되어 있을 테니 알아보기 위해 웨이터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웨이터는 날 보자마자 인사해 왔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문화부에서 오신 분들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위층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어……? 절 어떻게?”
“아,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는 다시 정중하게 사과하더니 웃으며 말했다.
“제가 개인적으로 팬이어서 바로 알아봤습니다.”
마치 날 알아보는 게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게 아직도 어색하다.
팬이라면 사인이라도 해 드려야 하나? 온갖 생각이 다 들었지만, 웨이터는 자신의 일에 충실하게 날 위층으로 안내만 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저희 레스토랑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절도 있는 자세로 말을 맺은 그는 이어서 닫혀 있는 문을 노크하며 말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들어오시죠.”
조용히 몇몇 사람들만 모여서 식사를 하며 사업적인 이야기 등을 하기에 좋은 프라이빗룸이었다.
뒤에서 문을 열어 주었고, 난 안으로 들어섰다.
네 명의 남녀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포멀한 정장 차림에 말끔한 모습이었다.
딱 보더라도 정부 부처의 공직자라는 느낌이 물씬 풍긴다.
왜 이렇게 사람이 많지?
한두 명 정도를 예상했던 난 예상 못한 광경에 조금 당황해 버리고 말았다.
나 혼자 저 사람들이랑 밥을 먹어야 한다고?
아찔한 기분이었지만 간신히 내색하지 않고 침착하게 허리를 곧게 펴면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내 인사에 가장 안쪽에 있던 남자가 일어서더니 성큼성큼 다가와선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문화부 음악예술국의 부국장 블라디미르 파블로비치 자카로프라 합니다.”
어쩐지 한눈에 봐도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는데, 음악예술국의 부국장씩이나 되시는 분이었다.
음악예술국은 문화부의 하위조직이지만 러시아 예술계 전반을 관리하는 어마어마하게 큰 조직이었다.
그곳의 부국장이라면 굉장히 높은 직위의 관료였다.
난 점점 뭔가 예상과 달라지고 있다는 걸 느끼면서도 그 손을 잡고 악수했다.
몸에 박힌 예절이 자동으로 나와 줘서 다행이었다.
블라디미르는 가볍게 내 손을 두어 번 흔들더니 기분 좋게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내가 해야 할 말 아닌가?
난 빠르게 해야 할 인사말을 정리해서 되돌려주었다.
“저야말로요. 처음 뵙는다곤 했지만, 텔레비전에서 뵌 적이 있네요.”
“하하, 저도 같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봤었죠.”
이번에 한 연주회는 전 러시아에 방송되었을 테니 그걸 봤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지만…… 이렇게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그러고 나서 블라디미르는 옆에 서 있던 세 명도 소개해 주었다.
“아 이쪽은 부국장보와 사무장, 그리고 보좌관입니다. 인사하시죠.”
“팬입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악수를 나누며 난 빠르게 인사하는 사람들의 이름과 직책을 외우기 위해 집중했다.
부국장보는 마르티노바, 사무장은 코즐로바. 보좌관은 카르타셴코라는 이름이었다.
갑자기 네 명이나 되는 사람들과 인사하려니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혼자서 할 수 있어야 했다.
그렇게 이어 인사를 나누며 나름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첫인사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리에 앉고 나니 급격하게 어색해졌다.
“…….”
그런데 네 명과 마주 보고 있는 내가 어색해하는 것보다 저쪽이 훨씬 더 어색해했다.
문 쪽을 자꾸 바라보기도 하고, 뭔가 틀어진 것처럼 서로 눈빛을 교환하는 모습이 적잖이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러던 중 카르타셴코가 굉장히 조심스럽게 내게 물어보았다.
“저…… 혹시 유리 알렉세예비치께선?”
“회사에 계시겠죠?”
“…….”
난 별생각 없이 그렇게 사실을 전했고, 네 사람 사이의 혼란은 조금 더 커졌다.
그제야 이 사람들이 왜 이렇게 당황해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열여섯 살로 어린 나이인데다가 훈장 수훈에 대해서도 즉답하지 않고 고민하며 미팅까지 제안하자 그것에 베르체노프와 직결된 이유가 있으리라 예상한 것 같았다.
때문에 당연히 아버지나 아니면 오빠를 대동하여 자세한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줄 알고 부국장님과 네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온 것이었다.
베르체노프의 총수인 아버지에게 맞추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판단한 듯하다.
하지만 막상 자리에 나온 건 나 혼자였고, 결국 어른 네 명이서 날 바라보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이상한 광경이었다.
“음…… 혼자 오신 거군요.”
음악예술국에서 굳이 네 명이나 나와 이런 파인다이닝을 예약한 의도를 생각하니 조금 재미있기도 했지만, 사실 나 역시 난처한 기분이 많이 든다.
‘진짜 빅토르를 데리고 올걸 그랬나…….’
그가 있었다면 조금 나았을까 싶다.
하지만 이제 와서 누군가를 부를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지금 서로 오해가 있었다고 자리를 파하고 나중에 다시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늘 내가 물어볼 이야기들은 분명하게 정해져 있었으니, 그대로 하면 될 뿐이다.
난 생각을 간단하게 정리하며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그래, 우선 식사부터 주문할까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내 눈빛을 본 블라디미르 부국장님은 이 어색한 분위기를 굳이 길게 가져갈 필요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먼저 말했다.
잠시 후 웨이터를 호출했고 우리는 적당한 식사를 주문했다. 너무 과하거나 화려한 음식들은 대화에 방해가 된다.
주문을 하고, 식전에 마시는 음료인 아페리티프가 나왔다.
본래 주류가 기본이지만 점심 식사인데다가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주스가 적당했다.
찬 음료로 목을 축이고 나니 조금 더 분위기가 풀어졌다.
이번엔 부국장보 마르티노바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요즘 들어 타티아나 유리예브나의 음악을 정말 많이 듣고 있어요.”
“아, 감사합니다.”
“중앙음악학교 10학년…… 혹시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진학할 생각은 없었나요?”
“제안은 받았는데 거절했어요.”
담백하게 이야기하자 마르티노바가 살짝 놀란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어느 정도 나에 대해 파악하고 있긴 한 것 같은데, 아르카디 교수님이 스카우트하려 했던 것까진 모르나 보다.
그녀는 여러 정보들을 짜맞추는지 잠시 생각하다가 넌지시 물었다.
“그래요? 어떤 이유죠? 분명 좋은 제안일 텐데.”
“좋은 제안에도 고민할 부분이 많으니까요. 전 꽤 깊게 고민해서 남기로 했고, 지금은 후회하지 않아요.”
내가 내 이득만을 좇아 행동해 왔다면 진학도 당연히 했을 테고 여러 콩쿠르 등에도 출전하여 커리어를 잔뜩 모아놓았을 것이다.
그건 지금 내게 보다 유리한 조건이 되어 주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런 건 내가 음악가로서 있을 수 있는 이유 중 아주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
겨우 그런 사람이 세상에 필요한 것이라면 내가 아니어도 괜찮을 테니까.
때문에 난 그보다 조금 더 신중하게, 그리고 내 여러 기준들이 향하는 방향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번에도 비슷해요. 좋은 제안이라는 걸 몰라서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게 아니에요.”
어느새 앞의 네 사람은 내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약간의 오해로 인해 이 미팅 자리엔 뜻하지 않은 불균형이 생겨 있었지만, 그런 건 이제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다.
난 다시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곤 분명하게 물어보았다.
“왜 저에게 공로 예술가라는 칭호와 훈장을 주려고 하시는 건가요?”
따져 묻거나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가 아니다.
명목적 이유 같은 건 이해하고 있고 무엇을 얻게 될지도 알지만, 보다 자세한 내막을 분명히 하고 싶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하하, 하하하하.”
갑작스레 블라디미르가 웃음을 터뜨렸다. 옆의 세 사람도 당황할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하지만 난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고, 곧 조금 더 진지하게 가라앉은 눈빛이 내 쪽으로 향했다.
거기엔 더 이상 어린애처럼 보는 분위기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