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867화 (867/1,277)

##  867화

이어진 대화는 과거에서 오늘을 거쳐 미래의 계획으로 향했다.

타티아나는 시상식에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참가를 선언했던 것을 밝히며 이제 그 준비로 심사용 DVD 제작에 들어갈 것이라 말했고, 에르네스트는 현재 작곡중인 곡이 또 있다는 것과 순항 중인 치료계획 등을 이야기했다.

“다음 주엔 학교에 다시 잠깐 얼굴 비추려고. 이 깁스 풀고 조금 괜찮아진 모습을 보여야 할 테니까.”

“그래도 되나요?”

“응. 슬슬 풀어도 될 거래.”

대화 내내 팔의 상태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지만, 타티아나의 시선이 가끔 깁스 쪽을 살핀다는 건 눈치채고 있었다.

지금까지 다른 이야기들도 많이 나누었으니 괜찮으리라 생각하며 에르네스트는 적당히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이야기했다.

단지 그뿐이었지만 타티아나의 표정은 알기 쉽게 풀어졌다.

다친 상황을 걱정하는 사람들을 대하다 보니 약간 버릇처럼 된 웃음을 머금으며 에르네스트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선 재활도 서서히 병행해야지. 어쩐지 느낌에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 않아.”

“느낌이 좋나요?”

“응. 대충 3일 정도 하면 될 것 같은데.”

“예?”

최소 1년은 잡으라고 했던 재활 계획은 타티아나도 알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터무니없는 숫자가 나오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그것도 에르네스트의 농담이라는 걸 뒤늦게 알아듣고는 미소를 지었다.

타티아나가 지금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에르네스트로선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이 대화로 조금이나마 더 여유 있게 상황을 보고 스스로에게 집중할 수 있길 바랄 뿐이었다.

‘슬슬 아까 말했던 시간이 되어가네.’

단 3분이면 연습곡 한 곡을 펼칠 수 있는 시간이고 30분이면 소나타 한 곡을 선보일 수 있는 시간이다.

짧은 시간이 지닌 강력함을 알며 시간 관리에 능한 음악가들은 주어진 잠깐의 시간을 활용하는 것에도 큰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타티아나와 에르네스트는 고도로 숙련된 음악가들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집중하며 정해진 시간을 공유했고, 때문에 아쉬움을 조금 느끼더라도 쿨하게 대화를 마무리 지을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영원히 이어지는 음악은 없지만, 분명 다음이 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몇 시죠?”

“6시.”

“……돌아갈까요.”

“그럴까.”

슬슬 이 대화가 끝에 다다른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던 건 타티아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접시와 컵을 잠깐 내려다보더니 미련 없이 고개를 들었다.

“계산은…….”

“내가 할게.”

“그…….”

“네가 훈장을 받은 기념으로.”

타티아나가 무어라 더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에르네스트가 딱 잘라 이야기했다.

이렇게 확고하게 이야기하면 타티아나는 굳이 고집을 부리지 않는 편이었다.

오늘은 알겠다는 듯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고, 에르네스트는 먼저 밖으로 나왔다.

카운터에서 두 사람분의 계산을 마치고 거리로 나오자 어둠은 더욱 깊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에 비례에 도시를 밝히는 조명의 숫자는 배로 늘어나서 느껴지는 빛의 양은 더욱 많아져 있었다.

두 사람은 그 거리를 잠시 말없이 거닐었다.

“…….”

그냥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걸으면서 오늘의 만남을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팔에는 깁스에 발에는 슬리퍼를 신고 있으니 어떻게 해도 웃길 뿐이었다.

에르네스트는 혹여나 슬리퍼를 끄는 소리가 들릴까 싶어 신경 써서 걷기까지 해야만 했다.

그러나 혼자 잔뜩 신경 쓰는 에르네스트와 달리 타티아나는 정말로 그의 차림이 어떻든 상관하지 않는 듯 조용히 발걸음을 맞추어 걸었다.

짧게 한 바퀴 돌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자 그사이 검은 벤츠가 도로가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가볍게 웃고는 나란히 그 차에 올라탔다.

타티아나는 병원으로 갈지 아니면 돔 끄니기로 갈기 물어보았고, 에르네스트는 책은 나중에 살 테니 그냥 병원에 데려다 달라고 답했다.

병원까진 정말 몇 분 걸리지 않았다. 실없는 잡담을 잠깐 나누었을 뿐인데 어느새 내려야 할 때였다.

“갈게.”

“잘 가요, 에르네스트.”

차에서 내려선 잠시 서서 인사하자 타티아나가 창문을 열고 바라보았다.

무언가 두고 가는 것은 없는지, 또 더 필요한 것은 없는지 살피는 눈빛이었다.

애초에 가지고 나온 것도 별로 없는 에르네스트는 바지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는 몸을 기울여 차 안으로 시선을 마주했다.

타티아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학교에서 뵈어요.”

깁스를 풀고 학교에 가 보겠단 말에 타티아나의 기분이 상당히 좋아진 건 다행이었다.

에르네스트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만은 지켜야겠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알았어.”

마지막으로 짧은 인사를 주고받고 나자 창문이 소리 없이 올라갔다.

짙은 틴팅 너머론 아무것도 잘 보이지 않았지만, 타티아나의 시선이 여전히 이쪽을 향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잠시 후 그녀를 태운 차는 다시 떠나갔고, 에르네스트는 병원으로 발걸음을 돌리며 모든 시간을 되돌려 보기 시작했다.

‘잘한 건가.’

우연히 서점에서 만나서 차를 마시긴 했지만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그 시간에 거기에 있었던 것 자체에서 이미 자신에게 많은 책임이 넘어와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 이유가 타티아나에게서 비롯된 건지 아니면 아나스타샤가 넘겨준 건진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 이상 붙잡고 있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르네스트는 아직 아나스타샤와 매듭짓지 못한 일들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농담으로 3일이라고 하긴 했지만 그가 해내야 할 치료 계획도 무시무시하게 남아 있었고.

그런 것들을 마주하며 해결하지 않은 상태로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를 붙잡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이 정도면 됐어.’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그런 생각을 속으로 하던 에르네스트는 문득 깨달았다.

오늘 아나스타샤 역시 그와 똑같은 생각으로 타티아나를 보내 주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그 애와의 일은 어떻게 풀어야 하는 걸까.

에르네스트는 위로 솟구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런 고민에 잠겼다가, 이런 부분이야말로 학교에서 직접 만나 단둘이 이야기해야 할 사안임을 깨닫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

타티아나를 먼저 보내고, 발렌티나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온 아나스타샤는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발렌티나! 어쩐 일이니? 놀러 온 거니? 자고 가는 거야? 어쩌지, 오늘 저녁엔 아무것도 준비가…….”

“아뇨! 아젤라이다 아줌마. 그러지 마세요. 오늘은 잠깐 들린 김에 인사드리러 온 거예요.”

“아, 그러니? 정말 기쁘네.”

누가 보면 내가 아니라 저 두 사람이 모녀인 줄 알겠어.

아나스타샤는 멀찌감치에서 삐딱하게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어른들에게 싹싹한 성격인 발렌티나는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편이었다.

특히 아나스타샤의 몇 안 되는 친구이기까지 하니 아젤라이다는 발렌티나를 굉장히 예뻐했다.

잔뜩 호들갑스럽게 반가움을 표시한 두 사람은 자연스레 주방 쪽으로 향했다.

아젤라이다는 주전자에 물을 올리며 발렌티나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그제야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다.

분명 딸이 아니라 또 다른 한 친구를 찾는 눈빛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너희는 타티아나와 늦게까지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그러려고 했었는데…… 음, 저녁은 그 애도 가족끼리 보내게 두려고.”

“왜? 파티라도 해야…….”

그렇게 말하던 아젤라이다는 아차 싶었는지 말을 삼갔다.

에르네스트의 사고에 대해 전말을 모두 아는 건 아니지만, 상당히 깊게 아나스타샤와 타티아나가 얽혀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며칠간 식사도 않고 방에서 나오지 않았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타티아나 역시 서슴잖고 파티 같은 걸 할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쯤은 쉽게 파악할 수 있을 터였다.

그제야 아젤라이다는 두 사람이 왜 예상보다 일찍 돌아왔는지 이해하곤 약간 가라앉은 눈빛으로 주전자를 바라보았다.

약간 어색한 침묵이 세 사람 사이에 맴돈다. 그것을 느끼자마자 발렌티나가 곧장 말을 꺼내서 분위기를 전환했다.

“오늘 오후엔 다 같이 돌아다니면서 재미있었어요. 영화도 봤고요.”

“명함도 만들었지.”

“아, 맞아! 저희 명함 만들었어요! 보여 드릴까요?”

발렌티나는 얼른 자신의 가방에서 명함을 꺼내 건네주었다.

아젤라이다는 조심스레 그 명함을 받아 보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귀엽네. 잘 어울리는구나.”

“그래요? 정말요?”

“정말이고말고. 이거 나 가져도 될까?”

“물론이죠! 드릴게요! 혹시 제가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불러 주세요! 그…… 전화번호는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요.”

“어쩜 이렇게 말을 예쁘게 하니.”

또다시 두 사람은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아젤라이다는 발렌티나의 명함을 식탁 위 그녀의 지갑 안에 넣었다.

그리고 아까도 그랬던 것처럼 뒤늦게 다음 시선이 아나스타샤에게 향했다.

“너는? 아나스타샤.”

“……내 것도?”

“그럼 엄마한테 보여 주지 않을 생각이니?”

“굳이 뭐 하러?”

차라리 발렌티나의 어머니에게 보여 주는 거라면 모를까, 어쩐지 자기 어머니에게 보여 주려니 창피한 기분이 들어서 아나스타샤는 괜히 뻔뻔하게 이야기했다.

사실 오늘 정말 필요에 의해서 명함을 만든 건 타티아나뿐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아직도 이걸 누구에게 건네줄 만큼의 준비가 자신에겐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게 설령 가족이라 할지라도.

하지만 그런 그녀의 태도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아젤라이다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대뜸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너 대체 어떻게 만들었길래 못 보여 주는 거니? 그, 요즘 애들은 개성 있게 한다고 해서 무슨 명함을 장난감처럼 만들던데…… 엄마가 이야기하지만 명함은 다른 사람들이 보관하는 것이니까 정갈한 게 제일 중요한…….”

“아, 정말. 그런 거 아니야!”

아나스타샤는 바락 짜증을 냈지만 아젤라이다는 안 봐도 뻔하다는 투였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명함을 보여 줄 수밖에 없었다.

“자, 여기.”

“어머…… 네가 웬일이니? 잘 만들었네.”

“웬일이라니??”

하지만 딸의 센스도 마음에 들었는지 아젤라이다는 나지막이 웃고는 그것도 자신의 지갑에 소중히 보관했다.

그 모습을 보며 아나스타샤는 그 이상 짜증을 내지도 못하고 어깨를 늘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주전자가 끓었고, 세 사람은 식탁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이야기 주제는 당연히 오늘 있었던 타티아나의 시상식이었다.

발렌티나는 폰을 꺼내 적극적으로 기사 등에 실린 사진을 보여 주면서 뒤에서 보는 풍경이 어땠는지 설명했고, 또 다른 유명인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다.

아나스타샤도 적절하게 옆에서 기억에 의거하여 이야기를 거들었고, 아젤라이다는 어린 두 사람이 겪은 일들을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이 대화의 마지막은 발렌티나가 자신 있는 발언이 장식했다.

“그리고 다음엔 제가 받기로 했어요!”

문화부에 훈장 맡겨놓기라도 했니?

아나스타샤는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을 할 뻔했지만, 의기양양하게 돌아보는 발렌티나를 보고는 결국 웃어버렸다.

오늘은 구경하는 입장이었지만 언제나 이렇진 않을 것이다. 그 생각은 아나스타샤 역시 같았다.

아젤라이다는 발렌티나를 응원하다가 힐긋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 모녀는 서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에게도 의욕의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한지 아젤라이다는 미소를 지었다.

아나스타샤는 어쩐지 그것도 조금 불편하고 창피했지만, 그래도 부모에게 이해받는다는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티타임은 기분 좋게 흘러갔다.

찻잔을 비운 아젤라이다는 잠시 할 일이 있다며 방으로 향했고, 발렌티나도 그냥 돌아가지 않고 잠깐 방에 앉아 있다가 가겠다며 아나스타샤의 방으로 향했다.

“아, 오늘 그냥 자고 갈까.”

느긋하게 중얼거리며 발렌티나는 허락도 없이 양팔을 펼치며 침대에 털썩 누웠다.

아나스타샤는 그녀의 격의 없는 행동에 황당했지만 이러는 게 하루이틀도 아닌지라 그냥 옆에 앉았다.

누운 채로 뒹굴거리던 발렌티나는 마치 재미난 거리를 찾는 것처럼 한참을 그러더니 피아노 옆 선반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리고 무언가에 이끌리듯 손을 뻗었는데, 아나스타샤는 순간 그녀를 막지도 못했다.

“……?”

발렌티나가 집어든 것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입학 안내서였다.

전화상으로 제의를 받았을 때 아나스타샤가 생각해 보겠다고 답하자 음악원의 입학처에서 우편으로 보내온 것이었다.

그 행정 처리는 학생들을 위한 일이었지만, 지금 아나스타샤에겐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천천히 그 안내서를 읽어 내리던 발렌티나의 표정이 점차 싸늘해져 갔다.

몇 페이지를 넘겨보며 자신이 이해한 게 맞는지 확인하던 그녀는 이윽고 고개를 들고 아나스타샤에게 물었다.

“이거 뭐야? 아나스타샤.”

바로 해명해야 한단 생각은 들었지만, 발렌티나가 이 정도로 화가 난 걸 보는 건 몇 년 만이라 아나스타샤는 바로 말이 잘 나오지도 않을 정도로 당황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