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8화
그간 친구로 지내면서 아나스타샤는 발렌티나가 마냥 쉬운 성격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발렌티나가 만약 유약한 사람이었다면 아나스타샤와 친하게 지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인상이 날카로운 아나스타샤는 그냥 무표정하게 앉아 있기만 해도 주위에 다른 아이들이 잘 다가오지 못하곤 했었으니까.
그러나 발렌티나는 서슴없이 다가와서 장난스레 시비를 걸기도 하고 곧잘 다투기도 했다.
이렇게 대범하고 밝은 성격과 함께, 발렌티나에겐 선을 넘어 심각해지지 않고 뒤끝이 없는 쿨함도 있었다.
가끔 기분이 상하더라도 그녀는 삐쳤으니 달래 달라는 표시를 할 뿐이었다.
그걸 무시하면 왈칵 화를 냈다가도 또 먼저 슬그머니 다가오곤 했다.
“…….”
이 애가 이런 얼굴도 할 줄 알았던가.
실망감으로 얼룩진 눈빛으로 노려보는 발렌티나를 마주 보며 아나스타샤는 무어라 말을 꺼내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발렌티나가 무서운 건 아니었다. 그녀는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아나스타샤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녀가 배신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스스로 이만큼 겁먹을 줄 몰랐던 아나스타샤는 꼼짝도 못 하고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간신히 아무렇지도 않은 척 손을 내밀었다.
“그게 왜 거기 있지. 이리 줘.”
“이게 뭐냐니까?”
“보면 모르니? 입학 안내서지.”
태연한 척 얼른 달라고 말해 봤지만 그건 발렌티나의 화를 더더욱 돋울 뿐이었다.
발렌티나는 양 눈썹을 확 치켜세우며 물었다.
“내가 그걸 몰라서 묻는 것 같아? 진짜로?”
“…….”
평소 언변만 놓고 보자면 아나스타샤가 훨씬 센 편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잔뜩 위축된 채로 두서없이 변명하려 들었다간 더더욱 수렁으로 빠질 뿐이다.
아나스타샤는 일단 그녀가 더 화내기 전에 다리를 반대로 꼬아 앉으며 말했다.
“알았어. 솔직하게 이야기할게. 그냥 권유만 받았어. 권유만. 됐니?”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응. 응.”
권유 정도는 받을 수도 있다.
에르네스트나 타티아나는 벌써 한참 전에 음악원에서 데려가려고 했었으니,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발렌티나는 이 정도 설명으로 아나스타샤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직접 찾아와서 오라고 한 거야?”
“아니…… 어, 전화만 왔었는데, 그리고 며칠 지나서 우리 집에 이게 날아왔더라. 그래서 그냥 한 번 본 거야.”
아나스타샤는 정확히 언제였는지 기억해내려는 듯 턱 부근을 만지작거리며 이야기했다.
말에 거짓은 전혀 없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다. 단지 당시의 기분 등을 전하지 않았을 뿐.
대충 이 정도면 트집잡힐 일 없겠지 생각하며 아나스타샤는 꼬았던 다리를 풀고 비스듬하게 앉았다.
그리고 이제 설명이 되었으면 들고 있는 걸 이리 달라는 뜻으로 손을 내밀었다.
“…….”
발렌티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입학 안내서를 한 번 내려다봤다.
그러더니 아나스타샤에게 건네주는 대신 마치 증거물이라도 되는 듯, 탁 치켜들고는 물었다.
“전화로 뭐라고 했었는데?”
“응?”
“넌 마치 거절했는데도 그쪽에서 막무가내로 이걸 보낸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음악원에서 그럴 것 같진 않거든? 그리고 주소는 또 어떻게 아는 건데?”
“…….”
“네가 보내 달라고 한 것 아냐?”
예리한 지적이었다.
세계적인 고등교육기관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쯤 되는 곳이면 상당한 고자세를 견지한다.
스카우트 제의를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면 어지간해선 그걸로 끝이다.
음악원에서 마치 구애하듯 안내서를 보낸다는 건 에르네스트 정도 되는 천재는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무엇보다 주소를 말하지 않으면 보내지 못하는 게 당연했고.
아나스타샤는 이런 기초적인 빈틈을 염두에 두지 않고 말했다는 게 스스로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결국 지금은 잘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를 써 보려 해야 소용없을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번에도 솔직하게.
“안 그랬어.”
“그럼 뭐라고 했는데?”
“그냥 생각해 보겠다고 했어. 진짜야.”
타티아나도 아니고, 음악원에서 온 스카우트 제의를 딱 잘라 거절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란 것쯤은 이해하리라.
거기에 덧붙여 아나스타샤는 빠르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안 갈 거야. 안 가기로 했어.”
일단 그렇게 딱 못 박듯 말하고 나니 발렌티나의 표정이 비로소 조금 풀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의심의 눈빛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왜 이렇게 화가 많이 난 걸까.
그 이유를 알 것 같으면서도 정확하게 무어라 정의하기가 어려워서, 아나스타샤는 일단 그녀를 달래는 데에 집중하기로 했다.
“미리 말해 줬어야 했던 일인데 늦어서 미안해. 그런데 그냥 안 가면 없던 일이나 마찬가지니까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
이렇게까지 풀죽은 목소리가 나올 줄은 몰랐다.
아나스타샤가 많이 놀랐다는 건 발렌티나에게도 전해졌다.
결국 그녀도 들어 올렸던 안내서를 무릎 위로 천천히 내려놓았다.
한참이나 그 안내서 앞면을 바라보던 발렌티나는 갑자기 가늘게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나 지금 되게 이상한 짓 하는 기분이야.”
“뭐가?”
“그렇잖아? 네가 음악원에 한 살이라도 일찍 가는 건 당연히 친구로서 축하해 주어야 할 일인데, 난 이걸 보자마자 다짜고짜 화부터 나더라고.”
솔직히 잘 모르겠다는 듯 발렌티나는 중얼거렸다.
“왤까? 질투가 나서? 널 시기해서?”
그렇게 하나하나 감정들을 짚어 가면서 발렌티나는 스스로를 돌이켜보고 있었다.
혹시라도 그중 하나라도 마음에 걸린다면 발렌티나는 그대로 이야기할 사람이었다.
하지만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비겁한 감정들을 읊으면서도 발렌티나의 표정엔 전혀 변화가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거였다면 내 앞에서 화를 내지 않았겠지.”
“그랬겠지?”
“그리고 네가 그런 애였다면 나랑 지금까지 친구하고 있지도 못했을 거야.”
발렌티나는 친구에게 좋은 일이 있으면 순수하게 축하해 주고, 나쁜 일이 있다면 함께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다.
아나스타샤는 그런 점을 정말 귀중한 성격이라 생각했다.
그런 성격을 잘 아는 아나스타샤는 그제야 발렌티나가 왜 입학 안내서를 보고 화를 냈는지 단어와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녀는 모든 상황을 전부 정확하게 알고 있진 못했지만, 음악원으로의 빠른 진학은 아나스타샤에게 있어서 그저 좋은 일이 아닐 것이라 통찰하고 있었다.
그렇게 발렌티나의 생각을 짚어 보는 것으로 아나스타샤 또한 아직까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고 어수선하게 돌아다니던 생각들을 정립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정확하게 발렌티나는 상황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하지만 어떠한 설명 없이 혼자서 직감하는 건 항상 불안한 일이다. 그 불안이 결국 화로 폭발해버린 것이다.
발렌티나는 여전히 실망이란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친구긴 하지?”
“……당연한 걸 묻니?”
고민할 것 없이 대답하자 발렌티나는 다시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왜 나한테 단 한 번도 제대로 상담도 안 하고 혼자서 끙끙 앓다가 어디론가 가 버리려는 거야?”
이 한마디에 발렌티나가 느끼고 있었을 모든 불안과 답답함이 전해져 왔다.
아나스타샤도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타티아나와 너무 깊은 이야기까지 해 버리고 에르네스트가 다치는 일까지 생긴 나머지 요즘은 조금 어색해진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런데도 발렌티나는 중간에 끼어들어 와선 밝게 웃고 떠들면서 즐겁게 해주려 했다.
그리고 그건 그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노력이었다.
그 노력을 강요하고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우울함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꼈다.
하지만 겉으로 내보이면 발렌티나에게 더더욱 미안한 일이나 다름없기에 되레 뻔뻔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간다니까?”
“그게 네 확고한 생각이라면 왜 아까부터 나한테 죄지은 사람처럼 하고 있어?”
“…….”
하지만 아무리 뻔뻔해지려 해도 한계가 있다.
발렌티나가 안내서를 집어들자마자 들켰다는 생각부터 덜컥 나면서 안절부절못했던 사실은 이제 와서 어떻게 덮어버릴 수가 없는 일이었다.
연기가 불가능해진 아나스타샤와 최고조로 예민해진 발렌티나의 균형은 분명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발렌티나는 하나하나 논파하듯 이어 말했다.
“그리고 모든 것에 떳떳했다면 당당하게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겠다고 나랑 타티아나에게 이야기했겠지. 그런데 아니잖아.”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아나스타샤는 배회하고 있었다.
어떠한 반박도 하지 못하고 울적한 눈으로 바라보자 발렌티나가 물었다.
“우리한테서 도망치고 싶어?”
“…….”
그 말은 아나스타샤의 심기를 건드렸다.
틀린 말은 아니야. 난 근래 그런 생각을 정말 많이 했었으니까.
하지만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잖아. 설령 했다 한들 여기에 앉아 있으니 괜찮은 거잖아?
아나스타샤는 정면으로 겨누어진 말의 창을 똑바로 바라보며 차갑게 물었다.
“발렌티나.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니?”
“너, 에르네스트랑 무슨 일 있었던 거야?”
결국 그게 궁금한 거지?
대충 파악은 하겠는데 아무도 말해 주지 않으니까 답답한 거잖아? 아, 상담이라도 해 주겠다고? 그럼 뭐가 해결되는데?
화가 난 발렌티나를 마주하면서 겁먹었던 마음이 점차 냉정하게 식어갔다.
슬슬 이 애를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할 때였다.
느닷없이 발렌티나가 무시무시한 억측을 들이밀었다.
“계단에서 밀었다거나…….”
“무, 무…… 무, 무슨 소리야 지금!?”
“네가 말을 안 하잖아.”
“그렇다고 그런 막말을 하니!? 미쳤어 정말??”
“이제 좀 돌아왔네.”
기겁한 아나스타샤가 소리를 치자 발렌티나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걸 분명히 확신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러면서도 일부러 아나스타샤를 당황시켜 본 것 같았다.
심한 충격요법이었지만 그만큼 아나스타샤에게 영향은 확실히 갔다. 너무 놀란 나머지 심장이 거세게 뛰고 정신이 어지러웠다.
이윽고 조금 진정한 아나스타샤가 매섭게 째려보자 발렌티나는 말이 심했다는 걸 인정한다는 듯 급히 수습하는 투로 말했다.
“아무튼 그런 걸 하진 않았을 테니까…… 일단 괜찮을 거라 생각했어. 그런데 왜 기다려도 아무 이야기도 전혀 안 해 주는 건데?”
하지만 발렌티나는 그런 극단적인 억측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불안한 상태였다.
발렌티나는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라는 듯 손바닥을 좌우로 교차해 보이더니 말했다.
“너무한 것 아니야?”
“…….”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나스타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했던 것 맞아.”
“너 진짜 그런 식으로 장난치…….”
“미안해. 발렌티나.”
발렌티나가 섭섭해하다 못해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도 그녀를 괴롭히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모두를 위한 일을 생각하다 보니 결국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했을 뿐이다.
“일부러 그랬던 건 아니야. 그냥…… 너까지 머리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 내 말 이해하니?”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이 정도라 생각하며 이야기했다.
그런데 발렌티나는 대뜸 윽박지르듯 대꾸했다.
“잘난 척하지 마.”
“뭐?”
“내가 지금까지 가만있었던 건 네 그런 생각들을 한참 전에 다 이해했기 때문이야. 이제 와서 그렇게 말하려면, 네 말대로 머리 아픈 일들은 알아서 해결하는 중이어야지.”
말문이 막힌 아나스타샤를 보며 발렌티나는 다시 손에 들린 안내서를 들고 흔들었다.
“이렇게 도망가는 게 아니라.”
“세 번째 말할게. 안 간다고.”
“그럼 어차피 우리 옆에 있어야 하는 거지? 그럼 이야기해 봐.”
“…….”
이 애까지 힘들어지는 건 싫어서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결국 시간을 벌었는데도 그사이 아무것도 못 하고 계속 불안하게만 만들었던 건 사실이었다.
결국 이제 말해야 될 때였다.
여기서 아나스타샤가 피해버리면 발렌티나는 에르네스트나 타티아나에게 물어볼지도 모른다. 그것만큼은 막고 싶었다.
아나스타샤는 마지막 순간까지 주의 깊게 생각해보고, 천천히 이야기했다.
“그날 계단에서 제일 먼저 발을 헛디딘 건 나였어. 에르네스트는 그런 나 때문에 다친 거고.”
“……뭐?”
발렌티나는 다시 한번 확인하듯 물었다.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끄덕였고, 발렌티나의 얼굴은 울 것같이 일그러지려 했다.
가까스로 참는 모습에 여기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발렌티나는 더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아나스타샤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아나스타샤는 이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