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907화 (907/1,277)

##  907화

간밤에 잠은 1시간 정도밖에 못 잤다. 그것도 밤새워 한 녹화로 체력이 완전히 바닥난 상태에서.

물론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많이 걱정해줘서 중간에 휴식을 취하거나 식사를 한 시간도 있었지만, 그런 시간들을 제하고 보더라도 녹화에만 쓴 시간이 12시간이 넘는다.

나와 아나스타샤는 번갈아가며 녹화를 했지만 어느 한쪽이 피아노 앞에 앉아 있다고 해서 다른 한쪽이 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스튜디오에 음악이 흐르는 동안은 모두가 최고조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오로지 그 음악에만 귀를 기울여야만 했다.

‘많이 무리하긴 했네…….’

사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예선 경선용 곡이라 하더라도 항상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그 최선엔 컨디션을 챙기는 일 역시 포함되어 있으니 균형있는 융통성이 필요하다.

실제 무대에서처럼 한 번 만에 마무리해도 되는 일이었고, 조금 늦게까지 시간을 쏟더라도 저녁 즈음엔 그치는 것이 옳았다.

시간 내에 만들어 낼 수 있는 합리적인 수준은 누구나 느낄 수 있다.

나뿐만이 아니라 아나스타샤와 마카로프 프로듀서도 모두 비슷하게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세 사람이 모이자 각자의 합리는 있으나마나였다.

아나스타샤가 끝도 모를 정도로 강해지는 것을 보고 나면 도저히 여기서 그만두겠다고 할 수가 없었다.

프로듀서는 은근히 기대하는 시선을 보내오고, 난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아 내가 떠올린 극한의 디테일을 추구해나간다.

이러한 흐름이 몇 번 반복되자 어느새 자력으론 그만둘 수 없는 관성이 생겨버렸다.

서로의 미세한 터치의 변화마저 감지하며 가능성을 떠올려내고 발전시킨다.

약간의 동기와 도움, 그것만으로도 우린 거의 무한정의 에너지를 끌어낼 수 있었다.

몇 번이나 새로운 수준에 손이 닿았다가 떨어지길 반복한다.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있는 경험이었다.

우린 그렇게 무언가의 끄트머리를 만져나가면서 윤곽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형태를 아느냐 모르느냐는 현실에서 막대한 차이를 가져온다.

이런 경험은 자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혼자서 할 수 있지도 않고.

당연히 쉽게 그만둘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나스타샤도 느꼈을까.’

그리고 그렇게 아나스타샤와 음악을 교류하면서 우린 이미 경쟁자로서 서로의 수준을 가늠하고 있었다.

조금은 조심스럽고,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던 시간은 지나갔다.

이만한 연주자를 앞에 두고 딴청을 피웠다간 한순간에 따라잡혀 버린다. 우린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원한 건 똑같았다. 무대에서 보자는 것. 가급적 높은 곳에서. 그것뿐이었다.

“…….”

가물거리는 시야와 정신 속에서도 난 어제 느꼈던 것들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부를 분명하게 음악에 담아 DVD에 기록해놓았다.

배시시 웃으며 바라보자 미하일 선생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노트북을 가지고 오셨다.

선생님의 노트북엔 CD나 DVD를 재생할 수 있는 플레이어를 연결할 수 있었다.

약간의 세팅이 끝나고, 미하일 선생님이 영상을 재생시켰다.

“보자꾸나.”

작은 스피커로 듣는 것이라 음질은 형편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어중간한 세팅으로 들어보는 이유는 이 심사를 맡은 심사위원들도 그렇게 최고급의 장비로 듣진 않을 것이란 걸 상정해두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세계 각국의 교수나 연주자로 활동 중일 심사위원들은 이 영상을 받아선 지금 이것과 비슷한 환경에서 듣게 될 것이다.

때문에 이렇게 들어서 어떻게 들릴지 모니터링해 볼 필요도 있었다.

“…….”

한참동안 조용히 듣던 미하일 선생님은 첫 곡이 끝나자마자 바로 그냥 영상을 중지시키셨다.

“이 정도면 되었구나.”

“더 들어보지 않으시나요?”

“굳이 이런 음질로 더 들어봐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딱 잘라 말씀하신 미하일 선생님은 다시 DVD를 빼선 케이스에 잘 넣으며 말씀하셨다.

“네가 얼마나 이 곡들을 디테일하게 갈고 닦았는지 너무나 잘 느껴지더구나. 심사위원들은 대부분 이걸 알아보겠지. 일단 떨어질 걱정은 하지 말려무나. 애초에 하지도 않았지만.”

“다행이네요.”

음질이 안 좋아도 들려오는 음악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은 여러 가지 있다.

아티큘레이션이나 리듬감 같은 부분만을 미하일 선생님은 정확하게 파악하시고는 빠르게 대화를 이어나가셨다.

당연히 콩쿠르 신청에 대한 이야기였다.

“자, 네 서류들. 더 추가하거나 수정할 건?”

“없을 것 같아요.”

“다시 한번 확인하려무나.”

이미 내 서류는 예전에 준비해놓았다.

재학 증명서와 수상 이력 증명서, 추천서 등등 공식적인 문서들과 자기소개서, 그리고 사진까지.

모두 미하일 선생님이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한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다시 마지막으로 확인할 필요는 있었다.

그렇게 선생님과 함께 한 자리에서 모든 것을 다시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DVD를 합친 뒤 모든 것을 한 봉투 안에 넣었다.

이건 선생님이 우편으로 보내주시기로 했다.

비로소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정식으로 참가하게 되는 것이다.

“…….”

물론 계속 준비해왔으니 이제 와서 긴장되거나 어쩔 줄 몰라 하는 일은 없다.

하지만 정말로 큰 무대로 향한다는 고양감이 가슴 근처에서 들끓었다.

2년 전만 하더라도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난 국제 콩쿠르는 커녕 계속 연주자로서의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을지도 불분명하다는 불안감을 계속 안고 있었고, 필사적으로 최소한의 실력을 재건했음에도 스스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며 청소년 콩쿠르 등엔 나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미하일 선생님은 그런 내 의견을 존중해주셨고, 이후 국제 콩쿠르에서 성과를 내 보자고 말씀해주시긴 했지만…… 사실 선생님도 내심 불안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에르네스트가 부상으로 빠지고, 아나스타샤와 큰 무대에서 경합하더라도 난 고민하지 않고 피아노를 연주할 자신이 있었다.

난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예전엔 그런 나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많이 강해졌구나. 타티아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미하일 선생님이 문득 그런 말을 했다. 난 버릇처럼 그 말에 반론하려 했지만 결국 그 말이 옳다는 것을 느꼈다.

밤을 새워가며 치열하게 피아노를 치고도 서 있을 수 있어서가 아니고, 올해 들어 건강상태가 좋아졌기 때문도 아니다.

나도 모를 기억과 감정들을 이해하면서 스스로를 더 잘 알게 된 까닭이다.

가만히 바라보자 선생님은 마음이 안정되는 미소와 함께 이어 말씀하셨다.

“잘할 수 있을거다.”

“예, 선생님.”

미하일 선생님은 꽤 오랜만에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피로하고 졸려서인지 그 손길에 잠이 쏟아지려 한다. 하지만 레슨을 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목과 눈에 힘을 주며 버텼다.

그런데 미하일 선생님의 결정은 날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그럼, 이만 돌아가 쉬려무나. 레슨은 다음에 하자꾸나.”

“하지만…….”

“이미 이 예선곡들은 완성되었으니 할 것이 없고, 그럼 네 다음 스케줄인 음반에 대해서 봐야 하는데…… 그걸 지금 하자고?”

“…….”

“억울하겠지만 그럼 어제 밤을 새지 말았어야지.”

선생님은 괜히 놀리듯 말씀하셨다.

난 입을 비죽 내밀며 그래도 할 수 있다고 항변하려 했지만, 컨디션 조절을 염두에 두지 않고 그냥 눈앞의 목표에만 온 신경을 쏟았던 건 사실이었으므로 이번에도 반론은 불가했다.

알아들었으면 잔말 말고 가라는 듯 미하일 선생님은 노트북을 정리하셨다.

화를 내시는 것 같진 않고, 약간 재미있어하시는 것 같다. 왜 그런진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이 난 꾸벅 인사를 하고는 레슨실을 나왔다.

“…….”

갑자기 시간이 붕 떠버렸다.

뭘 해야 하지? 물론 할 일은 많았다.

프로듀서와 같이 음반 프로젝트에 마침표를 찍기로 했던 것도 준비해야 하고, 개인적으로 준비 중인 곡들과 일반 교과 공부도 해야 한다.

하지만 머리가 멍하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난 복도 저편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쪽으로 향했다.

복도 바닥을 구두로 차는 소리만이 올라온다. 그 소리를 리듬삼아 무작정 발을 움직였다.

내가 멈춰 선 곳은 한 연습실 앞이었다.

“…….”

일단 반으로 돌아가든 아니면 스터디룸으로 가든 하는 것이 옳겠지만, 난 지금 이 상태로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친구들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아까 오전 수업 시간을 버티는 것만으로도 한 줌 남아있던 체력이 완전히 다 바닥난 기분이다.

난 연습실 안을 두리번거렸다. 마땅히 누워서 잘 만한 곳은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연습실은 그렇게 쉬라고 있는 곳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바닥에 눕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인지라, 벽 쪽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앉자마자 온몸의 힘이 쭉 빠지며 늘어진다.

수마에 잡혀가기 직전까지 난 목도리를 꺼내거나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무언가를 하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

구세프를 만나고 나오던 에르네스트는 복도에서 미하일을 마주하고는 의아해했다.

타티아나는 걱정될 정도로 창백한 얼굴을 하고도 레슨을 받아야 한다며 오후에 자리를 떴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미하일이 여기에 와 있다면…… 타티아나는?

가볍게 인사를 하면서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어쩐지 타이밍을 놓쳐버렸고, 곧 미하일은 곧장 구세프의 레슨실로 들어가버렸다.

이제 와서 다시 들어가서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 번 신경이 쓰이기 시작하니 그냥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에르네스트는 직접 타티아나를 찾아보기로 했다.

‘멀리 가진 않았을 텐데.’

어제 아나스타샤와 밤새도록 DVD를 녹화하고 1시간 잤다고 했었나. 지금 움직이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타티아나는 무리하고 있었다.

만약 미하일이 그것을 알아보고 일찍 놓아준 것이라면 그녀는 학교 어딘가에서 쉬고 있을 터였다.

어디에 있을까.

전화를 해 보는 건 전혀 쿨하지 않다. 직접 움직여서 만나는 게 나았다.

잠시 생각하던 에르네스트는 일단 미하일의 레슨실에서 가까운 곳부터 수색하기로 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금방 그녀를 찾아낼 수 있었다.

불이 꺼진 한 연습실에서 문도 잠그지 않고 타티아나는 의자에 앉아 색색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담요가 없어서 그런지 목도리로 무릎을 덮고 있다.

“…….”

일단 찾긴 했으니까 자게 두고 가면 되나.

그녀를 찾아서 딱히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갑자기 걱정이 되어 찾아나선 것이었으므로 발견한 시점에서 이미 목적은 이루어졌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자리를 뜨지 못하고 조용히 내려다보다가, 피아노 의자에 살짝 걸터앉았다.

익숙한 가죽의 느낌. 그리고 피아노의 존재감은 그가 아직도 이 악기를 제대로 다루던 때를 그리워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했다.

에르네스트는 어둠 속에서 타티아나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

어제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가 함께 각자의 DVD를 제작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묘한 감정을 느꼈다.

두 사람이 계속 친하게 지내는 것에 대해선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그건 에르네스트의 깊은 본심이기도 했다.

하지만 피아노에 대해서도 충분히 괜찮아졌다고 생각하는데도 이럴 때면 불식간에 우울감이 훅 찾아든다.

에르네스트는 지금 느끼는 감정이 부러움과 후회 등이라는 것을 파악했다.

그리 강한 감정은 아니었기에 충분히 이성으로 누를 수 있었다.

바로 앞에서 잠들어있는 타티아나의 모습은 그에게 무엇보다 강한 동기와 의지를 심어주었다.

그렇게 앉아있길 몇 분 정도.

지쳐 잠들어 있는데도 두 사람분의 숨소리가 들린다는 걸 예민하게 눈치챘는지, 타티아나가 스르륵 잠에서 깨어났다.

여전히 졸음에 적셔진 눈으로 에르네스트를 바라본 그녀는 잠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가만히 있다가, 냅다 비명을 질렀다.

“무, 무스…… 무슨! 왜 여기에 있나요!?”

“아, 그게.”

이렇게 놀랄 거였으면 문이라도 잠가놓지 그랬어.

속으로 웃으며 에르네스트는 여유있게 자세를 바로했다.

이미 그녀가 깨어났을 때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해선 미리 다 준비해놨다.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아까 보니 미하일 선생님이 레슨을 일찍 끝내셨더라고. 그래서 널 찾아왔지. 어제 어떤 음악을 연주해서 녹음했는지 들어보고 싶어.”

“…….”

타티아나는 여전히 놀라고 당황한 듯 보였지만 곧 경계를 늦추며 말했다.

“그게 전부인가요?”

“응. 그런데.”

“…….”

뭔가 분하고 억울한지 입술을 달싹이던 타티아나는 이내 자신의 스마트폰의 잠금을 해제했다.

그리고 음악 파일을 재생할 수 있도록 해주고는 에르네스트에게 건네주었다.

“연주를 할 만한 컨디션은 아니니 녹음본으로 만족하세요.”

“……이게 있었네?”

“영상으로 녹화했지만 음악 파일도 받아뒀어요.”

사실 이렇게 정말로 들어볼 생각까지도 없었고, 그냥 그녀를 만나러 올 만한 명분을 말했을 뿐인데 이렇게 스마트폰을 넘겨받으니 에르네스트는 약간 당황스러웠다.

타티아나는 이거면 되었지 않냐는 듯 고개를 기울이더니 도로 눈을 감아버렸다.

그녀가 평소 다른 사람 앞에서 자는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는다는 걸 아는 에르네스트는 혼란스러웠다.

자는 척하는 건가? 아니면 정말로 피곤해서 다시 자는 건가?

워낙에 움직임이 작은 그녀는 이렇게 가까이에서 봐도 잘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에르네스트는 일단 가만히 있을 순 없어서 이어폰을 꺼내어 스마트폰에 꽂았다.

그나저나 이렇게 자기 스마트폰을 막 줘도 되나.

그녀가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음악 파일의 재생 말고 다른 걸 하면 안 되지만, 에르네스트는 자꾸만 다른 것도 보고 싶다는 호기심을 느꼈다.

‘너무 무방비한거 아니냐고…….’

믿음을 받고 있다는 건 기쁜 일이지만 이렇게 시험에 들게 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에르네스트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였다.

타티아나의 스마트폰 화면 위로 메시지 하나가 올라왔다. 무음 상태여서 소리는 나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지금 어디니?]

“…….”

에르네스트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타티아나 대신 그가 지금 여기가 어딘지 말해주는 건 쉽다. 그러면 아나스타샤는 한달음에 날아오겠지.

하지만 조금 늦게 답장한다고 해도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밤새 같이 있었으니까 지금 잠깐 정도는 괜찮잖아.’

자기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에르네스트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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