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908화 (908/1,277)

##  908화

수마는 밀린 잠의 지불을 요구했고 난 잠깐이라도 눈을 붙일 수밖에 없었다.

예전처럼 몸이 받아주지 않는다고 정신력으로 밀어붙일 순 없었다.

검은 새가 몸을 완전히 맡긴 후로 나는 정직하게 피곤해졌고, 그것을 버텨내는 것이 약간 더 어려워졌다.

육신에 종속되어간다는 기분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난 더더욱 자유로움을 느낀다.

난 스스로에 대해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고 움직일 수 있었다. 이전에 정신력으로 움직이던 것은 쓰러질 때까지 멈출 수 없는 망령의 강박이었다.

여전히 그런 강박이 조금 남아있긴 하지만 그래도 집중하고 싶을 때 집중하고 적당히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었다. 자기관리 측면에서 훨씬 더 유리했다.

지금 역시 내 체력 수준과 패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길게 잘 생각은 없었다. 지금 너무 자 버리면 저녁에 잠을 설치게 되고 이 피로의 여파가 오래 가게 된다.

짤막하게 눈만 붙이고 적당히 활동하다가 저녁에 잔다면, 어제 하루의 밤샘 작업 정도는 가뿐히 극복해낼 수 있었다.

살짝 잠이 들려고 했을 때 에르네스트가 왔었던 것 같긴 한데, 일단 달라는 걸 주고 돌려보냈으니 상관없었다.

그렇게 난 다시 수마와 협상을 하여 조금 달래놓고는 적당한 시점에서 의식을 일으켰다.

“…….”

“잘 잤어?”

눈을 뜨자마자 앞에 보이는 건 이어폰을 막 귀에서 빼내고 있는 에르네스트의 모습이었다.

불 꺼진 연습실에서 투명한 햇살만이 그의 등 뒤에서부터 비춰온다. 난 아직도 꿈인가 싶어서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아직도 꿈인 게 아니라, 난 애초에 꿈 같은 건 잘 꾸지도 않는다. 이건 그냥 현실이었다.

“잠깐……만요. 뭐예요?”

아까 전에도 분명 그를 보고 당황하긴 했다. 그래도 아깐 약간 반가웠던 느낌이 있어서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던 것에 비해 지금은 언짢은 목소리부터 나왔다.

당연히 자리를 비켜 줬어야 했던 것 아닌가?

내가 스마트폰을 통째로 넘겨주었던 건 그런 의미였다. 살짝 잠이 들다가 깨긴 했지만 괜찮으니까 이걸 받고 나가 달라고.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이제 와서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날 쳐다보고만 있었다. 난 혹시나 싶어 물었다.

“설마 계속 계셨던 건가요?”

“어……? 그런데?”

“……!”

에르네스트가 너무 당연하다는 듯 말하니까 순간적으로 내가 지금 이상한 사람인가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가 안 간다.

그가 계속 있으면서 다른 걸 원했다면 나도 잠들지 않고 같이 있을 수도 있었다.

그 정도는 견뎌 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단지 녹음했던 걸 들어보고 싶었던 게 전부라고 했고, 난 그가 원하는 걸 줬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긋난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내가 해야 할 말은 해야겠다.

“원하던 건 드렸잖아요. 그럼 나가 주셨어야죠.”

“원하던 거?”

“녹음본이요!”

“아, 그거.”

에르네스트는 자기가 뭘 원한다고 말했는지도 까먹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곧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찾아왔는지, 와선 다짜고짜 음악을 달라고 했던 건 대체 뭐였나 싶다.

내가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듯 노려보니 그는 태평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나가란 말은 없었잖아.”

우리 다음 달이면 혹시 일곱 살이 되는 거였나요?

얄밉다고 해야 할지, 그 유치한 말에 난 반박하려다가 곧 말문이 막힘을 느꼈다.

어쨌든간에 내가 그에게 나가달라 하지 않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왜 안 했더라. 그냥 정확하게 말했으면 되었을 텐데.

잠결에 에르네스트를 대한 것에 대한 약간의 후회와 함께 기억들을 떠올려보던 난 일부러 더 싸늘하게 말했다.

“제가 바보같았네요. 기본적인 에티켓을 아는 에르네스트라면 당연히 쉴 수 있게 자리를 비켜주실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에요.”

“그건…….”

“연습실에서 졸고 있던 제가 이런 말을 하니 설득력이 없나요? 그렇긴 하네요. 지금 누가 누굴 탓하는 건지.”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에르네스트는 나와 다툴 생각은 전혀 없다는 듯 목을 뒤로 빼더니 제일 핵심적인 부분을 짚어왔다.

“그래서 불편했어?”

두 번째로 말문이 막혔다.

그에게 스마트폰을 줘버리고 난 뒤엔 아무 문제 없이 그냥 잠들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앞에 있다고 해서 딱히 방해가 된 건 전혀 없었다.

되레 내 정면에서 오는 햇빛을 조금이나마 더 막아줘서 더 잘 잔 것 같단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난 그런 걸 지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 지금은 약간 얄미운 그에게 내 감정을 조금이나마 되돌려주고 싶었다.

잘 땐 괜찮았어도 지금은 괜찮지 않은 건 사실이기도 하니까.

“예. 불편해요.”

“그럼 사과할게. 미안해.”

“…….”

과거형이 아니라 왜 현재형이냐고 말꼬리를 붙잡지 않고 그는 깔끔하게 사과했다.

이런 타이밍에 사과를 받아버리니까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반대로 계속해서 짜증을 부리며 물고 늘어지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물론 남들에게 별로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인 건 바라던 일이 아니었지만, 난 잠버릇도 없는 편이었고 지금 에르네스트의 반응을 보니 뭔가 추태를 보인 것도 없는 것 같았다.

나 역시 조금 미안하긴 했기에 이쯤이면 되었다 싶어서 그에게 말했다.

“미안하시다면 괜찮아요. 용서해드릴게요.”

“너무 쉽게 용서해주는거 아냐?”

“……그럼 제가 뭘 더 해야 하나요?”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에르네스트는 뭔가 미묘한 말투로 말했다.

그럼 내가 여기서 더 화를 내며 까다롭게 굴었어야 하나? 그는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걸까……?

하지만 이 이상 괜히 더 멋대로 굴 생각은 없었다. 일단 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두기로 했다. 난 조금 더 자세를 바로 하여 앉으며 그에게 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죠?”

“40분 정도.”

“그동안 계속 여기에?”

“이거 듣고 있다보니 금방 가던걸.”

그는 여전히 가지고 있는 내 스마트폰을 가리켰다. 40분 정도면 녹음했던 것 전부를 듣고도 시간이 남아서 더 들어볼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에르네스트가 내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었던 시간을 가늠해보던 난 순간 또 다른 실수를 깨달았다.

딱히 그에게 보여서 문제될 만한 사진이나 메시지는 없었지만, 그가 녹음해주었던 리스트 스페셜은 여전히 내 스마트폰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 곡들을 좋아한다는 건 에르네스트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CD를 리핑해서 종종 듣고 있다는 증거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럼…… 스마트폰 돌려주시겠어요?”

“아, 그래.”

괜한 장난 없이 그는 내게 곧장 스마트폰을 건네주었고, 난 그걸 받자마자 바로 이것저것 눌러보며 확인부터 해봤다.

하지만 이렇게 본들 그가 40분 동안 정말 음악만 듣고 있었는지 알 방법은 없었다.

무턱대고 줘버렸으면서 이제 와서 깐깐하게 구는것도 우스운 일이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였다.

에르네스트가 한 손으로 이어폰을 정리하며 말했다.

“내용 좋더라. 뭐…… 재생기기가 스마트폰이니까 잘 들리지 않은 곳도 있었지만. 네가 전부 챙겼다는 건 맥락적으로 들렸어.”

“그런가요.”

“응. 특히 잘 들렸던 부분은…….”

그러면서 그는 내 음악을 제대로 들었다는 걸 확인시켜주기라도 하려는 듯 상세하게 곡들마다 짧은 평을 하기 시작했다.

어찌나 정확한지, 딱 짚어주는 위치들은 모두 내가 은근히 신경쓰고 있던 부분들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난 기뻤는데, 에르네스트는 이어서 그런 표현들이 잘 되었다면서 좋았다고 해주기까지 했다.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까 전만 해도 차갑게 따졌던 건 정말 괜히 왜 그랬는지 모를 정도였다.

난 가만히 그의 평가를 들으며 앉아 있다가, 불쑥 물었다.

“그 이어폰.”

“어?”

“잘 쓰고 계시네요.”

저번 여름 크로커스 시티에서 내가 맞춰준 커스텀 이어폰이었다.

에르네스트는 그 후로 계속 혼자 음악을 들을 때면 항상 그 이어폰만을 사용했다.

그가 내 선물을 잘 써서 내 음악을 들어 주었다는 건 내게 있어서도 정말 의미있게 다가오는 일이었다.

에르네스트도 희미하게 웃더니 돌돌 말린 이어폰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좋더라고. 네가 봐도 잘 쓰고 있지?”

“예. 자주 쓰시는 것 같고…… 그래도 귀에 무리가 갈 수 있으니까 되도록 조심해 주세요.”

“적당히 쉬어가면서 그렇게 하고 있어.”

이어폰을 너무 오래 쓰는 건 귀 건강에 절대 좋지 않다.

내가 쓸데없이 깊게 신경쓰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그의 귀 건강에 난 상당한 관심이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청력 검사도 해봤다면서 내게 알려주었다.

난 갑자기 청력에 문제가 있나 싶어 덜컥 겁부터 먹었지만, 사실 그런 것이 아니라 팔의 치료를 하면서 받은 전체적인 종합 검사 과정에서 있었던 검사일 뿐이었다.

다행히 그가 말해준 청력 검사의 결과는 일반인보다 훨씬 좋은 편이었다. 그는 그 좋은 귀로 잘 들었다는 듯 귀 부근을 톡톡 치며 말했다.

“아무튼 잘 들었어. 내 소감은 이 정도만 할게.”

“충분해요. 고마워요.”

“나야말로.”

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잠이 싹 달아났다.

이 정도면 밤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오후엔 뭘 할까 싶다. 딱히 스케줄도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어떤지 물어볼까?

“그러고 보니까, 너 자는 사이에 아나스타샤한테서 메시지 왔었어.”

“……예?”

갑자기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했다.

난 깜짝 놀라며 급히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정말 그 말대로 지금 어디냐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딱 40분 전에.

기분이 좋아졌었던 난 다시 급속도로 불만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나빴다가, 좋았다가, 나빴다가. 정말 완전히 들쑥날쑥이다.

날 조울증에 걸리게 하려는 건지, 에르네스트는 그 속을 모를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난 따질 기력도 없어서 그냥 물어보았다.

“왜 그 말을 이제야 해주시나요?”

“네가 자고 있었거든.”

“깨워주셨어야죠.”

“어제 밤새웠다면서 잠깐 쉬겠다는데 그걸 어떻게 깨워?”

“…….”

그 말도 맞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나였더라도 그렇게 했을 테니까.

세 번째로 말문이 막혔다. 잠을 못 자서 그런지 머리가 잘 돌지 않는 느낌이다.

멍하니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자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아나스타샤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 거야. 그냥 레슨 받았다고 하거나 자느라 몰랐다고 하면 되잖아?”

에르네스트는 정말로 이런 건 사소한 일이라 생각하는 듯 보인다.

어차피 오후 시간은 내게 주어진 것이니까 효율적으로 잘 쓰는 사이에 방해받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는 분명하게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사실 그가 없었더라도 내 스마트폰은 무음이었기 때문에 메시지를 볼 수는 없었을 테니 상황이 딱히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아나스타샤에게 무어라 사과해야 할까 고민하던 차였다. 마치 텔레파시라도 가서 닿은 것처럼 그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난 세 번 정도 신호를 보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예, 아나스타샤.”

- 전화 받았구나? 뭐 하고 있니? 집에 간 건 아니지?

메시지를 했던 그녀가 꽤 기다렸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며 난 조심스레 답했다.

“아직 학교예요. 지금은 레슨실 옆 연습실…….”

- 미하일 선생님 레슨실 옆?"

“예, 맞아요.”

- 나 지금 거기 앞인데. 갈게. 몇 호야?

“어…….”

난 말하다 말고 나도 모르게 에르네스트를 돌아보았다. 그는 말없이 내가 아나스타샤와 통화하는 걸 지켜보고 있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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