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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909화 (909/1,277)

##  909화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에르네스트를 보며 뇌리에 스친 생각들은 날 착잡하게 만들었다.

사실 지금 아나스타샤가 이곳에 오더라도 별로 문제될 건 없을 터였다.

난 그와 계속 음악과 콩쿠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것이 전부였고, 아나스타샤 역시 어제 밤새워 DVD를 제작하고 오늘 같은 콩쿠르에 신청서를 낸 친구이자 경쟁자로서 할 이야기가 많을 뿐일 테니까.

하지만 그런 표면적인 관계만으로 모든 것을 정리할 순 없었다. 나부터가 지금 곧장 의식해버린 것이 그 증거이기도 했다.

이미 단순하게 생각해버리기엔 너무 멀리까지 왔다.

우리들의 관계가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지 난 느끼고 있었고, 그걸 무시하는 건 너무 무관심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평온하기만 한 에르네스트의 반응을 보면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는 아직 우리 사이에 놓인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상상도 못 하는 게 당연할 테니 그건 그의 잘못이 아니다.

아나스타샤가 날 어떻게 보고 있는지에 대해 아는 건 당사자인 나와 발렌티나 정도겠지.

“…….”

그렇게 생각하면 약간은 여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내가 정말 못할 짓을 하고 있다는 죄책감이 가슴을 꾹 짓눌러온다.

나 역시 혼란스러운 것은 마찬가지기에 신중하게 대하려고 하는 것이지만, 이 유예로 인해 관계성이 유지되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거기에 내 이기심이 조금도 없는 걸까? 난 그 물음에 자신이 없었다.

아나스타샤가 스스로 모든 걸 밝힐 때까지 난 손 놓고 기다리기만 하면서 그저 모든 걸 떠넘기고 있는 게 아닐까.

지금 과연 맞는 행동을 하는 걸까. 아니면 모든 걸 파멸로 밀어넣고 있는 걸까.

잠깐 사이에도 많은 상념과 의심이 스치고 지나간다.

난 그 모든 것들을 외면하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일단 지금 현 상황을 현실적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에르네스트는 자리를 피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잘못한 것이 굳이 있다면 내가 자는 모습을 빤히 지켜봤다는 것 정도인데, 그사이 내 음악을 계속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는 건 이어진 분석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기에 잘잘못을 따지자면 내 쪽이 훨씬 컸다.

그에게 이것을 미룰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난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아나스타샤가 도착하길 기다렸다. 잠시 후, 노크 소리가 두어 번 들리고는 연습실 문이 열렸다.

“들어갈게?”

그렇게 연습실에 들어서자마자 아나스타샤는 마주 보고 앉아 있는 나와 에르네스트를 번갈아 일견하더니 에르네스트에게 물었다.

“어라? 네가 왜 여기 있어?”

“있으면 안 되냐?”

“그냥 물어본 건데 왜 그렇게 받아?”

대뜸 투닥거리기 시작하나 싶었는데, 아나스타샤는 여기서 무의미한 이야기를 더 이어나가는 건 피곤하다는 듯 문가에 슬쩍 기대더니 말했다.

“딱 봐도 알겠어. 우리 어제 녹음한 거 가지고 타티아나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던 것 아니니?”

이미 우리가 이 학교에서, 그것도 연습실에서 할 만한 일들은 너무나 뻔했다.

특별히 어렵게 추리할 것도 없이 아나스타샤는 정확하게 상황을 짚어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바로 파악당한 게 싫었는지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그게 다는 아니야.”

“뭔데 그럼?”

“그냥 레슨 일찍 끝난 것 같길래 뭐 하고 있나 해서.”

에르네스트는 이 이상 말해봤자 별것 없다는 듯 대충 이야기하더니 괜히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시간 흐름이 어떻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 아나스타샤가 날 보며 물었다.

“아까 레슨하느라 메시지 못 봤던 것 아니었어? 타티아나.”

“음…… 아뇨.”

“뭐? 그럼 보고도 무시하…….”

“그것도 아니에요.”

난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자고 있었어요. 여기서.”

사소한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던 난 그저 있는 그대로 말했고 아나스타샤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여기 어디 잘 곳이 있다고……?”

“그냥 이렇게 앉아서…….”

“이런 데서 아무렇게나 자면 어떡해. 조금이라도 눈 붙이려면 편하게 붙여야지. 다른 곳에도 쉴 곳은 많은데.”

“어쩌다 보니…… 이곳이 가까웠어요.”

“감기라도 들면 큰일이잖아.”

목도리를 무릎담요 삼긴 했지만 확실히 잘 만한 곳은 아니다.

연습실은 춥기도 하고 누울 곳도 없었으니까. 아나스타샤는 괜히 연습실의 벽 등을 만져보며 자기엔 너무 춥다며 투덜거렸다.

에르네스트는 자신이 지켜봤던 상황을 이야기했다.

“나한테 녹음한 거 들려주고는 자더라고. 너희 어제 밤새느라 피곤했잖아. 아침에 보니 너도 꾸벅꾸벅 졸더만.”

“내가 언제?”

“그랬어.”

그 말에 더 반박할 생각은 없는지 아나스타샤는 잠시 침묵했다가, 다른 방식으로 물어왔다.

“그럼 타티아나 자는 거 보고 있었겠네?”

“어. 난 신경도 안 쓰고 자던데.”

“…….”

에르네스트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난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기만 했다. 사실 중간에 끼어든다 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에게 스마트폰을 넘겨주고 그냥 자버렸으니 그의 입장에선 신경도 안 쓰는 것 같다고 느낀 게 당연하기도 할 테니까.

아나스타샤는 이내 다시 반대편으로 기울여 자세를 잡더니 말했다.

“이 애 잠버릇 정말 없지 않니?”

살짝 불안감을 느끼는 와중, 에르네스트가 대답했다.

“예전부터 그랬었던 것 같은데.”

“맞아. 뒤척이는 일도 하나 없고 가끔은 숨 쉬고 있나 확인하고 싶어진다니까? 너도 확인했었니?”

“그렇게까진 안 했는데.”

“난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이 애 숨부터 확인했어. 진짜로.”

갑자기 내 잠버릇 이야기는 왜 하는가 했더니, 두 사람은 내가 자는 모습을 놓고 감상을 나누고 있었다.

심각하게 뒤척거린다거나, 침을 흘렸다거나 하는 놀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런 이야기를 듣는 건 부끄럽다. 차라리 내가 안 듣는 곳에서 하면 모를까.

“잠깐만, 무슨 말씀들을 하시는 건가요, 지금? 창피하게 정말.”

“그러니까 누가 보는 앞에서 자래? 아하하.”

아나스타샤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가볍게 이야기하고 있긴 하지만, 난 아까 너무 무방비했던 것에 대해서 잘못했다는 기분을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앞으론 조금 더 조심해야겠단 생각이 든다. 물론 오늘은 밤샘 작업을 하고 온 특별한 날이긴 하지만.

내가 대충 이야기를 이해한 것 같다고 봤는지, 아나스타샤는 살짝 주제를 돌려 이번엔 본격적인 음악 이야기로 들어갔다.

“아무튼…… 그래서 너도 타티아나가 연주했던 건 다 들어본 거야?”

“그래.”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은근히 도발하듯 말했다.

“만약 이길 생각이라면…… 만만찮을 것 같은데.”

그는 내 음악을 굉장히 고평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제의 아나스타샤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어제 내가 한 건 들어본 적은 없잖아 아직.”

“그렇지.”

“그럼 넌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딱 잘라 말하는 그 말은 어딘가 선을 긋는 듯했다.

어떠한 자신감의 발로라면 이대로 자연스럽게 피아노 연주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다.

심지어 여긴 연습실이니 피아노가 있기도 했고.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속지 않겠다는 듯 살짝 인상을 쓰며 말했다.

“들려줄 것도 아니면서 기대하게 만들지 마.”

“어머, 내가 들려주지 않을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

“이제 그 정돈 알지…….”

그는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아나스타샤는 제법이라는 듯 키득거리며 웃었다.

난 두 사람이 이런 식으로 주고받는 모습을 정말 오래전부터 봐온 것 같단 기분을 느꼈다.

에르네스트는 옆에 있는 피아노를 슬쩍 바라보았다.

“뭐, 상관없어. 콩쿠르 가 보면 알겠지.”

“그래, 가 보면 알 거야.”

지금 보여주진 않겠지만 충분히 기대해보라는 투로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늘어뜨리더니 옅게 웃었다.

“둘이 나란히 결선까지 갈 수 있었으면 좋겠네.”

그전부터 만나서 몇 번이고 경합하겠지만, 몇 번의 통과를 거쳐 정말 결선까지 가게 된다면 정말 좋을 것 같다.

물론 우리 두 사람의 목표는 우승이니까 더 치열하게 다투어야겠지만…… 그것도 분명 평생에 잊을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라 생각되었다.

아나스타샤도 그 상황을 잠깐 생각해보는가 싶더니 웃으며 말했다.

“결선 가는 것도 커리어가 되니까?”

“뭐 그렇잖아. 결선에만 일단 오르면 입상 가능성도 확 높아지고.”

“어떨 것 같아? 네가 듣기엔?”

“네 건 나중에 들려주겠다며. 그럼 나도 할 말 없지.”

“에이, 삐치긴.”

“……어이없네.”

괜히 또 놀리려 든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다는 듯 에르네스트는 말려들지 않고 바로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어쨌든…… 너도 타티아나랑 이야기하려는 게 있었던 것 아냐?”

“응?”

“전화하고 왔잖아.”

“아, 그거.”

메시지도 하고 전화도 하면서 아나스타샤는 날 찾아왔지만, 사실 우리가 학교에서 나눌 이야기라 하더라도 뻔했다.

아나스타샤는 빙그레 웃더니 허공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쭉 늘어뜨리며 말했다.

“방금 우리가 했던 이야기면 됐어.”

어제 DVD에 담았던 음악들과 콩쿠르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여기서 꺼내기 조금 부담스러운 주제였다.

아직도 에르네스트의 부상이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 역시 정말 나가고 싶어 했던 것이 바로 이 열일곱 살의 국제 콩쿠르들이었다.

하지만 먼저 그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내게 찾아와서 음악을 들려달라고 하기도 했고 그 후에도 편하게 아나스타샤를 대하며 콩쿠르 이야기를 이어가준 덕분에 분위기는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이것도 에르네스트가 많이 배려해준 덕분이라는 건 잘 안다. 그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끼며 나도 비로소 웃어 보일 수 있었다.

단순한 이야기들이 끝나고, 에르네스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희들 그럼 지금부터 뭐 할 거야?”

“글쎄, 뭐 할까.”

아나스타샤는 손가락으로 턱 근처를 매만지더니 날 휙 돌아보며 물었다.

“낮잠이나 조금 더 잘까? 타티아나. 30분 정도만.”

“어…… 여기서요?”

“아니, 여긴 춥잖아. 좁고. 그러니까 다른 곳에서.”

다른 곳? 그녀가 말한 조건대로라면 따뜻하고 넓은 곳이 있다는 것 같은데……. 난 학교 내에서 잘 만한 곳을 딱히 떠올리기 어려웠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르네스트 역시 잘 생각나지 않는지 물었다.

“다른 곳 어디?”

“응? 뭐야, 설마 따라오려고? 여자애들 자는 거 구경하는 취미가 있…….”

“아니, 됐어, 됐어.”

에르네스트는 황급하게 손사래를 치며 반걸음 물러나기까지 했다.

아나스타샤는 그런 그가 귀엽다는 듯 웃기까지 했지만, 사실 우리가 그에게 이러면 안 된다는 건 그녀도 나도 아는 사실이었다.

적정선에서 선을 넘지 않고 아나스타샤가 그를 대하는 기준이 있다. 난 그 지점을 잘 지켜보고 있었다.

이쯤 이야기하면 되었다는 듯 에르네스트는 코트를 집어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그럼 자러 가든가. 나도 간다.”

“넌 어디 가는데?”

“집에.”

“흐응.”

그 짧은 콧소리에서 아나스타샤의 고민과 갈등이 느껴진다.

그녀는 무언가 제안하려다가 말고 중간에 마음을 바꿨는지 웃으며 손을 살랑거리며 흔들었다.

“그러면 잘 가. 푹 쉬고.”

“너희야말로.”

나 역시 바로 자리를 뜨는 에르네스트에게 인사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에르네스트.”

“응.”

그는 고개를 까딱이곤 연습실 문을 열었다.

난 그가 나갈 때까지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문이 닫히고 나서야 나지막이 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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