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0화
음반 녹음이라는 특별한 일을 마쳐도 난 여전히 학생이었고 평범한 일과들은 그대로 흘러갔다.
1월에 있는 기말고사를 위해 교과 공부도 하고, 주어진 과제곡도 성실하게 연습했다.
다만 일전에 나갔던 연주회나 국제 콩쿠르 참가 덕분에 과제곡은 미하일 선생님의 재량으로 내게 유리하게 선택할 수 있었다. 위클리 등의 행사도 연주회로 갈음할 수 있었고.
그리고 여유가 있는대로 다른 아이들의 요청에 응하기도 했다.
밀레나를 도와줬던 것처럼 반주 전체를 부탁하는 일은 아니었지만 시간을 내어서 잠깐만이라도 좋으니 맞춰 달란 부탁은 정말로 많았다.
난 피아노 연주자이기 때문에 다른 악기들을 잘 모른다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이미 학교엔 내 소문이 묘하게 나 있었다.
“언니요? 약간 행운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것 아닐까요?”
“행운……이요?”
한창 타과 학생들과 열심히 합주 연습을 하고 나서 스터디룸으로 돌아오자 류보비가 문득 그런 말을 했다.
내가 멍하니 되묻자 그녀는 당연히 그렇지 않겠냐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자주 연습해줬던 막심 오빠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했었죠? 아나톨리도 언니 만나고 나서부터 성적 진짜 괜찮고…… 언니 손만 거쳤다 하면 모두들 잘하잖아요?”
“하지만 그건 그만큼 각자 노력을 했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노력으로 봄을 마중한 사람들에겐 네잎클로버가 주어지는 거겠죠?”
“…….”
류보비는 내가 공로 예술가 훈장을 받았을 때 했었던 말을 인용해서 되돌려주고 있었다.
내 입으로 했던 말이니 이제 와서 그걸 완전히 뒤집을 순 없지만…… 아무래도 정말로 행운의 증표처럼 여겨지는 건 기쁘면서도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낯간지럽기도 하고.
그나저나 류보비가 이렇게 말을 야무지게 잘할 줄은 몰랐다.
놀라기도 하고 말문이 막히기도 해서 허공에 손가락만 더듬거리고 있자 류보비가 얼른 주제를 돌려주었다.
“언니, 그런데 어제는 다른 언니들이랑 쇼핑 갔었죠?”
“어, 그건 또 어떻게 아신 건가요?”
“발렌티나 언니 SNS 보고요. 그리고 아나스타샤 언니도. 그런데 언니만 구석에 작게 잡히길래요.”
방과 후 오후엔 시간이 있으면 친구들과 쇼핑을 가기도 했다.
사실 재작년에야 옷들이 정말 없었지, 이젠 세 번째 맞이하는 겨울이라서 굳이 옷을 더 살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는 늘 입을 옷이 없다고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이었다.
물론 그 아이들은 그냥 최신 패션 등을 구경하는 것 자체를 즐기는 것뿐이었다.
딱히 사치를 하는 것도 아니고 각자 상금 등으로 벌어들인 돈이나 용돈에서 건전하게 구매하는 것이니 문제될 건 없었다.
그리고 각자 자신의 모습을 셀피로 찍어 SNS 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으니 이미 사진 같은 건 다 공유된 지 오래인 듯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 소식만 알 길이 없으니 답답한지 류보비가 살짝 보챘다.
“SNS 안 하시는 건 어쩔 수 없다 쳐도 사진도 안 찍어놓으신 건 아니죠? 뭐 사셨어요? 궁금해요.”
“아…… 그냥 겨울에 편하게 입을 것들만 조금 샀을 뿐이에요. 사진은…… 여기요.”
나도 이런 종류의 쇼핑엔 늘 적당히 어울리는 편이었다. 다만 혼자서 사진을 찍어 남기는 취미가 없을 뿐이다.
카메라 앞에서 피사체로 서는 건 익숙해졌지만 그때는 일한다는 기분으로 설 뿐,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 때문에 내 사진 대부분은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가 대신 찍어서 보내주곤 했다.
대신 내 사진이나 단체 사진은 그저 우리만의 추억으로 남겨질 뿐, SNS에 올라가진 않는다.
때문에 공유되지 않은 사진들을 본 류보비는 보기만 해도 재미있어 보인다는 듯 초롱초롱한 눈으로 사진을 넘겨보았다.
“진짜 너무 잘 어울려요. 언니들 모델 안 하냐는 말은 안 들어요?”
“아나스타샤는 분명 있었을 것 같아요.”
“그건 그렇죠? 와, 진짜 재밌었겠다…….”
“아, 그…… 이번엔 제가 아나스타샤에게 갚아야 할 일이 있어서 갔던 것이니까, 언제 시간 되면 류보비도 같이 갈까요?”
어쩐지 류보비가 굉장히 부러워하고 있는 것 같아서 넌지시 제안해보았다.
그녀와 우린 나이차이가 여섯 살이나 나지만 동생을 데리고 다닌다는 기분으로 함께 다니면 분명 즐거울 것 같았다.
하지만 류보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충격적인 말을 했다.
“어울리지도 않고 민폐일 것 같아요 그건.”
“왜 그런 말을 하시나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아, 음…… 죄송해요. 그게 아니라…… 제가 키가 조금 더 빨리 컸으면 해서…….”
난 당혹스러운 눈빛을 감추지 못했고, 류보비는 자기도 모르게 한 말이 내게 상처를 입혔다는 것에 대해 뒤늦게 깨달았는지 깜짝 놀란 표정으로 허둥지둥 변명했다.
하지만 류보비가 어떤 의미로 이런 말을 했는진 이해할 수 있었다. 키가 크고 눈에 띄는 아나스타샤가 있는 덕분인지 우리가 찍은 사진은 어떻게 봐도 꽤 잘 찍혀 있었다.
때문에 류보비는 그 사진 안에 자신이 들어가기엔 너무 작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난 이 아이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게 귀여웠다. 지금은 당장 그럴지 몰라도, 이제 몇 년만 있으면 분명 나 정도는 금방 따라잡고 기뻐할 표정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류보비는 남은 시간이 그리 많이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제가 언니들만큼 클 때쯤이면 언니들은 학교에 없겠죠.”
아직 한참 남은 일인데도 불구하고 생각만 해도 침울해지는지 류보비는 입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그러더니 절로 눈물을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평소 밝은 성격인 류보비가 이럴 줄은 몰라서 조금 당황했다. 덩달아 나도 조금 울적해졌다.
하지만 이럴 때 같이 울어버리면 그건 정말 류보비에게 미안한 생각을 더 깊게 심어주는 일 밖에 되지 않는다.
난 류보비를 한 번 꼭 안아주고는 쾌활하게 이야기했다.
“학교에 없으면 뭐 어떤가요? 놀러오면 되죠.”
“……정말요?”
“예. 졸업생이라고 해서 놀러오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여기 스터디룸에 와도 되고…… 아니면 밖에서 만나도 상관없잖아요? 전 꼭 류보비와 같이 놀고 싶어요.”
나이 차이가 난들 그런 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류보비는 야무지게 행동할 줄 아는 아이였고 모두가 그녀를 좋아한다.
언젠가 다 함께 모여서 놀았던 적을 떠올리는지 류보비는 물끄러미 날 올려다보더니, 곧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작년 여름에 초대해 주셨을 때 정말 좋았어요.”
“그때 재미있었죠. 후후.”
작년에 음반녹음 후 쓰러지고 나서 자체적으로 외출금지령을 내리고 친구들을 집에 초대했을 때, 그때의 기억은 언제 떠올려도 날 웃음 짓게 만드는 좋은 추억이었다.
류보비에게도 비슷한 느낌으로 남아 있는 것 같아서 무척 기뻤다.
그렇게 류보비와 함께 예전 이야기를 하던 도중, 난 그때와 지금이 상황이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계절도 완전히 다르고, 난 컨디션 조절도 잘 해서 외출금지를 할 이유가 없었지만, 녹음을 해내고 나서 당분간 여유가 있다는 건 같았다.
말이 나온 김에, 그렇다면 이렇게 있을 것이 아니라 또 하나 준비를 해 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괜히 먼 미래를 볼 것이 아니라, 이번 겨울에도 한 번 초대할까요?”
“네?”
“당분간 바쁜 일은 없을 예정이니까…….”
다시 머릿속으로 스케줄을 떠올려봐도 일단 내년 신년 휴일까진 정말로 일이 없었다.
연말 연주회나 신년 연주회 같은 걸 참가했다면 지금 제일 바쁜 시기였겠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텔레비전을 보고 쉬면 되는 신년이 될 터였다.
그때 다른 사람들도 옆에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들었던 생각은 서서히 구체화되면서 공고해지기 시작했다. 난 조금 더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한 번 계획을 해 볼게요.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제, 제가 괜히 어리광 부리려고 해서……. 일부러 그러지 않으셔도 괜찮은데…….”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제가 놀고 싶어서요.”
적잖이 당황해하던 류보비는 내 말을 듣더니 다시 미소를 되찾았다. 어쨌거나 같이 놀고 싶다는 마음은 그녀나 나나 같은 것이다.
대충 계획을 잡아놓고 나니, 그 계획을 성공적으로 해내려면 일단 아직 남은 일 몇 개를 잘 해둬야겠단 걸 깨달았다.
“그러려면 오늘 일을 잘 해야겠네요.”
“오늘도 일이 있으세요?”
“예,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류보비는 내게 남은 일이 있다는 사실에 조금 걱정스러운 눈빛을 했지만, 난 싱긋 웃으며 그녀의 옆머리를 쓰다듬었다.
사실 음반 녹음 후에도 협조하기로 한 것들에 대해서 살짝 고민이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다 깔끔하게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단 자신감이 있었다.
***
학교에선 조금 일찍 하교했다.
그리고 미리 예약해 둔 뷰티숍에 가선 헤어 스타일링과 메이크업을 받고 옷도 갈아입었다.
모직 롱스커트에 부츠, 그리고 퍼코트다. 특별히 튀지 않지만 언제든 사진이 찍혀도 괜찮을 사복이었다.
교복은 아무래도 유니폼이란 특수성에 초점이 가기 마련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이번엔 연주회 등의 특수한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정말 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이었으니.
준비를 마치고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
그곳은 한 학교의 음악실이었다.
이미 학생들은 모두 집에 가고 없고, 고즈넉한 분위기의 음악실엔 피아노가 한 대, 그리고 그 중앙에 테이블과 의자, 카메라 등이 세팅되어 있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가 오셨습니다.”
“촬영 준비 들어가겠습니다.”
날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내게 인사를 하기도 하고, 저마다 사인을 보내면서 무언가 분주하게 준비하기 시작했다.
구석에 있던 의자에 앉아 있던 한 남자는 벌떡 일어서더니 내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이렇게 다시 뵙는군요. 오랜만입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그렇네요. 라시드. 반가워요.”
이즈베스티야의 기자인 라시드는 얼마 전 가을 연주회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당시엔 꽤 당황했었지만 나중엔 좋은 인상으로 그와 인터뷰도 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번엔 내 측에서의 요청이다.
표트르는 음반 판매 계획을 크게 설정하면서 내게도 최소한의 협력을 요청했고, 난 그것에 응했다. 이러한 신문사와의 인터뷰는 그 일환이었다.
가볍게 악수와 인사를 나누고 나서 코트를 벗어들자, 누군가가 대신 받아주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라시드는 준비된 자리로 날 안내했다.
“…….”
자리가 특별히 불편하거나 카메라가 신경 쓰이지도, 조명이 따갑지도 않은 딱 알맞은 자리였다. 인터뷰이를 위해 특별히 마련해 두었다는 느낌이 든다.
내가 조용히 자리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라시드도 내 맞은편에 앉았다. 오늘의 인터뷰어 역시 그가 맡는 것 같다.
사진과 영상 그리고 녹취 등에 대해서 사전 동의를 받은 뒤 그가 싱긋 웃었다.
“얼마 전 일이 기억나는군요. 그때 따로 말씀드리진 않았지만 분명 언젠가 이렇게 뵙게 될 것이라 예감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이 이렇게 빨리 오게 될 줄은 몰랐군요.”
몇 달도 지나지 않아서 같은 사람과 인터뷰를 하는 건 사실 평범한 일은 아니니까, 나나 라시드나 조금 어색한 기분을 느끼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런 건 다 상관없다는 듯 라시드가 조금 텐션을 올리며 말했다.
“당신의 팬이 되길 잘 했습니다. 정말로. 요 근래 얼마나 주목받고 계신지 알고 계십니까?”
“아하하, 그런가요……? 팬이라 해 주셔서 감사해요.”
라시드는 정말 진지하다는 듯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공로 예술가 훈장을 받으셨을 때도 뵈었어야 했는데 말이죠. 하필 다른 기자가 현장에 갔었던지라……. 지금도 애석하군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가 갔어야 했는데.”
“말씀만으로도 감사해요. 아, 그리고 저도 감사드릴 일이 있죠.”
“타티아나 유리예브나가 제게?”
“예, 그때 믿고 맡겨달라 하셨던 일들을 잘 해주셨잖아요?”
한창 에르네스트에 대한 추측성 기사들이 언론을 타던 시기였고 이즈베스티야 역시 그런 기사들을 여럿 내보내고 있었다.
난 그것에 대해 기자인 라시드에게 따끔하게 한마디 했다. 그리고 그는 정정시키겠다며 내게 약속했고 그것을 빠르게 지켜주었다.
틀린 사실에 대한 정정보도일 뿐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건 충분히 내가 고마워할 이유가 된다.
내가 그것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표시하자 라시드는 꽤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보더니 곧 크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서로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것만큼 이상적인 관계는 없다.
라시드는 곧 웃음을 멈추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카메라 등의 준비 상태를 확인한 그는 이윽고 낮게 이야기했다.
“자, 그럼 이제 그냥 이야기나 조금 해 볼까요?”
“후후, 그래요.”
그와 나는 딱히 인터뷰나 취재 같은 단어를 쓰지 않는다.
이야기라는 단어로 시작되어 자연스럽게 이어질 뿐이다. 난 기분 좋게 웃으며 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