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3화
내가 이전에 성공시킨 가을 연주회와 이번 음반은 라시드에겐 연달아 굉장히 충격적인 일이었던 것 같다.
그의 태도는 조금 더 적극적이고 협조적으로 변했다.
“더 계획하시고 있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
단순히 믿고 신뢰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는 마치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무조건적으로 다 들어줄 것처럼 눈을 빛내고 있었다.
이즈베스티야의 기자가 전적으로 내 편이 되어준다면 그건 정말 좋은 일이겠지만…… 그 눈빛은 약간 광신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조금 부담스럽다.
이 아저씨 아무래도 너무 환상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번엔 이 정도 관심에 부담스러워하면 안 된다.
난 데뷔 음반에 확실하게 갖은 준비를 쏟아부으면서 이목을 끌려고 하고 있었으니까. 앞으로도 익숙해져야 할 일이다.
그렇게 연주자로서 이목을 끌고, 이어 콩쿠르까지 최선의 결과를 내는 것은 내년에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활동이 되겠지.
에르네스트와 여러 이야기를 나누면서 난 내년엔 그렇게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기로 결정했다.
내 음악은 에르네스트의 부재를 갈음하며 동시에 세상을 한 바퀴 돌면서 그가 치료에 전념할 수 있게 하는 에너지가 될 터였다.
확고한 결정을 다시 돌아보며, 난 일단 라시드에게 다시 한번 인터뷰 내용에 대하여 확실하게 약조받았다.
“음반 내용에 대해선 최소화하여 나갈 겁니다. 절대 문제 생기지 않을 것이라 약속드리죠. 편집장에게 알리긴 해야겠지만 이 내용이라면 먼저 엠바고를 제안해도 될 수준이니까요.”
“그럴까요?”
“네. 그러니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는 생각만 해도 즐겁다는 듯 낮게 웃었다. 이 정도로 확실하게 이야기해 준다면 믿고 맡겨도 될 것 같았다.
그 뒤로도 우리는 잠시 더 인터뷰를 나누었다.
음반에 대한 내용 대신 내가 이 음반에 걸고 있는 여러 추상적인 의지나 각오 등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런 내용도 마음에 든다며 라시드는 한참이나 웃어댔다.
마지막으로 청중들에게 인사를 남기고 나니 인터뷰 시간도 끝났다. 엄청나게 오래 시간이 지난 줄 알았는데, 1시간 정도 흘러 있었다.
라시드는 손에 쥔 서류들을 탁탁 쳐서 정리하며 말했다.
“자, 수고 많으셨습니다. 여기까지 하죠.”
“고생하셨어요.”
“하하하, 정말 흥미롭고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경쾌하게 인사말을 건넨 그는 일어나선 내게 다가와 악수를 건넸다. 만났을 때 나누었던 것처럼 난 그의 손을 다시 맞잡았다.
이번엔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힘이 조금 더 강했다. 그가 내게 얼마나 기대를 걸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물끄러미 올려다보니 그 역시 가만히 날 내려다보다가 씩 웃고는 손을 놓아주었다.
“돌아가시는 교통편은? 어떻게 하십니까?”
“차량이 있어요.”
“아, 그럼…… 알겠습니다. 이곳의 마무리 정리는 신경 쓰지 마시고 그럼 조심해서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예, 고마워요. 라시드.”
“별말씀을.”
난 라시드에게 눈인사를 건네고는 마지막으로 카메라와 조명, 마이크 등을 맡은 스태프분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 모두 내게 별다른 말을 걸어오거나 하진 않았지만, 날 보는 시선에선 역시 묵직한 기대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모든 것을 마치고 학교 밖으로 나왔다.
아까까지만 해도 날씨가 좋았었는데, 또다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반쯤 엉망이 되어 있던 눈밭 위로 다시 하얀색이 덧씌워진다.
“…….”
그 눈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해야 할 일을 떠올린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 타티아나.
“예, 프로듀서. 다름이 아니라, 방금 이즈베스티야와 인터뷰가 끝났어요.”
- 아, 그렇습니까?
이 음반 프로젝트는 내가 음악을 제공하긴 했지만 총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내가 아니라 마카로프 프로듀서였다.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올해 안에 음반을 낸다는 목표로 그는 제작을 비롯한 모든 것들을 도맡아 추진하고 있었다.
그나마 홍보 부분을 표트르가 나누어 가져가서 다행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그에게 알려주어야 할 일이 있다면 재깍 보고하는 편이 나았다. 그래야 만약 내가 잘못했어도 그가 도와줄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전화하자마자 프로듀서는 내게 생길 수 있을 문제를 바로 짚어냈다.
- 곡들에 대해선 어떻게 넘어갔습니까?
그걸 예상했으면 미리 말해주지 그랬냐는 말이 나올 뻔했다. 하지만 그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가 내가 인터뷰를 끝냈단 말에 떠올린 것 같았다.
난 시원하게 말해버렸다.
“못 넘어갔죠. 그냥 다 이야기해버렸어요.”
- 푸하하하,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그 부분에 대해서 미리 이야기를 해 볼 걸 그랬습니다.
“조금 당황했지 뭐예요. 제가 이렇게 생각이 짧았나 하고.”
- 애초에 인터뷰 자체가 표트르가 갑자기 가져온 것이지 않습니까?
프로듀서는 껄껄 웃었다.
사실 그렇게 웃을 일이 아니다.
그와 내가 함께 기획한 프로젝트가 마침표를 찍기 전에 김이 새어버리는 일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웃는 그가 잘 이해가지 않았지만, 한편으론 이런저런 경력과 노하우가 많은 그로서는 이 정도는 별 트러블도 아니라 생각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난 경험도 일천하고 어리지만 어떻게든 잘 해냈다는 것을 그에게 이야기했다.
“그래도 걱정하진 마세요. 곡을 밝히지 않고 홍보하는 것으로 합의가 끝났으니.”
- ……예? 거기까지 이미 끝냈습니까?
“제가 매듭을 지어야죠.”
- 허, 전 표트르를 통해 따로 요청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타티아나가 잘 해결을 해주었군요.
역시 뭐가 어떻게 되든 간에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겐 생각이 다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프로듀서는 한바탕 웃는 것으로 이 일에선 신경 쓰지 않을 것임을 알렸다.
노련한 그가 보기엔 아마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보단 의심하거나 다시 한번 확인할 만도 한데, 내가 해 놓았다면 뭐든 괜찮으리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실 오늘 라시드만큼이나 프로듀서도 날 굉장히 신뢰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내 스스로를 믿는 것보다 더더욱.
그런 믿음이 있기에 사실 나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기분 좋게 웃던 프로듀서는 작게 숨을 내쉬더니 무언가를 툭툭 치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 가끔 일하다보면 음악 외적인 부분에서도 참 컨트롤이 쉽지 않은 연주자들이 많은데…… 그런 면에서도 타티아나는 책임감 있게 처리해내는군요.
노련하단 말인즉슨 여러 위기도 겪어왔다는 말이리라. 그의 목소리에선 진득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난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짤막하게 감사를 표했다.
“칭찬 감사합니다.”
- 다들 타티아나만 같았으면 걱정할 일이 없…….
뭔가 더 이어 말하려던 프로듀서는 자신의 말이 온전히 내게 칭찬이 되지 않는다는 걸 느꼈는지 헛기침을 했다.
- 크흠, 괜한 소리는 하지 않겠습니다. 제 진행사항이나 보고드리죠.
그리고 그는 지금 음반 제작이 어느 과정에 있는지 이야기해주었다.
마스터링 과정에서 표트르와 다시 의견을 나누어 정밀하게 교정을 마쳤고, 음반 디자인 등도 마무리되었다.
빠듯하게 생산을 마쳐야 올해 안에 음반매장에 진열이 가능할 테니 요즘은 거의 밤낮없이 내 음반에 매달려있다고 한다.
건강도 챙겨가면서 하셨으면 좋겠다고 전했으나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간단하게 이야기할 뿐이었다.
- 타티아나도 밤새워 만든 음악이지 않습니까? 저 역시 최선을 다해야겠죠.
“…….”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정말로 보람을 느끼지 않는다면 나올 수 없는 소리라는 것이 느껴진다.
지금 당장 다시 일하러 가고 싶다는 듯 그가 이어 말했다.
- 올해 마지막을 이렇게 불태우게 되어서 기분이 좋군요.
“저도 프로듀서와 함께 일할 수 있어서 기뻐요.”
-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나보다 한참이나 선배라 할 수 있는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정말 부끄럽기도 했으나, 어쩔 줄 몰라 어휘들을 잃어버린 머릿속에선 거대한 고양감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
아침 교실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1년이 끝나간다는 것에 대한 들뜬 모습과, 온갖 과제들과 기말고사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에 대한 공포 등이 섞인 기묘한 느낌이었다.
그 한복판에서 내가 음반 제작까지 했다는 것을 다른 반 친구들에게 이야기했다간 정말 인간이 아닌 괴물 같은 것으로 인식될지도 모른다.
가급적 그런 것은 피하고 싶었다.
때문에 내가 음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건 가까운 친구들 몇뿐이었는데, 지금 교실에 있는 건 에르네스트였다.
그래서 난 그와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제 홍보 인터뷰를 마치고 왔단 말에 그가 웃었다.
“나도 기대하고 있어.”
“정말인가요?”
“그래, 마음 같아선 일찍 달라고 하고 싶은데.”
“아하하, 저도 아직 못 받아봐서요.”
“그럼 됐고.”
정말로 필요하다면 마카로프 프로듀서를 졸라 몇 장 정도 미리 받아볼 수 있겠지만, 그건 당사자인 나도 천천히 기다려서 때가 되었을 때 받아보고 싶었다.
에르네스트 역시 비슷한 마음인 것 같았다.
그는 허리를 쭉 펴면서 목을 좌우로 까딱였다.
“아무튼 좋은 일들이 많네.”
그렇지 않냐는 듯 그가 빙그레 웃으며 날 돌아보았다.
올해의 음악은 남기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던 내가 본격적으로 데뷔 음반을 내게 된 것을 그는 전부 잘된 일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난 바로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여전히 내 눈엔 그의 팔이 들어오기 때문이었다.
그에겐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래도 티가 났는지 에르네스트가 문득 말했다.
“나도 좋은 일 하나 말해줄까.”
“무엇인가요?”
“내일은 이거 풀고 오려고.”
그러면서 그는 왼팔을 툭툭 쳤다. 난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진다.
“어…… 정말요??”
“그래, 조만간 풀 거라고 했었잖아?”
“괜찮으신 건가요?”
깜짝 놀라 묻자 에르네스트는 당장이라도 벗어던지고 싶다는 듯 어깨를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어제 풀고 검사했었는데 괜찮더라고. 사실 오늘 풀고 오려고 했었는데, 하루만 더 차 보자고 해서 그냥 차고 왔어.”
“와…… 와!”
하마터면 축하한다고 소리 지를 뻔했다.
하지만 그것보단 정말 내일 깁스를 풀고 왔을 때 반 친구들로부터 제대로 축하받는 편이 나았다.
내 음반이 나오기 전까지 그 내용에 대해선 라시드가 지켜주기로 한 것처럼, 나 역시 에르네스트가 정말 좋아진 모습으로 학교에 오기 전까진 말을 아끼기로 했다.
그래도 환희에 찬 흥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난 조금 더 그에게 얼굴을 가까이하며 낮고 빠르게 말했다.
“이대론 안 되겠어요…… 저기, 내일은 오후 일정 어떠하신가요? 파티라도 해야…….”
빠르게 그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떠올리고 있는데, 에르네스트는 조용히 되물었다.
“갑자기 무슨 파티야?”
“갑자기가 아니에요. 깁스를 풀게 되시는데 그게 어떻게 갑자기인가요?”
난 평소 파티에 그리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반드시 축하해야 할 일이라 생각한다. 이만큼 연말에 어울리는 일이 없다.
아예 이렇게 된 이상 스터디룸에서 간소하게 할 것이 아니라 대대적으로 우리 집에서 할까 보다. 류보비와 했던 이야기도 있었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에르네스트는 내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듯 차분한 태도로 말했다.
“그렇게 말해주는 건 고맙지만 난 그냥 깁스를 푼 것 가지고 파티까지 하는 건 조금 창피한데.”
“그, 그런가요……?”
난 조금 당황했다.
그제야 상황이 조금 객관적으로 눈에 들어온다.
그가 깁스를 풀었다고 해서 바로 연주자로서 복귀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여전히 그는 부상자였고 기나긴 재활을 필요로 한다.
완치라도 된 마냥 파티까지 여는 건 그리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치료에 뚜렷한 진전이 보인다는 것만으로도 기쁘지만, 그것도 단적인 내 입장일 뿐이고…….
너무 기쁜 나머지 파티를 입에 담은 것이 혹시 실수가 된 걸까 싶어 조심스레 살피니, 그는 가볍게 웃으며 다른 대안을 내놓았다.
“그런 것보단…… 휴양 겸 조용히 여행 같은 걸 갔다 오는 건 어때?”
“……여행이요?”
이제 또 치료에 한 발자국을 내디딘 것이니까 떠들썩하지 않게 그냥 쉬는 것이 중요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를 혼자 보내는 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그 역시 내가 함께 가 주었으면 하는 듯 보였다.
이번에 음반을 녹음한 내게도 휴양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걸까.
약간 혼란스럽기도 하고, 일단 이야기 자체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들어보기로 했다.
“어…… 어디로요?”
“글……쎄? 따뜻한 곳이 좋지 않겠어?”
“……?”
가까운 교외가 아니라 멀리?
이 한겨울에 따뜻한 곳이라면 남부나 해외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주말에 잠깐 근처에 갔다 오늘 것 정도를 생각했던 난 그렇게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조금 진지하게 고민해봐야만 했다.
물론 전용기를 빌린다면 어디든 못 갈 것이 없었지만, 그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파티나 여행 등을 떠올리는 내 머릿속이 아직도 너무 분별없이 들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난 천천히 기분을 가라앉히며 정리하고, 이번엔 충분히 생각을 마친 후 입을 열었다.
“음…… 에르네스트.”
“응.”
“저도 조용히 쉬는 것에 대해선 찬성이에요. 하지만 제가 파티 이야기를 꺼낸 건 이럴 때 다 같이 모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
차분하게 내 의견을 전하자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내 의견에 동조했다.
“나도 모이는 건 찬성이야. 굳이 내 깁스 푼 걸 주제로 할 필요 없다는 거지.”
“?”
“왜?”
그제야 난 심각한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간신히 가라앉혔던 기분이 다시 두서없이 날뛰기 시작했다. 아까와 달리 이번엔 너무 창피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잘 모를 상태에서 입이 멋대로 떠든다.
“아, 그……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다른 분들도 함께 해서 여행을 가고 싶으시단 거죠? 그렇죠?”
“그 이야기잖아. 아니야?”
“아뇨! 맞아요. 정확하게 그 이야기였어요.”
난 손가락을 그에게 향하며 못을 박듯 강력히 이야기했고, 에르네스트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이었지만 여행이라면 흥미가 있다는 듯 스마트폰을 꺼내선 이곳저곳 검색하기 시작했다.
절로 흘러나오는 한숨을 간신히 삼키면서 난 어깨를 늘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