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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924화 (924/1,277)

##  924화

사람은 당황한 기색을 들키고 싶지 않을 때면 말소리가 끊기는 걸 불안해하나 보다.

짧은 침묵이 있었을 뿐인데도 그가 혼자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난 일부러 말을 더 걸어서 집중을 빼앗아왔다.

“어쨌든…… 그런 이야기라면 되도록 한 번에 시간을 맞출 수 있도록 신년 연휴에 가는 게 좋겠네요. 일정을 길게 잡을 수도 있을 테고요.”

“그렇지? 내년은 연휴도 기니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다행히 에르네스트는 스마트폰에서 시선을 떼고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해주었다.

현실적인 고려에 초점이 가자 그게 더 중요하다고 느낀 모양이다.

우린 지금 조용한 휴양이란 것 자체에만 동의했을 뿐 세부적인 건 아무것도 맞춘 것이 없었다.

대화를 해가면서 하나하나 맞춰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조용히 간다고 해도 스터디룸에 오는 애들은 다 같이 갔으면 하지?”

“……그건 그렇죠.”

“비용은?”

“그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어요.”

다른 건 몰라도 그 부분에 대해선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우린 함께 노는 데에 드는 비용을 거의 더치페이로 내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가끔 예외는 분명히 존재했다.

좋은 일로 모임이나 파티를 주최하는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그럴 땐 참가원들이 신경 쓰지 않도록 하는 것이 호스트의 의무였다.

난 그런 의미에서 이번 여행 역시 다른 친구들에게 비용 문제는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그냥 물러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는 마치 정해진 일인 것처럼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아니야, 그건 내가 낼게.”

“예? 파티 이야기를 한 건 저예요.”

“그보다 더 비용이 많이 들 만한 계획을 꺼낸 게 나잖아.”

“파티도 어차피 비슷하게 들어갔을 거예요.”

“……뭘 하려고 했던 건데?”

사실 규모에 대해 생각해둔 바는 없었지만…… 난 가지고 있는 저금도 꽤 있었고 음반 판매 대금으로 들어올 금액도 있었다.

이럴 때 쓰지 않으면 이 돈들을 어디에 쓴단 말야?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맡는 쪽이 제일 깔끔했다.

여행 내용도 간단하게 정할 수 있었다. 내 음반 데뷔 기념, 그리고 에르네스트의 재활 기념이다. 그것이면 명분은 충분했다.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난 재차 주장했다.

“뭐든 간에 이야기 먼저 꺼낸 제가 호스트예요. 그러니 제가 알아서 하겠어요.”

“그럼 반씩 하는 건 어때?”

“반이요?”

“응. 네가 반, 내가 반.”

“…….”

그런데 끄덕도 하지 않을 것 같던 에르네스트가 반걸음 물러서주었다. 그는 이 정도만이라도 양보해 달라는 듯 내게 부탁조로 말했다.

“병원부터 시작해서 여행까지 가게 되면 난 갚아야 할 게 너무 많아. 이런 것이라도 하게 해 줘.”

“갚다뇨,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전…….”

난 그에게 정말로 절대 갚을 수 없는 짓을 저질러놓았다. 때문에 돈을 쓰는 일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 이상을 말로 할 순 없었다. 그의 말마따나 앞으로 좋은 일들이 잔뜩 있을 텐데, 우울한 생각은 내 머릿속으로만 하는 것이 나았다.

괜히 입 밖으로 내어 그에게 내 우울함을 공유하는 건 그리 좋지 않은 일인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난 그의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요.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결국 비용이 든다면 반씩 부담하기로 하고 이어 이런저런 부분들을 챙기다 보니, 문득 둘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재미있게 느껴졌는지 에르네스트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이런 이야기 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여행 계획 세우는 기분이네.”

“그것도 그렇네요.”

나 역시 그와 마주보고 앉아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 즐거웠다.

아직도 일정이나 장소는 정해지지 않은 단편적인 이야기들뿐이었지만, 적어도 미래의 한 지점으로 우리가 함께 향하고 있다는 것이 기쁘다.

그것이 그리 멀지 않은 가까운 미래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두서없는 여행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 아침부터 가방을 놔두곤 자리에 없던 아나스타샤가 다시 돌아왔다.

“상담도 지긋지긋한…… 어라, 타티아나.”

“좋은 아침이에요 아나스타샤.”

손을 흔들며 인사하자 아나스타샤 역시 방긋 웃더니 내 옆 책상에 걸터앉았다.

“언제 왔니? 나 선생님 보러 잠깐 갔다 온 건데.”

“그사이에 왔나봐요.”

“아하하, 그러게. 이야기하고 있었어?”

“예, 음…….”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어디에서부터 꺼내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

에르네스트가 내일 깁스를 풀 예정이라는 것부터인가? 그 이야기를 듣고 내가 파티를 하자고 한 순서였으니까 그녀에게 설명하려면 그렇게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잠깐 생각하는 나 대신 에르네스트가 빠르게 나서서 그녀에게 물었다.

“아나스타샤, 너 연휴 때 뭐 할 거야.”

“연휴? 신년 연휴 말이니?”

“그래.”

“글쎄…… 몰라? 왜?”

“별일 없으면 여행이나 가자고.”

아주 간단명료한 제안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아나스타샤의 반응 역시 신속하고 단순했다.

“내가 너랑? 왜??”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묻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에르네스트는 인상을 팍 썼다. 서로 어이없어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곧 에르네스트가 먼저 진정하고는 설명했다.

“……둘이서 가자는 게 아니라, 스터디룸에 오는 애들 다 같이. 겨울 휴양 삼아서.”

“아, 난 또.”

“난 네가 그런 착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 가.”

“네가 말을 이상하게 했잖니?”

또다시 한바탕 하는가 싶더니, 아나스타샤가 먼저 장난을 그만두었다. 그녀는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타티아나도 가는 것 같고, 그럼 나도 갈래.”

“잘 생각하셨어요.”

그렇게 우리 계획은 차근차근 쌓아올려지기 시작했다.

물론 한창 바쁠 시기에 놀 계획부터 잡는 것 같단 죄책감이 조금은 든다.

아직 기말고사가 끝난 것도, 음반이 나온 것도 아니고 에르네스트가 깁스를 푼 것도 아니었으니까. 우리 앞에 산재해 있는 숙제들은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함께 희망적인 미래를 그려볼 수 있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었다.

***

의사는 에르네스트의 팔꿈치 부근을 촉진하며 물었다.

“느낌은 어떻습니까?”

“어제 검사했을 때랑 비슷해요. 저리고…… 먹먹하네요. 아프기도 하고.”

“어떨 때 통증이 옵니까? 제가 움직여 볼 테니 특정 각도에서 통증이 느껴질 때 말씀해주시죠.”

그러면서 의사는 에르네스트의 팔을 이리저리 움직였고, 에르네스트는 따끔한 통증이 느껴질 때마다 의사에게 전했다.

“흠…….”

“…….”

그렇게 팔의 상태를 확인하는 사이 에르네스트 역시 스스로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물론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에르네스트는 지금 자신의 왼손이 이전의 10% 기능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바로 느낄 수 있었다.

피아노는커녕 일상생활에도 지장이 있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예상했던 바다. 에르네스트는 아무 말 없이 의사가 검사를 마치길 기다렸다.

“풉시다.”

이제 다시 깁스를 찰 일은 없다.

의사는 에르네스트의 팔을 놓아주고는 차트 위에 무언가를 표시하며 말했다.

“정상적인 범주입니다. 지금 느껴지는 통증과 움직임의 제약 등은 재활로 극복하셔야 하는 부분입니다.”

생각보다 끔찍한 1년이 될 것 같다. 하지만 수술이 잘못되었음을 전해 듣는 것보단 나았다.

긍정적으로 마음을 먹기로 하고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가 이어 말했다.

“그 과정이 쉽고 편할 것이라 하진 않겠습니다.”

그간 에르네스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온 의사는 괜한 빈말 같은 것을 하지 않았다. 딱딱한 목소리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전할 뿐이다.

에르네스트 역시 따뜻한 말 같은 건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최대한 빠르게 치료받은 팔을 되돌려서 피아니스트로서 복귀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여전히 팔이 저릿하고 손끝까지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섬뜩한 기분이 계속해서 턱 밑을 맴돌고 있지만, 에르네스트는 가뿐히 무시하며 일부러 쾌활하게 말했다.

“지금 벌써 어려울 것 같단 느낌이 드는군요.”

“일단…… 당장 필요한 재활 방법을 몇 가지 가르쳐드리죠. 자, 받으세요.”

그리고 의사는 넓은 고무밴드를 에르네스트에게 쥐여주고 몇 가지 동작을 해 보였다. 기초적인 팔꿈치 재활 훈련법이었다.

하지만 동작이 기초적일 뿐 에르네스트가 곧바로 따라하는 데엔 무리가 따랐다. 단순히 손목을 몇 번 당기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억지로 힘을 주려고 하니 무시무시한 통증과 저릿거림이 느껴졌다.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전신에 힘이 들어간다. 도무지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거기에 동반하여 유연성을 되찾는 데에 필요한 스트레칭 동작도 몇 가지 배울 수 있었다.

의사는 에르네스트가 피아니스트로서 복귀하는 데에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주고 있었다. .

에르네스트는 배운 것들을 다시 반복하며 체득한 뒤, 의사에게 물었다.

“이 방법들이랑…… 피아노를 치는 건 어떨까요?”

“너무 격렬하게만 않게 친다면 그것도 재활이 되겠죠. 하지만 아마 쉽진 않을 겁니다. 되도록 제가 알려드리는 것들 위주로 천천히 해나가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결국 권하지는 않는다는 대답이었다.

살짝 실망스럽긴 했지만, 의학적인 검증이 되어 있는 동작들을 먼저 기초적으로 잘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건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의사 역시 굳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열심히 해 주신다면 분명 완전히 회복할 수 있을 거라 약속드리겠습니다.”

“열심히 해야죠.”

짤막하게 대답한 에르네스트는 피식 웃으며 저릿거리는 왼팔을 들어올렸다.

“어쨌든 간에 다 풀어버리니까 시원해서 좋군요. 코트에 팔을 꿰기도 쉽고.”

“다행입니다.”

의사는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짧게 이야기했다.

이제 직접적인 치료는 필요가 없으니 더 있을 이유도 없었다.

다른 기본적인 주의사항 등에 대해 몇 가지 더 설명을 듣고, 에르네스트는 진료실에서 나와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

옆의 거울을 보며 에르네스트는 천천히 팔을 움직여보았다.

깁스를 차고 있던 이전보단 분명히 낫다.

처음부터 멀쩡할 일은 절대 없을 거란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울한 기분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그대로 집으로 가지 말고 잠깐 연습실에 들릴까 생각도 했었지만, 지금 이대로 피아노 앞에 앉아봐야 우울함만 더 심해질 것 같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에르네스트는 병원을 나섰다. 이대로 그냥 정처없이 걷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의 앞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단정한 감색 코트에 얼룩 하나 없는 구두. 백금색 머리카락이 선명하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로비에서도 에르네스트는 정확하게 그녀를 찾아낼 수 있었다.

타티아나도 에르네스트를 발견하고는 싱긋 웃으며 손을 살짝 들어올렸다.

“정말 다 풀고 오셨네요.”

일단 깁스가 눈에 보이지 않으니 타티아나는 꽤나 안심한 듯 보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에르네스트 역시 침착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우울했던 기분도 어느샌가 싹 날아가버렸다.

다시 웃음기를 머금고 에르네스트가 물었다. 어쩐 일인지 모르겠다.

“내일 학교에서 보기로 했었던 것 아냐?”

“음…… 일찍 보고 싶어서요. 후후, 안 되나요?”

약간 겸연쩍은 듯 타티아나가 말했다.

그녀는 이전에도 병문안을 계속 와 주었다. 깁스를 푸는 날 와 준 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에르네스트는 그런 그녀에게 왼팔을 내밀었다.

“자.”

원한다면 만져봐도 좋았다. 아니, 그래야지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굉장히 조심스러운 태도로 되레 반걸음 뒤로 물러서기까지 했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이 에르네스트를 다치게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침엔 파티를 하자고 할 정도로 기뻐하긴 했지만, 그것도 한순간이었을 뿐이다.

아직 갈 길이 멀고, 자신이 만지면 또다시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것이 눈에 선하게 보였다.

그런 그녀가 안쓰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그 모든 걱정을 모두 없애주려면 한시라도 빨리 복귀해야겠단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에르네스트는 다시 왼팔에 힘을 주었다. 통증이 조금 줄어드는 기분이 든다.

“괜찮아 보이지?”

“아프시진 않으신가요?”

“별로.”

“…….”

타티아나는 여전히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에르네스트는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걱정하진 마. 오늘 재활 방법 배워왔으니까, 이제부터 시작할 거야.”

그 재활엔 반드시 그녀가 필요했다. 에르네스트는 혼자서 그 모든 것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타티아나는 에르네스트를 두고 가지 않는다.

지금 이렇게 찾아와서 마주보고 있는 것처럼, 언제라도 그녀는 등불처럼 에르네스트가 빛을 원할 때면 그 자리에 있어 줄 터였다.

그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에르네스트는 앞일들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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