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8화
인터뷰가 방송으로 나가고 나서 며칠 동안 난 그 반향을 느껴야만 했다.
여러 매스컴들은 내가 카메라 앞에 설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는지 수없이 만나자며 요청해 왔고, 친구들에게서도 메시지와 전화가 빗발쳤다.
그런 관심과 응원 등은 약간 부끄럽긴 하지만 꽤 기뻤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이 되었던 건 키릴이 직접 전달해 준 한 이메일이었다.
피아노를 전공하는 4학년 아이의 메일이었는데, 저번 학기 시험을 망치고 피아노에 대한 자신을 잃어 가는 중 내 인터뷰를 보고 다시 의욕을 얻었다는 내용이었다.
심지어 테크닉에 대해 잠깐 시연한 것을 본 것만으로도 자신의 슬럼프를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하는데, 내가 준 약간의 힌트가 다른 누군가에게 열쇠가 되어 주었다는 건 정말 가슴이 벅차오르는 일이었다.
“……흠.”
내가 피아노 연주자로서 활동하려는 이유는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도 같은 세계에 사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건 상당히 큰 동기였다.
덕분에 난 며칠간 기분 좋게 지냈다. 이 정도로 에너지가 넘치는 기분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 들뜬 에너지는 모두 피아노에 쏟아부었다.
“…….”
매스컴 이곳저곳에서 내 이름이 들리고 무언가 같이하자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밖으로 뛰쳐나가 사람들을 만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내 일상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
가끔은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을 보일 필요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아직 부족함을 여실히 느끼는 일개 피아노 연주자여야만 하는 까닭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난 연습실에 앉아 피아노를 마주하고 있다.
머릿속에 조금이라도 더 음악을 채워 넣고, 손을 어떻게 움직여야 정확하게 건반을 컨트롤할 수 있는지 시행착오를 거친다.
몇 번이고 반복하고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알 수 있게 된다. 내가 제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아가씨, 이것 드시면서 하세요.”
“고마워요.”
또 한 번의 연습을 마치고 잠시 악보를 읽고 있는데, 나제즈다가 간식거리와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난 의자에서 빙글 돌아선 그녀와 마주 앉았다.
아무 때나 들어와도 괜찮다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나제즈다는 음악이 멎고 나서야 들어온다.
문 앞에 서서 내 연습을 듣는 것도 그녀에겐 즐거운 일이라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것도 완성도가 어느 정도 갖춰져서 듣기에 괜찮은 곡들을 연습할 때의 이야기다. 지금 곡은 전혀 그렇지 않다.
나제즈다가 약간 궁금하다는 듯 물어 왔다.
“어떤 곡을 연습 중이세요? 밖에서 잠깐 듣는데 평범한 연습이 아닌 것 같길래.”
“평범한 연습이긴 한데요…… 중간에 툭툭 끊겨서 그런가요?”
“그것도 그렇고, 묘하게 박력도 넘치고요.”
난 웃으며 보면대에 올라가 있는 총보를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파이널 라운드에서 연주해야 할 협주곡이에요. 오케스트라 없이 피아노만 연주하니 조금 이상하게 들리죠? 후후.”
“아, 협주곡이군요! 그런데 파이널이라면…… 아가씨 자신 있으신 거네요?”
한눈에 봐도 복잡해 보이는 협주곡 총보를 보자마자 나제즈다는 모든 걸 다 알겠다는 듯 눈빛을 반짝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제일 중요한 곡을 연습하실 리가 없잖아요? 그렇죠?”
“꼭 그런 건 아니에요.”
“에이, 또 그러신다.”
“정말이에요.”
아마 그녀는 내가 예선도 준결선도 모두 쉽게 통과하고 결선에 모든 걸 쏟아 낼 준비를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건 오해였다.
난 절대로 콩쿠르를 무시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번에 내가 참가하려는 건 전 세계의 천재들이 몰려드는 국제 콩쿠르다. 내가 잘난 척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하물며 예선과 준결선을 우습게 본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임했다간 벨기에에 가더라도 일주일 내로 다시 돌아와야 할 것이다.
교만한 사람처럼 보이는 건 사양이다. 난 여전히 믿어 의심치 않는 표정의 그녀에게 조곤조곤 설명했다.
“만약 다음 주에 합격 통보가 온다면 제게 남은 시간은 두 달 하고 보름 정도예요. 그 시간을 잘 활용해야죠.”
“어…… 그런데 어려운 곡부터 하세요?”
“예. 예선에서 연주해야 할 곡들을 마지막에 연습하는 게 낫잖아요?”
참가일이 다가왔을 때 가장 따끈따끈하게 연습한 곡들을 쥐고 무대에 올라가서 바로 선보이는 것이 보다 유리하다.
어차피 이 콩쿠르는 한 달이나 하기 때문에 협주곡은 지금 실컷 연습해서 완성해 둔 다음에 예선을 통과하고 나면 다시 돌이켜 연습해도 되는 것이다.
나제즈다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와, 전 생각도 못 했네요. 그냥 순서대로 연습하는 게 맞지 않나 하고…….”
“스케줄을 짜는 요령이에요.”
“아가씨는 그런 대회나 연주회도 많이 해 보셨으니…… 대단하세요.”
물론 나제즈다의 말처럼 에튀드류부터 준비해 놓은 다음에 협주곡을 연습하면서도 이전에 했던 것들을 유지하는 사람도 있고…… 그건 사람마다 전부 다르다.
그러니 내가 만드는 이런 연습 스케줄이 그리 특별하진 않다.
단지 어떤 곡을 얼마나 시간을 들여 완성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늠이 조금 더 정확하게 가능할 뿐이다.
“그보다는 나제즈다가 타 주는 차가 더 대단해요.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네요.”
“후후후.”
난 나제즈다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부분이 내 연습이나 콩쿠르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나제즈다가 전부 긍정적으로 이야기해 주니 기운이 났다.
차 한 잔을 다 마시고 나자 나제즈다는 간식만 조금 내려놓고는 일어섰다.
“이만 방해하지 않고 나가 볼게요. 연습 열심히 하세요. 아가씨.”
“고마워요, 나제즈다.”
다시 문이 닫히고 혼자가 되고 나서도 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적당히 기분 전환도 되었고, 조금만 더 쉬었다가 다시 연습을 재개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스마트폰을 잠깐 만지작거리고 있는 사이 메시지가 하나 날아왔다.
[혹시 시간 돼?]
그 메시지를 보자마자 곧장 화면을 눌러 전화를 걸었다.
“에르네스트?”
-안녕.
짧은 인사인데도 무척 반갑다.
난 메시지 내용을 받아 이어 말했다.
“시간이야 많죠. 방학이잖아요?”
-바쁘게 연습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해서.
“연습은 연습이고요.”
내가 하루에 연습을 열 시간씩 해도 그가 필요로 하면 전화를 받을 시간 정도는 있다.
그런데 에르네스트가 원하는 건 전화보다 조금 더 나간 것이었다.
-많이 바쁜 게 아니라면 잠깐 볼 수 있을까? 나 지금 너희 동네에 볼일이 있어서 와 있거든.
깜짝 놀란 난 고개를 들고 창밖을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이요?”
-응.
루블레스카는 모스크바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평소에 편하게 오거나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근처에 온 김에 차라도 한 잔 마시자는 것 같다.
-안 될까?
난 이미 의자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이미 차를 마시긴 했지만 그게 에르네스트를 만나지 못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 아무래도 연습은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다.
“되죠. 지금 나갈게요. 어디 계세요?”
-지금 근처에 있는 카페…… 메시지로 보내 줄게.
전화를 끊자마자 난 방으로 향했다.
에르네스트는 그냥 얼굴만 잠깐 보자는 듯 이야기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대로 나갈 수는 없었다.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바쁘게 준비를 하면서 난 그와 할 만한 이야기 등을 떠올렸다.
분명 저번에 헤어질 땐 다음 주에 학교에서 보자고 했으니까…… 방학 동안 하는 연습이나 작업 등의 이야기를 하진 않을 테지.
그렇다고 에르네스트가 요즘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이야기를 하길 좋아하는가 하면 그것도 전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그는 나보다도 더 그런 부분에서 관심이 없고 무덤덤한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많은 유명세를 모으고 주목받아 왔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 같다.
뭔가 이유가 떠오를 듯 말 듯 한 기분을 느끼던 나는 마침내 해답을 찾아냈다.
“아, 그 곡.”
저번 달 내 생일에 그는 자신의 곡을 친필로 써서 헌정해 주었다.
난 그 친필 악보를 그대로 보관해 두었지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악보를 만지지 않고도 충분히 그 가치를 끌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주는 몇 번 해 봤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 내가 아무런 피드백도 하지 않았으니 에르네스트로선 궁금했으리라.
난 머리를 빗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 잘못이네…….’
그 정도 되는 곡을 헌정 받고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건 정말 큰 잘못이었다. 너무 미안했다.
하지만 나도 아무 이유 없이 그런 건 아니었다. 일단 깊이가 꽤 있는 곡이라서 만족할 만큼 퀄리티를 뽑아내려면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작곡가인 그 앞에서 얼토당토않은 연주나 감상을 내놓으면 얼마나 창피하겠는가?
심지어 헌정까지 받았으니 되도록 어느 정도 자신이 붙었을 때 그 앞에서 곡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콩쿠르를 대비하여 연습해야 할 곡들도 꽤 많아서……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만져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내게 유리하게 그런 모든 핑계들을 앞세운다 하더라도 감상을 기다리고 있을 사람을 먼저 생각했어야 했다.
저번에 그에게 음반을 주었을 때 반대로 내가 기다리면서 애태웠던 기억을 하니 얼마나 잘못했는지 실감이 난다.
“지금이라도 해야지.”
준비를 마친 나는 곧장 에르네스트가 불러 준 카페로 가는 대신 다시 연습실로 향했다.
그러고는 태블릿 컴퓨터로 악보를 불러내고 녹음을 시작했다.
아직 정확하게 다 외우진 못했기 때문에 악보를 보고 연주해야만 했고, 미흡한 부분도 너무 많았지만 최대한 집중해서 완주해 냈다.
작곡가에게 들려주기엔 조금 창피한 수준이다. 그래도 아무것도 없이 빈손으로 가서 사과하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았다.
“…….”
그렇게 준비도 급하게 하고 녹음도 챙긴 후 나는 루블레스카 시내로 나왔다.
에르네스트가 부른 곳은 약간 외진 곳에 있는 고급 카페였다. 분위기는 근사했는데 사람은 별로 없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길 얼마 걸리지 않아 에르네스트를 찾아낼 수 있었다.
마침 이쪽을 보고 있던 에르네스트도 손을 슬쩍 들어 보이며 날 불렀다.
“여기야.”
에르네스트는 편안해 보이는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난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녹음까지 하느라 10분 정도 더 늦어 버렸다.
“오래 기다리셨죠?”
“아니, 나도 돌아다니다가 방금 들어왔어. 마실 건…… 허브티로?”
“그럴까요?”
웨이터가 다가오자 에르네스트는 내 것까지 함께 주문해 주었다. 난 그런 그를 바라보면서 웃었다.
에르네스트는 눈썹을 까딱이더니 물었다.
“왜 웃어?”
“그냥요. 웃으면 안 되나요?”
생일에 준 곡에 대한 피드백을 들려주지 않으니 궁금해져서 이렇게 부른 걸 보니까 조금 귀엽기도 하다. 미안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해서 내 쪽에서 다짜고짜 사과부터 하는 건 너무 무성의하다.
에르네스트가 아무 말 않고 이렇게 부른 건 날 괜히 압박하지 않으려는 걸 테니 나도 적당히 응할 필요가 있었다.
“저번에 오셨을 때 학교에서 보자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더 일찍 보게 되니 좋아서요.”
“……나도 이렇게 올 일이 생길 줄은 몰랐지.”
“후후, 어쨌든 간에요. 이렇게 불러 주시지 않았다면 아마 전 하루 종일 연습실에만 틀어박혀 있었을 거예요.”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난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하고 있기도 했고.
에르네스트는 피식 웃더니 말했다.
“나오는 거야 혼자서도 상관없잖아.”
“아시잖아요. 전 연습을 놓고 나올 수 있는 이유가 있어야지 나올 수 있어요.”
누가 강제로 잡아 두고 있는 건 아니니까 그건 내 성격이나 취향에 가까운 문제였다.
아무 목적이나 이유 없이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도 있다면, 반대로 그럴 수 없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물론 이유만 있다면 상관없지만.
“피아노보다 중요한 일이란 건 사실 그리 흔치 않거든요.”
“……?”
내 말에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반응을 보고 나서야 나도 모르게 대체 무슨 소리를 한 건지 뒤늦게 깨닫고는 빠르게 수습하려고 말을 마구 던져 덮었다.
“그, 그보다…… 오늘은 어떻게 보내셨나요?”
“뭐 별건 없었어.”
다행히 에르네스트는 별로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는지 태연하게 시계를 올려다보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뭘 했는지 되짚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