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989화 (989/1,277)

##  989화

에르네스트의 방학도 나와 크게 다르진 않았다. 재활과 작곡 공부 등이 그의 일과 전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가끔 레퍼런스 연구를 위해 음반 매장에 가거나 병원에 가는 것 정도가 특별한 일이었다.

“어제도 병원에서 그러더라고. 많이 좋아지고 있다고.”

“정말 다행이에요.”

“작곡도 요즘 좀 괜찮은 것 같고…….”

난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어쨌건 그나 나나 음악가로서 방학을 충실하게 보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까닭이다.

저번엔 다른 아이들이 많아서 미처 하지 못했던 개인 일과에 대한 이야기 등을 나누고 있자 아까 시켰던 음료들이 나왔다.

에르네스트는 시켰던 커피를 한 모금 머금더니 의자에 기대며 말했다.

“그 정도야.”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도 딱히 그에게 잘하고 있다느니 힘들지 않냐느니 하는 감상은 할 생각이 없었다.

지금 오가는 이 대화는 사실 서로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들이었으니까.

다만 내 뇌리엔 계속 그가 왜 날 불러냈을까에 대한 의문이 빙글빙글 맴도는 중이었다.

아마 이렇게 이야기를 하다 보면 툭 튀어나오겠지만 그게 언제쯤일지 모르겠다.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에르네스트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그리고 뭐 오늘은 여기 와서 일도 하나 하고…….”

“그것뿐인가요?”

“?”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시 생각했다. 내 물음에 진지하게 되돌아보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곧 평범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런데?”

“정말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이 정도면 적당히 무슨 말이든 해도 되는 분위기를 열어 준 것 같은데.

에르네스트는 도통 그걸 받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모르쇠인 건지, 아니면 진짜 이해를 못 하는 건지.

하지만 나도 이대로 그냥 넘어가기엔 아까 나오기 전에 녹음했던 것들이 있었다.

음악을 준비해 왔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는 건 내 성격상 불가능했다.

“무언가 저한테 원하는 것이 있으신 것 아닌가요?”

말하고 보니 너무 무턱대고 말한 감이 없잖아 있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 말하지 않는 한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정말로 난처한 눈빛을 했다.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당황스럽네. 난 그런 거 없어.”

“있을 것 같은데요?”

“없다니까. 내가 뭐 잘못했어?”

이번엔 내 쪽이 당혹스럽다. 지금 난 내가 잘못한 상황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불편한 침묵이 우리 사이를 감돌았다.

그는 내 눈치를 보며 무슨 의도인지 파악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고, 나는 나대로 그가 정말로 내게 아쉬워하는 게 없는지 궁금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행동에 나선 건 나였다. 미리 준비한 것이 있기도 했고.

“이거 한번 들어 봐 주시겠어요?”

“……뭔데?”

“연습해 본 거예요.”

어리둥절해하는 에르네스트에게 스마트폰을 건넸다. 바로 음악이 재생되도록 해 놓았더니 곧 한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카페 내부에 흐르는 잔잔한 음악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귀에 바짝 붙이면 들을 만하다.

에르네스트는 점점 더 내 스마트폰을 귀에 가까이 대고 듣더니 곧 이게 뭔지 알아차렸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이거…….”

“아직 잘 못 하죠?”

“그게 아니라…… 잠깐만. 이어폰 좀.”

괜히 미안해진 내가 변명조로 말했지만 에르네스트는 그런 게 문제가 아니라는 듯 빠르게 이어폰을 꺼냈다. 가지고 다니기 편한 블루투스 이어폰이었다.

기왕 듣는 것이니 조금 더 좋은 리시버를 써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내 녹음 품질도 엉망진창이니 차라리 이편이 낫다.

“…….”

그에게 곡을 받아서 연주한 건 처음이 아니지만, 그래도 작곡가에게 내 연주를 들려준다는 건 늘 긴장되는 일이다.

콩쿠르 무대에 서서 심사 위원들에게 평가를 받아도 이 정도는 아닐 것 같은 기분이다.

하지만 그만큼 연주자로서의 의지가 고양되는 부분도 있었다.

내가 주로 연주하는 곡들의 작곡가들은 이미 죽은 지 오래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야기를 나눌 수 없고, 모두 곡을 보거나 일생을 연구하며 예상하는 것이 전부다.

아무리 깊게 파고든다 하더라도 그게 결국 예상에 그친다는 건 어쩔 수 없는 한계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 살아 숨 쉬는 작곡가가 눈앞에 있다.

내가 원하면 대화도 할 수 있고, 내 음악을 들어 주기도 한다는 건 굉장히 특별한 일처럼 느껴진다.

그 무엇도 예상이 아니라 피부에 와닿는 현실이 되는 것이다.

‘오늘은 무언가 이야기해 주려나.’

난 솔직히 그와 곡을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자신의 음악에 말로 해석을 덧붙이는 일을 피하는 타입이었다.

여기서도 그의 완벽주의자적 면모가 드러난다.

앞서간 선배 작곡가들이 그러했듯, 자신이 할 말은 악보에 다 써 놓았으니까 그것을 보고 예상해 내라는 태도다.

물론 그건 작곡가로서 꽤 훌륭한 태도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가 자신의 곡을 어떻게 연주해야 하는지 세세하게 레슨까지 하려 든다면 그건 조금 싫을 것 같으니까.

하지만 대중들에게 밝혀지지 않은 작곡가들의 비하인드 스토리 같은 것도 꽤 좋아하는 나로선 에르네스트의 이야기도 듣고 싶었다.

“…….”

난 찻잔을 입에 대면서 눈만 들어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은 에르네스트는 음악에 집중하려는지 책상 모서리의 어느 한 부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음악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에 대한 내 대답은 일단 그럭저럭 전해지고 있는 것 같다.

조금 더 다듬을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만약 부족하다면 그것대로 에르네스트가 지적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조금 있었다.

이윽고 녹음 재생이 끝나고, 에르네스트가 스마트폰을 도로 내게 돌려주며 말했다.

“잘 들었어.”

조금 놀랐다는 듯 웃으며 그가 손가락을 내밀었다.

“이거 얼마나 걸린 거야?”

“글쎄요……. 콩쿠르 곡들을 준비하느라 그렇게 많이 연구하진 못했어요.”

난 스케줄을 꽤 정확하게 짜고 연습하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곡에 얼마나 시간을 투자할지 측정하진 않는다.

대충 느낌상 한 달 사이 이 곡엔 스무 시간 정도 쓰지 않았을까 싶긴 한데…… 그런 걸 정확하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다.

아직 미완성이고, 앞으로 보다 더 잘할 수 있음을 잔뜩 어필하면서 난 이어 말했다.

“그래서 들려드리고 싶었어요. 작곡가의 의견은 어떨지 들어 보고 싶기도……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고요.”

“…….”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스마트폰으로 녹음한 걸 들려주고 의견을 묻는 건 너무 성의 없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지금은 이제 최선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별 고민도 않고 커피로 목을 축이며 말했다.

“이미 내 손을 떠난 곡이야. 이제 해석은 네 몫이지.”

너무 엄하신 거 아닌가요?

이런 대답이 돌아올 줄도 알았고, 그의 방침을 존중하지만…… 그래도 학교 연습실도 아니고 아무도 모르는 카페인데 나한테만 살짝 작곡가의 이야기를 해 주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나?

그에게 감상을 일찍 전하지 않아서 미안함을 느끼던 마음은 어느새 대답을 바라는 마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여기서 수긍하고 끝내면 정말 다를 바 없단 생각으로 난 일부러 더 뻔뻔하게 물었다.

“이게 제 나름의 해석이에요. 이참에 작곡가님께 짧은 코멘트라도 받아 보고 싶어서요.”

“뭐야 갑자기. 어색하게 그러지 마, 타티아나.”

“무엇이 어색하신가요? 작곡가님.”

아직은 반쯤 장난하는 기분이긴 한데, 에르네스트가 황당해하는 표정을 보니 맥이 쭉 빠진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오늘따라 왜 이러냐는 듯 볼 건 없잖아?

시무룩하게 바라보아도 에르네스트는 자기 입장을 굽히는 법이 없었다. 그는 담백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대로 가면 된다고 생각해. 이 이상 내가 해 줄 말은 없을 것 같은데.”

그럼 진짜로 내가 읽어 낸 그대로 완성해 버릴 뿐이다. 지금까지도 계속 그래 오긴 했지만.

결국 난 포기하고 찻잔을 들었다. 음악에 대한 그의 완고한 태도는 나보다도 더 심한 면이 있었다.

물론 그러니까 그가 어린 나이에도 저 정도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겠지만…….

그런데 혼자서 생각하던 와중, 난 이제야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 것인지 알아차렸다.

애초에 그냥 모든 것이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불현듯 스치고 지나갔다.

“에르네스트.”

“응.”

“오늘 이것 때문에 만나자고 하셨던 것 아닌가요?”

“……어?”

진짜로 당황하며 에르네스트는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닌데?”

“그럼 왜 보자고 하신 거예요?”

“그냥 그럼 안 돼?”

태연하게 이야기하는 그를 보니 할 말이 없었다. 그럼 아까 연습실에서 급히 녹음까지 했던 나는? 그냥 바보인 건가?

왜 그가 내 감상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음악가로서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어떠한 감정을 상정해 두고 있던 건 나뿐이었나?

뭔가 제대로 맞췄다고 생각했던 퍼즐이 완전히 틀린 기분이었다. 난 입술을 삐죽이며 찻잔만 연신 기울였다.

하지만 그건 그냥 보자고 하면 안 되냐고 되묻는 그에게 내 대답을 곧장 돌려주지 않기 위함이기도 했다.

***

2월 중순에 접어들어도 겨울은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겨울 방학이 끝나고 10학년 2학기가 시작되었음에도 첫날은 눈보라가 몰아쳐서 학교에 못 갔다.

강제적으로 모든 학생들이 방학을 이틀이나 더 보내게 되었다.

그렇게 개학하고 3일째 되는 날.

학교에 가니 선생님들도 학생들도 모두 분주했다. 개학식도 모두 생략이었고, 수업은 오늘부터 바로 시작한다는 안내가 잇따랐다.

눈보라로 학교가 쉬는 건 드물게 있는 일이긴 했지만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이렇게 이틀이나 쉬어 버린 건 처음이다.

때문에 여러 일정과 준비가 모두 망가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래도 최대한 정상적인 커리큘럼을 지키려고 애쓰는 선생님들에게 잘 협조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오전 수업을 정신없이 보내고, 간신히 한숨 돌리며 점심 식사를 한 뒤에는 미하일 선생님을 찾아갔다.

레슨은 없었지만 이번 학기 일정에 대해 상담하고 싶은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타티아나입니다.”

“들어오려무나.”

사무실 안에는 은은한 홍차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래. 방학 동안 잘 지냈고?”

“예. 연습도 정말 많이 했어요.”

“그랬구나. 자, 앉으렴.”

선생님은 나에게도 차를 권하며 앞자리에 앉으셨다.

방학 2주일 동안 보지 못했더니 무척 반가웠다. 선생님도 마찬가지인지 내 안부를 비롯해 여러 질문을 하셨다.

꼭 음악이 아니더라도 내게 궁금한 것이 많으신 것 같았다.

차 한 잔을 다 마실 정도의 시간 동안 선생님과 나는 웃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젠 조금 더 중요한 주제를 꺼내야 할 때였다.

“콩쿠르 준비로 힘들지는 않고? 협주곡을 먼저 연습하면서 필요한 것들이 있을 텐데.”

“음…… 아직까진 괜찮아요. 나중에 한 번쯤 봐 주셨으면 하지만…….”

“그래, 그거야 언제든지 봐 주마.”

“감사합니다.”

준비해야 할 곡이 많은 만큼 레슨도 충실히 받아야 했다. 때문에 그 레슨 일정에 대한 것도 정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모든 것이 확정이 나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DVD 예선 통과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도 없고?”

“그렇네요……. 이메일로 통보해 준다고 들어서 확인해 봤는데 아직이에요.”

“선정된 후보자들은 개별적으로 이메일을 보내고…… 홈페이지에도 올라오는데. 오늘 아침에 나도 봤는데 아직이더구나. 슬슬 올라올 때가 되었는데 말이지.”

발표일을 그리 의식하고 있진 않았지만, 학교에 와서 본격적으로 앞으로의 일을 이야기하려니 아직 불확실한 요소들이 남아 있다는 건 조금 불만이었다.

그래도 결국 그냥 기다리는 것 외엔 방법이 없겠구나 싶어서 협주곡에 대한 이야기나 더 하려던 차였다.

“앗, 잠시만요……! 죄송해요.”

“괜찮단다.”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왔다. 급히 양해를 구하고 스마트폰을 꺼내 보자 빅토르의 이름이 떠 있었다. 난 순간 무언가를 예감하며 차분히 전화를 받았다.

“빅토르?”

-아가씨. 학교에 계시는데 죄송하지만 급한 전화입니다. 벨기에에서 왔습니다.

“벨기에……?”

그렇게 중얼거리며 난 옆을 돌아보았다. 미하일 선생님은 그럴 줄 알았다면서 흐뭇하게 웃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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