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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072화 (1,072/1,277)

##  1072화

레아 샤르베는 아나스타샤가 머무는 샤르베가의 딸이었다.

어제 본 제라르 씨의 딸이 러시아어를 할 줄 안다고 들었었는데, 그게 바로 레아였던 것이다.

“너랑 쇼핑하러 갔다 오겠다고 했더니 아주머니가 안내 겸 심부름으로 레아와 같이 갔다 오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미리 말 못 했어.”

“갑자기 죄송해요.”

“후후, 괜찮아요.”

철저하게 아나스타샤와 단둘이 움직여야 하는 상황도 아니었고, 애초에 느긋하게 돌아다니면서 사야 할 것들을 살 생각이었으니 한 명쯤 더 같이 다녀도 상관없다.

게다가 비슷한 또래의 벨기에 사람인 레아가 있으면 아무래도 이것저것 들을 정보도 많을 것 같고.

“러시아어는 어떻게 배우신 건가요?”

“아, 대학교에서 제4 언어로 전공하고 있어요.”

“제4 언어요……?”

레아는 우리보다 네 살 많은 스물한 살로 10분 거리에 있는 브뤼셀 자유 대학교의 다국어학과 3학년이었다.

가까운 사람 중에 대학생이라면 루슬란 오빠나 일리야가 있긴 하지만, 이렇게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사는 대학생을 보니 느낌이 색달랐다.

그리고 브뤼셀 자유 대학교는 정말 특이한 학교이기도 했다.

“언어 때문에 학교를 나누어 놓았다고요……?”

“예. 브뤼셀 자유 대학교université libre de bruxelles와 브뤼셀 자유 대학교vrije universiteit brussel로요.”

브뤼셀 자유 대학교는 1834년 개교하여 2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대학교였다.

그런데 프랑스어를 쓰는 왈롱인과 네덜란드어를 쓰는 플란데런인의 갈등이 심하다 보니 아예 네덜란드어를 쓰는 쪽이 따로 분리되어 나왔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대학교라면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고 학문에 열중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나……? 그리고 브뤼셀은 이중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난 벨기에의 역사를 생각하며 이곳의 상황이 단순하지 않았음을 다시금 떠올렸다.

“신기하네요.”

벨기에는 유럽 연합 본부가 있는 곳이라 그런가 정말 많은 사람과 언어가 섞여 있는 곳이다.

때문에 전직 외교관으로 6개 언어를 하는 데보라 아주머니나 아예 다국어 학과 학생으로 4개 언어를 하는 레아 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동시에 언어 때문에 한 대학을 둘로 쪼갤 정도로 극단적인 부분이 있는 나라이기도 했다.

이 이중적인 모습은 직접 와서 보지 않고서는 느낄 수 없는 부분이었다.

대학교에 대해 이야기하던 레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막상 석박사 과정은 거의 영어로 수업한다고 하네요. 웃기죠?”

자기가 설명하면서도 납득이 잘 안 되는 모양이다.

난 레아에게 대학교 생활에 대해 조금 더 듣고 싶었지만, 그보다 레아 쪽에서 나나 아나스타샤에게 궁금한 것이 훨씬 많아 보였다.

단순히 연주자로서가 아니라 러시아어를 전공하는 학생으로서 말이다.

“그런데…… 저도 하나 물어봐도 돼요?”

“예, 뭔가요?”

“저기, 베르체노바라면…… 혹시 제가 아는 그 베르체노프 콘체른과 관계있는 것 맞나요?”

러시아어를 배우면 당연히 문화나 사회도 배우게 된다.

그렇게 공부하다 보면 베르체노프란 이름은 당연히 알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서 레아는 자연스레 날 연결한 것 같았다.

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아, 역시 그랬네요.”

레아는 놀란 듯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녀에게 난 어떻게 보이고 있을까. 아마 나보단 내가 타고 온 차나 경호원들이 더 먼저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이런 배경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쉽게 보여진다.

이 이상 내가 앞서 할 만한 이야기가 없어서 가만히 기다리자 아나스타샤가 살짝 대화의 흐름을 이어 주었다.

“네가 택시 타고 오진 않으리라 예상했지만, 이 차에 경호원까지 대동하고 있으니 놀랄 만도 했어.”

“예? 아뇨. 그게 아니라…… 그냥 타티아나 유리예브나를 보자마자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데 레아의 반응이 내 예상과는 살짝 달랐다. 그녀는 나라는 사람 자체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무슨 말인가 싶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레아는 살짝 고민하더니 조심스레 이야기했다.

“차에서 내리는데, 어쩐지 보통 사람이 아닐 것 같다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레아는 날 상당히 특별하게 보고 있었다.

피아노도 없이 그냥 봤을 뿐인데 이런 이야기를 듣는 건 처음이라서 나도 약간 당황했다.

그냥 봐서 특별하게 보이는 건 나보단 아나스타샤 쪽이 훨씬 더 강하다.

그녀야말로 어디에 가더라도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는 경향이 있었으니까.

아마 레아가 착각한 것이겠지 싶다. 이 차량과 경호원에 놀란 나머지 내게서도 그런 선입견을 느낀 것이다. 난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가 갑자기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그건 아직 이 애를 잘 몰라서 그래.”

“응?”

“조금만 있어 봐.”

마치 기대하라는 듯 눈웃음을 지으며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말하더니 날 바라보았다.

내가 또 무슨 바보 같은 짓을 하길 바라는 것 같은 눈빛이다. 난 정말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따졌다.

“……잠시만요, 아나스타샤. 뭘 조금만 있어 보란 건가요? 무슨 의미예요?”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그렇게 넘어갈 생각 마셔요.”

난 아나스타샤를 붙잡고 늘어졌고, 그녀는 대충 둘러대고 넘어가려고 딴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가 투덕거리고 있자 레아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두 사람 정말 친하신가 봐요.”

말씨름을 하던 우리는 순간 서로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친하냐는 물음에 내가 답할 말은 한 가지뿐이었다.

“제일 친하죠.”

“그런데 하나 더 궁금한 게 있어요. 그렇게 친한데 어떻게 같은 콩쿠르에 참가하기로 한 건가요? 같은 시즌에 쇼팽 콩쿠르도 열리고 있었잖아요?”

레아는 조곤조곤한 목소리와 달리 궁금한 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친한 나와 아나스타샤가 왜 같은 콩쿠르에서 경쟁자로 마주하려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아나스타샤가 대답했다.

“원래는 내가 쇼팽 콩쿠르에 나가려고 했었어. 그런데…… 나중에 마음을 바꿨지. 저 애랑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

“확인? 타티아나 유리예브나와?”

“응. 뭐…….”

그런데 날 따라 함께하기로 했었던 일을 이야기하던 아나스타샤는 말끝을 약간 흐리더니 끝까지 이야기하지는 않고 말을 휙 돌렸다.

레아에게 더 깊이 이야기해 줄 순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언제까지 그렇게 길게 부를 거야? 레아. 러시아에서 부칭까지 부르는 건 극존칭이거나 아예 처음 보는 사람을 부를 때 쓰는 거라고 내가 어제 말해 줬었잖아?”

“그치만…….”

레아는 날 베르체노바 양이라 부르진 않았지만 대신 아주 정중하게 불렀다.

나보다 나이도 많고 이미 아나스타샤와는 편하게 이야기하는 그녀와 나만 어색하고 싶진 않았다.

잘되었다고 생각한 나는 웃으며 제안했다.

“타티아나라고 불러 주세요.”

“응……. 알았어, 타티아나.”

“이렇게 친구가 되어서 기뻐요, 레아.”

같은 학교도 아니니 네 살 정도 차이는 괜찮으리라. 내가 일리야와 친구인 것처럼 레아와도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레아는 뭔가 이상한지 혼자서 잠시 고민하더니 얼른 아나스타샤를 향해 속삭였다.

“그런데 타티아나는 왜 여전히 경어인 것 같지……? 생각해 보니 아까 아나스타샤 너한테도 그렇게 말했던 것 같고.”

“저 애는 원래 그래.”

“?”

모든 사람에게 경어를 하는 내가 이상한지 레아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방긋 웃었다.

그리 문제 될 건 아니라 생각한 모양이다.

“그럼 먼저 어디로 갈 예정이야? 난 로지에역 옆에 있는 백화점에 가면 어떨까 하는데. 거기 가면 아마 필요한 건 거의 다 볼 수 있을걸?”

브뤼셀의 대학생답게 레아는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우린 그녀의 추천에 따르기로 했다.

브뤼셀의 중심가를 살짝 빙 둘러 우리는 로지에역 근처에 도착했다. 세련된 건물들이 잔뜩 있는 상업 중심지였다.

그 근처에서 우린 레아의 안내를 따랐다. 그녀가 안내한 곳은 갤러리아 인노라는 이름의 6층이나 되는 백화점이었다.

뭔가 척 봐도 명품 브랜드만 취급할 것 같은 곳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1층부터 뭔가 생필품을 살 곳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귀금속이나 가방이라면 모를까.

아마 레아는 우리가 이런 곳을 원하리라 생각한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생각한 걸까? 아나스타샤는 대체 뭘 사러 가겠다고 한 거야?

“그래서, 어디부터 볼 예정이야?”

“그게…….”

거창한 건 필요 없었다. 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샴푸를 살 수 있을까요?”

“응?”

“샴푸요.”

진짜 생활용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는지 레아는 눈을 깜빡거렸다.

아무튼 이 화려한 백화점에서 샴푸를 찾는 이유를 난 제대로 설명해야 했다.

“그…… 다른 사적인 향락을 즐기기엔 적절치 않…….”

뭔가 상정하지 않았던 걸 설명하려니까 말이 이상하게 나와 버렸다. 말을 하다 말고 난 절망적인 내 언어 회로에 좌절했다.

그러자 아나스타샤가 옆에서 숨이 넘어갈 듯 웃었다. 난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웃지 마세요.”

“어떻게 안 웃겠어? 말이 그게 뭐니? 레아 표정 좀 봐. 아하하하.”

레아는 멍하니 날 보더니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조금만 있어 보란 말이 뭔지 알 것 같아.”

“그렇지?”

동조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창피해서 도저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레아는 그럼 필요한 것만 사자며 우릴 이끌고 욕실 용품들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기초적인 샴푸나 린스, 바디 워시 등만 있는데도 가격이 상당했다. 기본적으로 싼 매장이 아닌 것이다.

그래도 가격이 있는 만큼 품질도 좋겠지 싶어서 난 대충 보고는 디자인이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골랐다.

그랬더니 아나스타샤가 빽 하고 야단을 쳤다.

“타티아나! 제대로 보고 고르고 있어!?”

“아뇨, 못 읽겠는걸요.”

“그럼 레아에게 읽어 달라고 하면 되잖아. 제발 아무거나 쓰지 마.”

“전 대체로 다 잘 맞는 편이라서…….”

내 말에 이번엔 아나스타샤가 눈을 흘겼다.

어쩔 수 없이 난 골랐던 샴푸를 내려놓고 레아의 도움을 받아 기존에 쓰던 것과 최대한 비슷한 것으로 찾았다.

그녀가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샴푸 외에도 필요했던 물건들을 몇 개 더 고르고 나오자 아나스타샤가 기지개를 쭉 켰다.

“다음은 옷 좀 사러 갈까.”

순간 레아가 눈을 번뜩였다. 가만 보니 아나스타샤가 쇼핑을 가겠다고 했을 때 옷을 사러 간다고 한 모양이다.

드디어 올 게 왔다고 생각하는지 레아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럼 올라가 볼까? 여기 여성 의류 매장이 정말 크거든. 아나스타샤에게 잘 어울릴 만한 것도 분명 많…….”

“아디다스는 어디야?”

“……?”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난데없이 스포츠 브랜드를 찾았고, 레아는 이번엔 아까보다 더 황당해했다.

“여기까지 와서?”

“간편하게 입을 옷이 더 필요해서. 트레이닝복 좀 사려고.”

레아는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거냐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아나스타샤는 진심으로 트레이닝복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가 평소 패션에 관심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국제 콩쿠르 참가자로서 온 도시에서 쇼핑에 열을 올릴 정도로 집중해야 할 일을 분간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레아는 그제야 이 러시아에서 온 이인조가 어떤 사람인지 알겠다는 듯 한결 편안해진 눈으로 우릴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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