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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073화 (1,073/1,277)

##  1073화

아나스타샤와 난 짐의 양을 굉장히 줄여서 이곳에 왔다.

하지만 그 방식엔 차이가 있었는데, 난 아무렇게나 맞춰 입어도 될 범용성 좋은 옷들을 많이 가지고 온 것에 반해 아나스타샤는 반대로 마음에 드는 옷들을 주로 챙겨 왔다.

그녀는 편하게 입어도 될 옷들은 현지에서 사도 상관없으니 상관없지 않냐고 이유를 설명했는데, 솔직히 난 그녀가 옳다고 생각했다.

다만 한 달 동안 입을 코디를 몇 개나 생각하려니 머리가 아파서 평범한 것들로 챙겼을 뿐이다.

아무튼 당장 내일 입을 편한 옷도 없다며 아나스타샤는 스포츠웨어 매장으로 향했다.

일단 트레이닝복을 한 벌 구매하고 나서 더 돌아볼 심산인 것 같았다.

“캐주얼한 옷은 여기에 모여 있으니까 쭉 둘러보자.”

레아는 멀리서 온 클래식 연주자들이 당연히 포멀한 드레스 등을 구하려고 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이 백화점까지 데리고 왔지만, 이젠 상황을 파악하고는 마음 편하게 우릴 안내하고 있었다.

스포츠웨어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아나스타샤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녔다.

구매 계획이 없던 나와 레아는 멍하니 서서 구경하기만 했다.

돌아다니던 아나스타샤는 이윽고 똑같이 생긴 바지를 두 벌 가지고 왔다.

“둘 중에 뭐가 나은 것 같니?”

“……어, 무슨 차이예요?”

“라인이 다르잖아.”

입어 보면 또 모를까, 그냥 이렇게 봐선 전혀 모르겠다.

옆을 보니 레아 역시 비슷한 눈빛이었다.

트레이닝복 정도는 그냥 대충 고르면 안 되겠냐는 피곤함까지 얼핏 보였는데, 아나스타샤에게 있어서 몸에 걸칠 옷을 대충 고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도움이 안 되는 나와 레아의 감상을 들은 아나스타샤는 다시 매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려다가 문득 다시 우리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도 한 벌 사지 그러니? 타티아나.”

난 고개를 저었다.

아나스타샤는 살짝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예전에도 내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걸 기억하는지 두 번 제안하진 않았다.

“…….”

지난 3년간 난 단 한 번도 트레이닝복을 입어 본 적이 없다.

딱히 품위를 지키란 말 같은 걸 들은 건 아니다.

우리 집에서 오빠나 경호원들은 트레이닝복을 입고 잘만 다니니까. 내가 어떻게 한들 타박할 사람은 없겠지.

단지 난 편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내가 여전히 경어를 쉽게 내려놓지 못하는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 비롯된다.

경계에 대한 경계를 소홀히 하면 순식간에 나태해지고 모조리 무너져 버릴 것이라는 두려움을 난 항상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검은 새가 트레이닝복을 싫어하기도 한다는 걸 아니까. 난 그걸 입을 수가 없다.

“오래 걸릴까?”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던 레아가 물었다. 난 웃으며 대답했다.

“아뇨, 그렇게 늦진 않을 거예요. 잠깐만 기다리죠.”

아나스타샤는 패션에 있어선 확실한 자기 스타일이 있는 사람이다. 그 말인즉슨 이것저것 따지고 고르긴 하지만 길게 갈등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항상 무언가를 고를 땐 순식간에 고르곤 했다. 그리고 보통은 그게 정답이었고.

오늘도 비슷하리라고 생각하며 난 느긋하게 아나스타샤를 기다렸다. 아무 말 없이 있는 날 보며 레아는 살짝 더 다가와 물었다.

“러시아 사람들이 아디다스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긴 했는데…… 이렇게 보니까 조금 놀랍네.”

“그런 경향이 있죠. 요즘은 조금 덜 보이는 듯해요.”

“정말?”

“음, 유행에 민감한 아나스타샤가 여전히 이 브랜드를 찾는 걸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요.”

애매하게 대답하자 레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내게 패션 유행에 대해 묻는 건 정말 주소를 잘못 찾은 것이니 어쩔 수 없었다.

난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어떤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그냥 아나스타샤가 아무 생각 없이 이 브랜드를 고집하진 않으리라고 생각할 뿐이다.

옷에 관한 주제로 이야기하기엔 나보다 아나스타샤가 훨씬 적합하다는 걸 순식간에 파악한 레아는 살짝 다른 주제로 방향을 틀었다.

“우리 집에 온 클래식 음악가 중에 트레이닝복 입고 연습하는 사람은 아나스타샤가 처음일 거야…….”

“후후, 그런가요?”

“응. 그리고 그중에 제일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아.”

아무래도 레아가 봐 온 클래식 음악가들은 실내에서도 포멀한 옷을 입고 격식을 갖추었던 모양이다.

일단 손님으로 와 있는 것이니 예의를 차리는 건 당연하다. 나 역시 그런 부류이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파격적으로 편한 옷을 선택했다. 그게 레아의 눈엔 굉장히 신선하고 다가가기 쉽게 느껴진 모양이다.

난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응원했다.

“그렇게 기억에 남는 것도, 친해지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네요.”

레아는 아나스타샤와 지낼 한 달이 기대된다는 듯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득 내 친구인 아나스타샤만 챙기는 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는지 눈빛을 달리했다.

그리고 그 흥미는 곧 내 쪽으로 향했다.

“타티아나는? 뭐 안 사려고?”

“전 편한 옷들을 많이 가져와서 당분간 옷은 괜찮은데…… 일단 일용품은 살 게 많아요.”

“샴푸 같은 거?”

“예. 집주인 아주머니께서 준다곤 하셨지만 한 달 동안 쓸 물건이니…… 제가 사서 써야죠.”

“그건 맞는 말이네. 데보라 아주머니는 어때? 잘 맞아?”

“좋은 분이에요.”

레아는 아버지의 친구인 데보라 아주머니를 알고 있었고, 우리 이야기는 자연스레 이곳에 와서 있었던 내 이야기 등으로 흘러갔다.

솔직히 사람들의 흥미를 끌 만한 요소로 치면 나도 아나스타샤 못지않긴 하다.

특히 베르체노프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질문을 참기 어려워한다.

“아까 보니까 저쪽에 경호원 오빠 있더라.”

“그랬나요?”

레아는 아까부터 의식하고 있었는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코너 쪽으로 힐긋 눈짓하며 말했다.

평소 빅토르의 경호 방식은 두 가지였다. 우리가 찾을 수도 없이 은밀하게 경호하거나, 아니면 해외 같은 곳에선 아예 같이 다니거나.

그런데 오늘은 이도 저도 아니었다. 난 그가 이런 애매한 거리를 유지하는 이유를 눈치채고는 레아에게 말했다.

“원래 해외에선 제 옆에 있는데…… 레아를 신경 썼나 보네요.”

“날?”

레아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빅토르의 의도는 명료했다.

혹시라도 레아가 경호원들에게 겁먹고는 내게 거리감을 느끼고 친해지기 어려워할까 봐 되도록 안 보이는 곳에 있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레아에게 그의 의도를 그대로 전달할 순 없어서 난 작은 농담을 섞었다.

“아니면 낯가림 하나 봐요.”

“낯가림?”

내 말에 레아는 풉 하고 단어를 내뱉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별로 웃긴 농담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운 좋게 레아의 유머 취향을 딱 맞춘 모양이다.

한참을 웃던 레아는 끅끅거리며 말했다.

“너무 웃겨 진짜.”

“빅토르가 겉보기와는 조금 다르죠?”

“그만해 정말. 날 웃겨 죽일 셈이야?”

그러면서 레아는 계속 눈으로 빅토르를 찾고 있었다. 이러다가 나중에 돌아갈 때 빅토르에게 낯가림하냐고 묻진 않을지 걱정이 되긴 하지만…… 별로 무섭진 않았다.

빅토르가 평소에 내 주위의 사람이라면 누구든 경계한다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내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잖아?

뒷감당은 잘 모르겠어서 수습하지 않고 그냥 미소로 마무리 지었다. 이것도 다 빅토르가 먼저 날 건드린 대가다.

웃을 것 다 웃고 난 레아는 이어서 자신의 이야기도 하기 시작했다.

“하…… 아무튼, 나도 이따가 옷 좀 보려고 여기 온 거였는데.”

“그래요? 어떤 옷이요?”

“이제 봄이고 하니까 주말에 입으려…….”

아직은 살짝 쌀쌀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따뜻해질 테니 나들이옷 같은 것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말을 하다 말고 레아는 갑자기 인상을 쓰더니 다시 스마트폰을 켜서 보고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런데 이놈의 남자 친구는 연락이 안 되네?”

“아…… 데이트 때 입으시려고요?”

“아니…… 연락이 안 되어서 주말에 볼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겠어.”

다가오는 봄을 맞이하여 한껏 들떠 있던 레아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는 걸 보니 내 흥미를 끌어내 푸념 같은 걸 해도 될지 살짝 눈치를 보는 것 같다.

다른 이야기라면 몰라도 연락이 안 된다는 이야기라면 나도 남 일 같지가 않았다.

그 심정을 알 것 같아서 난 레아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다 들어 줄 생각으로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내 그녀가 이어 말했다.

“시험 준비한다고 잠수 타 버렸거든. 며칠은 이해가 가. 나도 그럴 때 많고. 서로에게 신경이 쓰이면 집중 안 되니까 프리하게 두는 편이지.”

“음, 그렇죠.”

“그런데 일주일은 좀 심하지 않아? 내가 얘 공부하다가 죽었나 걱정해야 하니?”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레아가 화를 냈다.

꼭 사람들이 연락을 하고 지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자기 개발에 집중해야 할 시기면 우선순위를 약간 바꾸는 것도 분명 필요한 일이고.

하지만 적어도 조금 더 가까운 관계고, 앞으로도 잘 지낼 생각이 있다면 되도록 자주 연락하는 편이 좋다.

물론 개인별로 그 기준에 대한 생각이 다 다르니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이겠지만…… 난 레아가 유별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그 마음을 안다는 듯 쓴웃음을 짓자 레아가 물었다.

“타티아나 넌 최대 며칠이야?”

“어…… 글쎄요? 연인 사이라면…… 나흘 정도?”

“그치? 그게 상식이지? 내가 유난인 거 아니지?”

전 세계 평균은 어떨지 몰라도 유럽 평균은 아마 그쯤 되지 않을까 싶다.

아무리 스스로에게 집중해야 할 시기라도 메시지 하나 할 시간 정도는 분명 있을 테니까. 확실히 일주일은 심하다.

재차 동의를 구하는 레아를 진정시키기 위해 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도 이해할 수 있어요. 그렇게 오래 연락이 안 되면 불안하죠.”

“아, 에르네스트도 혹시 그래?”

“예?”

내가 되묻자 되레 레아가 더 당황해했다. 그녀는 눈을 깜빡거리며 내 반응을 확인하더니 더듬거리며 물었다.

“어? 아니야? 난 그렇게 들었는데.”

“들었다뇨? 누구한테서요?”

학교에선 내가 가십거리로 꽤 유명한 편이니 그렇게 예민하게 굴지 않을 수 있었다.

내가 결정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멋대로 이야기하는 건 살짝 거슬리지만 그래도 귀여운 수준의 착각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곳에선 다르다. 레아에게 내 이야기를 해 줄 만한 사람은 아나스타샤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생각으로 아나스타샤가 우리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한 건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워서, 난 약간 캐묻듯 묻고 말았다.

돌변한 내 태도에 약간 위축된 레아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인터넷에서?”

“……아.”

그제야 난 한숨을 내쉬었다.

학교의 아이들처럼 인터넷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레아가 그중 한 명이라고 해도 그리 이상할 건 없었다.

난 차분하게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루머일 뿐이에요. 제가 그와 같은 학교고…… 초연도 맡은 적 있지만 그런 건 아니에요.”

“그, 그렇구나……. 아니, 난…… 네가 내 입장을 되게 잘 알아주는 것 같아서…….”

레아가 착각한 건 비단 그녀 탓만이 아니었다. 내가 그녀에게 동조해 주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착각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이다.

결국 내 잘못이었다. 난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냥 알 수 있는 것도 있잖아요?”

“그렇긴 하지. 음, 미안해. 인터넷을 보고 괜한 소리를 했네. 조심할게.”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사실 어제 네가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서 아나스타샤에게 물어볼까 하다가 안 물어봤었는데, 물어볼 걸 그랬어.”

난 멈칫했다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에게 궁금한 건 직접 물어보시면 되죠. 괜찮아요.”

“그래? 그러니?”

“물론이죠.”

아직 우린 세 명을 제외한 타인들에게서 이러쿵저러쿵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특히 아나스타샤는 더더욱 심할 것이다.

난 고개를 돌려 매장 안의 아나스타샤를 찾아냈다.

그녀는 양손에 옷가지를 들고 카운터로 걸어가고 있었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엔 온통 옷 생각뿐이겠지.

평소에도 그녀의 생각을 잘 읽어 낼 수 있으면 좋겠다. 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계산하네요.”

“진짜 금방 샀네.”

레아와 이야기하는 몇 분 사이 원하는 옷들을 골라낸 아나스타샤는 점원과 무어라 이야기하며 계산을 마쳤다.

우리도 슬슬 움직일까 싶어서 다음엔 어디로 갈까 살피는 사이, 모르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사람은 아예 발걸음을 멈췄다. 명백하게 날 알아본 표정이었다.

그는 방향을 바꿔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 뒤로 빅토르가 슬쩍 따라붙는 것이 보였다.

난 모르는 척하고 가만히 기다렸다. 이내 목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워지자 남자가 말했다.

{베르체노바 양?}

날 부르는 방식이나 발음이 영어였다. 그래서 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요.}

{오, 영어도 하시나요? 잘하시네요.}

{한 마디 했을 뿐인데요.}

약간 어이없어하며 대답하자 그는 머쓱한지 뒷목을 긁적였다. 그러고는 빤히 바라보더니 미소와 함께 물었다.

{혹시 제가 누군지는 아시나요?}

{……?}

당연히 모른다. 오늘 처음 본 사람이니까.

이렇게 만나게 된 사람들은 대체로 내 팬을 자처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이런 사람은 또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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