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5화
아나스타샤의 트레이닝복 구입은 쇼핑의 시작에 불과했다.
하루에 한 벌씩 갈아입는다고 쳐도 로테이션이 적어도 서너 번은 돌아가야 될 테니 아나스타샤가 사야 할 옷은 그보다 많아야 했다.
애초에 모든 걸 현지 조달로 결정짓고 온 아나스타샤의 행보엔 거침이 없었다.
그녀는 잠옷으로 입을 만한 옷과 원피스, 티셔츠, 청바지 등도 구매했다.
“나 저기도 잠깐 보고 갈래.”
아나스타샤를 따라다니면서 아무것도 사지 않고 멀뚱멀뚱 서 있기만 하는 건 너무 어색한지라 덩달아 나와 레아 역시 자연스레 한두 벌 정도는 사게 되었다.
레아는 원하던 원피스를 찾아내서 기분이 좋아 보였고, 난 나대로 카디건을 하나 건졌다.
적당히 범용성 좋게 걸칠 만했다.
“여기 되게 괜찮은 것 많네.”
중얼거리며 돌아보던 아나스타샤는 무언가 슬슬 깨달았다는 듯 팔짱을 꼈다.
“쭉 보면서 느낀 건데, 역시 트렌드가 살짝 다른 것 같아.”
“……전 모르겠어요.”
“예를 들면 이것 봐. 이렇게 긴 스타일은 모스크바에선 이제 아무도 안 입는다고. 그런데 여기선 가장 잘 팔리는 자리에 있잖아. 다른 매장도 그랬었어.”
스포츠웨어부터 잠옷, 캐주얼, 구제 등 여러 종류의 매장들을 돌아다니면서 아나스타샤가 내린 결론은 이곳 벨기에의 트렌드가 따로 있다는 것이었다.
난 아나스타샤처럼 구체적으로 짚어 낼 순 없었지만,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 자체는 이해했다.
서쪽으로는 프랑스, 북쪽으로는 네덜란드, 동쪽으로는 독일.
그리고 바다 건너서는 영국을 가까이하고 있는 벨기에엔 단순히 유럽풍이란 단어만으론 표현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문화적 색이 있었다.
그것은 문화 전반은 물론 패션 트렌드에도 당연히 묻어나기 마련이다.
아나스타샤의 눈엔 그것이 확실하게 눈에 보이는 모양이었다.
“내가 가지고 온 거 생각하니 갑자기 불안해지네…….”
그녀는 일상복을 포기하고 자신 있게 입을 수 있는 옷들을 가지고 왔다.
그런데 막상 현지의 트렌드를 직접 눈으로 보고 나니 자신감이 살짝 떨어진 듯했다.
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아나스타샤.”
“응?”
“전 아나스타샤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몰라요. 하지만 직접 보고 고른 것에 대해선 의심하거나 불안해하지 마세요. 분명 어느 자리에서든 잘 어울릴 테니까요.”
멀리서 온 우리에겐 모든 것이 낯설고 불안하다.
평소 믿고 있던 것이 흔들려 버리면 자신감을 잃는 건 순식간이다.
지금은 패션에 관해서였지만 이런 불안이 음악에까지 미치지 않으리라 확신할 순 없었다.
아직 작은 부분이라고 할지라도 균열이 생기면 안 된다. 난 그녀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재차 이야기했다.
“전문가인 아델리나도 칭찬해 줬었잖아요? 아나스타샤의 감각이 뛰어나다고요.”
장소가 어디든 신경 쓰지 말고 믿는 바를 믿길 바란다. 아나스타샤라면 분명 휘둘리지 않을 수 있을 터다.
내가 진지하게 이야기하자 아나스타샤도 결국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고마워.”
애초에 그녀는 나만큼이나 자신이 믿는 바에 솔직하고 강인한 사람이다.
지금은 멀리 해외에 나와서 살짝 흔들렸을 뿐, 내가 이렇게까지 이야기하지 않았어도 아마 혼자서 잘 극복했겠지.
그런데 내가 아나스타샤를 붙잡고 이야기하는 걸 본 레아는 신기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시선을 느낀 내가 고개를 돌리자 레아는 화들짝 놀라며 내 눈을 피했다.
“레아?”
“아니, 그…….”
뭔가 황급히 할 말을 떠올리는 듯 우물쭈물하던 그녀는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야 말했다.
“그런 이야기를 해 줄 수 있다는 게 부러워서…….”
“……그런가요? 평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아무튼. 부러워, 두 사람.”
레아는 그렇게 말하고 웃더니 자기가 한 말은 너무 깊게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듯 앞장서서 우리를 데리고 다음 매장으로 향했다.
그 후로도 우리는 한참 동안 백화점을 돌아다녔다.
아나스타샤의 천부적인 스타일링 감각은 나와 레아가 옷을 고르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지칠 때까지 쇼핑에 몰두한 후엔 다 같이 식사도 하고, 조금 회복한 체력이 다시 다 소진될 때까지 쉼 없이 돌아다녔다.
우리가 다시 차에 오른 건 오후 3시가 다 되어서였다.
“…….”
돌아오는 길에 아나스타샤와 레아는 졸기까지 했다.
옷에서 일용품, 거기에 식료품까지. 6층 백화점 전체를 오르내리면서 쇼핑을 하느라 기진맥진한 모양이었다.
나 역시 피곤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졸고 있는 두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어서 참아 냈다.
다행히 차로 이동하는 거리는 그리 길지 않았다. 20분 정도 지나 우린 레아의 집인 샤르베가의 주택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 짐 다 제대로 내렸나?”
“제 것과 안 섞이게 뒀으니…… 아마 다 내렸을 거예요.”
일어난 레아가 비몽사몽 하며 트렁크에서 짐을 내렸다. 아나스타샤와 레아 두 사람의 몫은 양손 가득 들어야 할 정도로 많았다.
차 옆에 선 레아는 잠시 짐을 내려놓고는 방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늘 정말 즐거웠어!”
“후후. 저도요, 레아.”
“콩쿠르 시작 전에 기회가 되면 또 같이 놀자.”
아직 여유 시간이 꽤 남아 있으니 아마 레아와 다시 만나서 놀 기회도 있을 것이다.
난 거기에 더해 콩쿠르가 진행되는 한 달 동안에도 얼마든지 그녀와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콩쿠르 중에도 괜찮아요.”
“아니, 아니야! 바쁜 애들 시간 뺏을 생각은 없으니까.”
레아는 절대 안 된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그렇게 부담되는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피아노에 집중하더라도 밥을 먹고 쉬기는 해야 할 테니까. 그걸 레아와 함께할 뿐이다.
아나스타샤도 그 정도는 괜찮다는 듯 웃더니 눈웃음을 지었다.
“그럼 들어갈게.”
“예. 며칠 이따가 뵈어요.”
“응.”
나와 아나스타샤는 이미 만날 날을 정해 놓았다. 물론 거기엔 우리 말고도 많은 사람이 있을 테지만…… 분명 즐거우리라 생각한다.
“우리도 갈까요? 소로킨.”
“알겠습니다.”
다시 출발한 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엔 내가 머무는 랑스가에 도착했다.
아까 아나스타샤와 레아의 짐도 어마어마했는데, 내 짐도 만만치 않았다.
나 혼자서 이걸 다 들고 가려면 최소한 네 번은 왔다 갔다 해야 할 양이었다.
다행히 빅토르와 소로킨이 내 옆에서 도와주었다. 사실 내가 손댈 것도 없었지만 난 일부러 옆에서 거들었다.
“이건 제가 들고 갈게요.”
“무리하지 마십쇼.”
“괜찮아요, 이 정도는.”
빅토르가 걱정하는 것만큼이나 나 역시 부상에 굉장히 예민한 사람이지만, 이 정도에 무리가 가면 애초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난 적당히 들 수 있을 만큼만 들고 현관으로 향했다.
“아주머니, 저 왔어요.”
“어머나.”
깜짝 놀란 듯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데보라 아주머니는 현관 앞에 선 날 보더니 옆으로 비켜 주시며 말했다.
“생각보다 일찍 왔…… 뭘 이렇게 많이 사 왔니?”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네요.”
내가 물건들을 한 아름 안고 들어서자 아주머니는 약간 어이없어하기까지 했다.
난 식탁까지 걸어가선 그걸 내려놓으며 하나씩 이야기했다.
“제가 사려고 했던 것들은 다 샀고요……. 그리고 치즈랑 빵이랑……. 아, 드럼 세탁기 쓰시죠? 세제는 이거면 되나요?”
“타티아나…… 우리 이런 거 받으면 안 되는데.”
아주머니는 약간 난감해하셨다.
기본적으로 호스트 패밀리는 연주자에게 아무것도 받으면 안 된다. 순수한 지원만을 목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나 역시 그 순수한 정신을 침해할 생각은 없다. 단지 그 기준이 명확한 건 아니니까 최대한 할 수 있는 곳까진 하려는 것뿐이었다.
“저도 알아요. 하지만 제가 이 치즈를 특히 자주 먹는 편이거든요. 한 달 동안 먹어야 할 양이니까 넉넉하게 샀어요.”
맡은 연주자를 한 달간 지원하고 먹여 살려야 하는데 그 기준이 어디까지인지 규정되어 있진 않았다.
연주자 개인이 필요로 하거나 먹고 싶어 하는 것이 있다고 해도 그것까지 호스트 패밀리가 책임지고 지원할 필요는 없다.
결국 개인이 알아서 사야 하는 부분도 분명히 있는 것이다.
난 그 애매한 지점에 발끝을 걸치고 있었다. 일단 나도 분명히 같이 먹긴 할 테니까. 이 정도는 괜찮겠지.
그래도 데보라 아주머니는 고민이 많은 듯 보였다.
“너 혼자 먹으려면 한 달이 아니라 1년은 먹을 것 같은데?”
“아뇨, 사실 제가 대식가라서.”
“어제 네가 먹는 양을 다 봐서 뻔히 알아.”
“내숭 떤 거예요.”
하지만 내가 대놓고 뻔뻔하게 농담을 하자 결국 아주머니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이렇게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할 수 있는 만큼 하려고 하는지 이해하신 것 같다.
곧이어 빅토르와 소로킨도 주방으로 들어왔다.
“저쪽에 둘까요? 마담.”
“아…… 그렇게 해 주세요.”
두 사람이 들고 온 것도 잔뜩이었다. 아주머니는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원 참……. 어디 보관할 곳도 없겠다.”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그래, 그래.”
이미 난 어제 아주머니가 음식을 준비하시는 걸 보면서 냉장고 안의 상황을 슬쩍 확인한 후였다.
그런 계산을 다 하고 사 온 것이기 때문에 아마 공간이 부족한 일을 없을 것 같았다.
“그럼 전 씻고 연습하러 가 볼게요, 아주머니.”
“그러렴. 점심은?”
“먹고 왔어요.”
일단 내가 지금 옆에 서 있으면 아주머니가 계속 난처해하실 것 같아서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방으로 돌아오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피아노였다. 보면대 위엔 태블릿 컴퓨터가 놓여 있었다. 오늘 아침에 연습한 증거다.
“…….”
오후의 깊은 햇살이 스며드는 방의 분위기가 약간 신비롭게 느껴져서 난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천천히 피아노 앞으로 가선 태블릿 컴퓨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연습을 시작하기 전에 인터넷에 케빈 도너번이라는 이름의 피아노 연주자에 대해 검색해서 찾아보기 시작했다.
“…….”
케빈 도너번. 호주 출신으로 하노버 음악원에서 석사 과정을 마친 피아니스트.
경력으로는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와 KKL 루체른 컨벤션 센터 및 여러 콘서트홀에서의 연주회 활동.
예상했던 대로 콩쿠르나 음반 활동을 중점적으로 하기보다는 연주회를 많이 하는 연주자였다.
연주회 영상은 멋대로 녹화해서 인터넷에 올릴 수 없기에 영상이 많진 않았지만 공식 영상 몇 개는 찾을 수 있었다.
난 그의 연주 영상을 하나 틀어 보았다.
‘상당한 실력자네…….’
음질이 별로 좋지 않은 태블릿 컴퓨터로 들어 봐도 이 사람이 굉장한 실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호주와 유럽 등지에서 연주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사람이다 보니 난 그의 이름도 몰랐던 것이다.
세상은 넓고 이렇게 실력자는 많다.
그리고 그 실력자들이 한곳에 모이는 이 콩쿠르에 내가 발을 담그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기분이 고양된다.
‘우릴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했었지.’
내가 케빈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처럼 난 다른 연주자들이 우리에게 그리 큰 관심을 가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케빈은 적어도 콩쿠르 참가자들 사이에선 우리가 꽤 주목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실수하는 것이 쉽게 묻히지 않을지도 모른다. 무대 위에서뿐만이 아니라 그 어디에서라도.
“…….”
당장 다른 참가자들을 만나게 될 환영 파티가 이제 며칠 뒤였다.
누군가 강제한 것도 아니지만 난 거기에 참가를 희망했다. 그리고 아나스타샤까지 함께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음…….”
난 다시 한번 콩쿠르 참가자 명단을 화면에 띄웠다. 그리고 이번엔 조금 더 자세하게 이름과 얼굴, 간단한 약력 등을 체크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