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076화 (1,076/1,277)

##  1076화

브뤼셀에 도착하고 나서 사흘이 더 흘렀다. 그사이 내 일과는 계획대로 흘러갔다.

쫓기듯 연습 일정에 치이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난 내가 주도하여 추적하고 따라붙는 타입이다.

때문에 이튿날까진 여유롭게 행동하며 준비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집중력을 끌어 올려 연습에 쏟아붓기 시작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피아노 앞에 앉아 연습을 시작하고, 그것은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랑스 부부 내외는 내게 필요하다면 밤 12시까지 연습을 해도 괜찮다고 허락해 주었지만 너무 늦어지는 건 민폐일 뿐만 아니라 나 역시 컨디션 조절에 문제가 생길지 모르는 일이라 평소 하던 선을 지키기로 했다.

그래서 내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건 시간으로 따지면 오전 7시부터 밤 10시까지였다.

중간에 식사하거나 쉬는 시간을 빼면 정말 난 거의 모든 시간을 피아노와 함께 있었다.

“…….”

잡힐 듯 말 듯 한 소리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 창밖을 보니 찬란한 햇살이 반짝였다.

내가 앉아 있는 곳까지 멋대로 들어와서 내 어깨를 간질이는 빛들은 마치 나가 보자고 날 유혹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난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산책을 다녀온 지 2시간도 되지 않았다. 지금 느끼는 유혹은 내 마음의 부실함일 뿐이다.

‘지금 어디까지 온 걸까.’

한 곡의 완성은 기초부터 튼튼하게 지어서 형태를 마무리 짓는다고 끝나지 않는다.

깔끔하게 외부를 정돈하고 인테리어를 하는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

꽃병을 왼쪽으로 1cm만 밀어 볼까, 아니면 소파를 앞으로 1mm만 당겨 볼까.

음악의 거실을 채운 표상들을 움직이는 디테일링 연습은 정말 무한히 할 수 있는 일처럼 느껴진다.

꽃병은 차라리 낫지, 힘겹게 소파를 밀고 당기다 보면 때때로 나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헷갈릴 정도로 아득한 기분이 들곤 했다.

이 자체가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무의식의 자아가 당장 나가자고 유혹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조금만 더 하면…….’

하지만 난 안다. 이렇게 지쳐 쓰러질 때까지 무한정 계속될 것만 같은 일도 어느 순간 마치 마법처럼 완벽하게 딱 들어맞게 된다는 걸.

물론 그렇게 완벽하게 디테일링을 끝낸 음악도 시간이 흐르고 다시 보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시 뜯어고쳐 더더욱 완벽성을 기하기도 하지만 그때부턴 매 순간 완벽한 음악을 자신 있게 선보일 수 있게 된다.

가능하다는 것을 알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때문에 난 계속해서 집중하여 피아노에 시간을 쏟을 수 있었다.

“…….”

그렇게 다시 한번 소파의 위치를 1mm 정도 바꿔 놓고 멀리 떨어져서 팔짱을 끼고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타티아나? 들어가도 될까?”

“예.”

음악 소리가 멎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데보라 아주머니가 문을 노크했다.

아주머니는 내가 본격적으로 집중하기 시작한 뒤로는 정말로 조심스럽게 날 대해 주셨다.

난 그녀의 마음을 알기에 절대로 내 치열함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눈에 힘을 풀면서 돌아보았다.

문가에 선 아주머니는 조용히 용건을 전했다.

“연습 중에 미안한데, 손님이 오셨거든?”

“그런가요? 잠시 나가 있을까요?”

“응?”

내 대답에 아주머니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황당하다는 듯 야단을 치셨다.

“얘는 정말! 무슨 말이니?”

“아주머니 손님이 오셨다고 하시니…….”

“손님이 아니라 그 누가 오더라도 너한테 나가 달라고 할 일은 없으니까 그런 말 말렴.”

손님이 오셔서 잠시 조용히 해 달라는 건 줄 알았는데…… 내가 살짝 오해한 것 같다.

죄송하다는 뜻으로 웃어 보이자 아주머니는 복도 쪽으로 손짓했다.

“그리고 내 손님이 아니라 네 손님이야.”

“제 손님이요? 그럴 리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단다. 그러니 준비되면 나오렴. 차 끓이고 있을게.”

그 말만 전하고 아주머니는 가 버리셨다. 난 아무리 생각해 봐도 떠오르는 사람이 없어서 당황스러웠다.

‘브뤼셀에서 내 손님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누가 있지?’

멍하니 앉아 있던 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일단 손님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상태로 만나러 갈 순 없었다.

거실의 소파를 1mm 움직이는 것을 놓고 인상을 쓰고 있을 정도로 날카롭게 신경이 예민해져 있는 상태로 사람을 만나는 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니다.

난 거울을 보며 자신을 확인하고 겉모습과 마음 모두 정돈했다.

“……?”

거실 쪽으로 나오니 소파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눈을 마주치더니 알은체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안녕하세요.”

안경을 쓴 말쑥한 차림의 남자였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어쩐지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은 어투와 목소리였다.

하지만 바로 떠올리긴 어려워서 기억을 되짚는 사이, 남자는 씩 웃더니 자기소개를 했다.

“이렇게 직접 뵙는 건 처음이군요. 퀸 엘리자베스 국제 콩쿠르 사무국의 루트거 칼스도르프입니다.”

“아!”

그 이름을 듣고 나서야 난 그를 떠올릴 수 있었다.

전화로 내가 콩쿠르 DVD 심사에 합격했음을 알려 주고 혹시 러시아어로 문의할 것이 있다면 연락을 달라고 했던 사람이었다.

어쩐지 러시아어를 발음하는 어투가 낯익다 싶었는데, 전화로 들어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난 배시시 웃으며 그 앞으로 향했다.

“반가워요. 혹시 오래 기다리셨나요?”

“괜찮습니다. 연습을 감상하는 것도 기분 좋더군요.”

“이렇게 직접 오실 줄은 몰랐네요.”

그전에도 몇 번 전화를 한 적이 있긴 하지만 콩쿠르 관계자란 위치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만날 생각은 없었다.

칼스도르프 역시 내게 특별한 도움을 줄 수 없는 만큼 거리를 유지하길 원하는 것 같았고.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일까 싶다. 브뤼셀에 잘 도착했나 확인하려고 굳이 실사까지 나오는 건가?

의아해하는 내 표정을 봤는지 칼스도르프가 설명했다.

“일반적으론 전화로만 확인하죠. 이미 타티아나 유리예브나께서 도착하신 첫날에 랑스 씨에게 전화를 하기도 했고요. 오늘은 그냥 근처에 다른 일로 온 김에 들른 겁니다.”

역시 콩쿠르 관계자가 직접 오는 게 흔한 일은 아니었다.

칼스도르프는 크게 신경 쓰진 말라는 듯 웃었다.

“제가 참가 요청을 드리기까지 했으니 직접 인사 정도는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괜찮은데요……. 원래 참가하려 했었고요.”

“그간 불편한 점은 없으셨습니까?”

“전혀요. 아주 좋았어요.”

정말 상상 이상으로 데보라 아주머니는 날 환대해 주셨다. 이 이상을 바랄 수 없을 정도다.

칼스도르프가 어떤 권한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은 최대한 잘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난 랑스가가 얼마나 좋은 곳인지 열변을 토했다.

나도 모르게 살짝 흥분한 것 같다.

차를 가져온 데보라 아주머니가 그만해도 된다고 말할 때까지 계속해서 이야기하자 칼스도르프도 내가 진심으로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걸 납득했는지 훈훈하게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연습은 꾸준히 하고 계시는 것 같고…… 개최일 전까지는 다른 일정 없이 연습만 하십니까?”

그 목소리엔 큰 변화가 없었다. 그저 내가 잘 준비하고 있다는 걸 직접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인 건 아니었다. 예민함을 미처 다 못 다스리고 있는 난 그의 본 의도를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뭘 원하는지 알겠네.’

어른들은 쉽지 않구나.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와 어른의 대화를 하려면 그걸 알았다고 하더라도 곧장 찌르면 안 된다. 서로 곤란해지는 길이다.

나는 예민함을 누르면서 천천히 말을 골랐다. 괜히 대화를 비틀 생각도 없고, 그렇게 해서 무언가 얻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며칠 뒤 환영 파티에 갈 예정이에요. 그것 말고 다른 계획은 없네요.”

“참석하십니까?”

“가면 안 되나요?”

솔직한 내 말에 칼스도르프는 살짝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더니 이내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제발 와 주셨으면 하는 바람이죠.”

“그럼 잘되었네요.”

“감사합니다.”

감사까지 할 일은 아닌데.

신기하게 바라보니 칼스도르프는 차로 목을 축이고는 약간 더 열린 태도로 말했다.

“원래는 사교 활동을 하지 않으시는 편이라고 들었습니다. 러시아에서도 행사 등에서 타티아나 유리예브나를 본 사람은 전혀 없다고…….”

그제야 난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아버지는 사람들을 만날 일이 많다. 당연히 거기엔 여러 행사와 파티 등이 따라오고, 가족 동반으로 초대되는 일도 많다.

일종의 사교의 장인 것이다. 그러나 난 단 한 번도 그런 자리에 나간 적이 없다.

아버지가 장관을 만나거나 대통령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오빠는 자주 가는 모양이었지만 난 그렇지 않았다.

난 그것이 아버지의 배려임을 알지만, 외부에서 보는 칼스도르프 같은 사람들은 내가 다른 이유로 참석을 꺼린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난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번 환영 행사는 음악가들의 자리잖아요? 그러니 참석해야죠.”

“……다행입니다. 바네사 왕비께서도 굉장히 기뻐하실 겁니다.”

“예?”

난 귀를 의심했다. 생각치도 못한 이름이 들린 까닭이다.

“아, 그 자리에 바네사 왕비께서 참석하신다는 것 모르십니까?”

“그…… 몰랐는데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그 이름에 걸맞게 벨기에 왕비들의 후원과 지지를 한껏 받는 콩쿠르였다.

최종 시상식에서 왕비가 직접 수상자들을 시상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환영 파티에도 참석할 줄은 몰랐다.

이런 중요한 정보를 왜 환영 파티 안내에 빼놓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살짝 당황한 듯 보이자 칼스도르프가 넌지시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미리 생각은 해 두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바네사 왕비께서 타티아나 유리예브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한다고 하시니.”

저를 왜요? 라고 묻고 싶었다.

간신히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이미 마음의 소리는 들렸는지 칼스도르프가 웃었다.

“음반에 수록된 베토벤 소나타 24번의 팬이라고 하십니다.”

“……아.”

“아마 그 이야기를 하실 것 같은데……. 아, 물론 다른 음악가에게도 관심이 원래 많으신 분입니다. 그러니 너무 어렵게 생각하실 건 없습니다.”

난 그제야 모든 상황을 조합할 수 있었다.

환영 파티엔 바네사 왕비까지 참석하고, 때문에 칼스도르프에겐 반드시 날 참석시켜야 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직접 찾아왔고.

“이미 어려운데요……?”

“하하하, 괜찮습니다. 베토벤을 그렇게 좋아하시는 분이 권위적이겠습니까? 그리고 타티아나 유리예브나에게 권위적일 수도 없고요.”

베토벤은 오스트리아 황족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을 정도로 권위주의에 반발한 사람이었다.

그 성격을 알고 좋아한다면 칼스도르프의 말대로 아마 권위주의와는 거리가 먼 분일 테지.

하지만 내 걱정은 그쪽이 아니었다. 솔직히 왕비님을 만나는 것 자체는 그렇게 긴장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만남에 신경 쓰는 사람이 무시무시하게 많을 걸 생각하면 조금 어지럽다.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칼스도르프는 미소를 지었다.

“편한 마음으로 와서 즐겨 주셨으면 합니다.”

난 지금 가지고 있는 옷 중에서 가장 포멀한 것이 뭔지 떠올려 보다가 다시 아나스타샤와 쇼핑하러 나가야 하는 건 아닐지 생각했다.

***

왕족까지 오는 환영 행사라는 말에 난 살짝 당황해서 아나스타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의 태도는 담담했다.

-넌 평소대로 하면 돼.

그 말을 듣자 그것이 내가 며칠 전 백화점에서 그녀에게 해 주었던 말을 되돌려 받은 것이란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장소가 바뀌었다고 해도 나나 아나스타샤가 어떤 사람인지는 바뀌지 않는다.

바뀌어선 안 된다. 그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각오를 다진 나는 어떤 것을 준비해야 할지 결정했다. 그것은 바로 내 태도였다.

내가 할 일은 바뀌지 않았다. 더더욱 열심히 피아노에 집중했을 뿐이다.

이건 나 자신을 준비시키는 과정이기도 했다.

음악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내 음악의 부족함을 자각하고 있으면 자신감을 잃고 위축될 테니까.

태도가 당당해지려면 일단 나 자신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요컨대 계속하던 것처럼 피아노만 붙잡고 있었다는 뜻이지만…… 그 결과는 생각보다 더 좋았다.

“슬슬 가십니까? 아가씨.”

“예.”

빅토르의 부름에 난 고개를 까딱이며 일어섰다. 파티장에서 입을 옷으론 니트 원피스를 골랐다.

되도록 포멀하고 단정하게 보이고 싶었다. 그리고 아직 바깥바람은 약간 쌀쌀하기도 하고.

며칠 전 샀던 카디건을 걸치자 금방 준비가 끝났다. 빅토르를 잠시 바라보자 그가 웃었다.

“오늘따라 좋아 보이시는군요.”

“그런가요?”

“파티를 기대하셨습니까?”

난 의뭉스럽게 웃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요?”

해야 할 일을 할 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찾아 에너지를 집중시킨다. 그것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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