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097화 (1,097/1,277)

##  1097화

타티아나가 무엇을 할지 알레한드로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일단 태도를 보면 대결을 하고자 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귀

찮게 하자 발끈하긴 했지만 기욤 감독이 말리자 바로 진정했으니까. 이젠 원래 하려고 했던 대로 연습하던 곡을 보여 주면 될 일이다.

알레한드로는 그녀의 선곡에 시비를 걸긴 했지만 그건 그녀의 연주에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발을 하고 싶었던 것뿐이었으므로 지금 무엇을 연주하든 즐겁게 들어 줄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이건 뭐지.’

타티아나가 처음 짚은 음을 듣자마자 알레한드로는 그 생소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첫 음만 들어도 어지간해선 어떤 곡인지 연상해 낼 수 있는 그로선 지금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이 무척 당황스러웠다.

타티아나는 멈추지 않고 다시 같은 음을 짚었다. 그리고 입을 열어 그 음에 맞추어 목소리를 내었다.

“아.”

언어가 아닌 순수한 소리. 인간이 음악이란 것을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내었을 소리가 타티아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소리는 피아노의 음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하나로 공명했다.

알레한드로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이게 대체…….’

타티아나는 어린 나이에 두각을 드러내자마자 이미 상당히 완성된 피아니스트로 알려졌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소나타들, 발라키레프 이슬라메이 등. 그녀가 세상에 선보였던 곡들은 어느 하나 쉬운 곡이 없었다.

단 한 곡을 완성하는 데에도 시간과 노력이 굉장히 많이 들어가는 곡들이다.

어린 학생들도 테크닉이 뛰어나면 종종 연주하곤 하지만, 가까스로 형태 정도만 구사해 내도 박수를 받을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그 정도의 난곡들을 타티아나는 이미 몇 곡이나 연주해 냈다. 그것도 굉장히 높은 수준으로.

그녀가 대체 언제부터, 어디서, 어떤 스승을 두고, 어떻게 연습했는지 등에 대해 전 세계 음악가들의 관심이 쏠리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중 한 가지.

지금 여기서 타티아나는 자신이 어떻게 곡을 만들어 내는지 직접 보여 주고 있었다.

“아.”

소리의 잔향이 살짝 가실 즈음 다시 타티아나는 건반을 짚으며 동시에 입으로 소리를 냈다. 똑같은 건반과 음이었다.

옆에 있는 기욤이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지금 무슨 상황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알레한드로는 약간의 차이를 알 수 있었다. 예민한 피아니스트가 아니라면 알아차리기 어려운, 정말 작은 디테일의 차이였다.

‘피아노 소리가 바뀌었는데?’

음높이가 달라지진 않는다. 피아노 건반으로 낼 수 있는 음높이는 엄밀하게 정해져 있으니까.

하지만 연주자의 실력에 따라 같은 음높이여도 음색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

타티아나는 조금 더 신중하게 건반을 터치했다. 방금 전과 또 다른 음색으로 소리가 이루어지고, 그것은 그녀의 목소리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금 타티아나는 자신의 목소리를 기준으로 손을 조율하고 있었다.

‘이런 건 처음 보는군…….’

피아니스트라면 당연히 자신만의 고유한 음색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스승으로부터, 다른 피아니스트로부터, 그 외 여러 곳에서 얻을 수 있는 소리들을 모두 머릿속에 집어넣고 거기에서 자신의 것이라 부를 수 있는 한 가닥의 소리를 일깨우는 것이다.

이 과정을 알레한드로는 예술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이라 일컬었다.

프로 피아니스트로서 필수적으로 지향해야 할 과정이고, 끝내 실패하는 이들도 많다.

그런데 타티아나는 멋진 방법으로 자신의 소리를 조성해 내고 있었다.

목소리로부터 비롯된 정체성을 자신의 피아노로 옮긴다는 건 상당히 자기만족성이 강한 편협한 시도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타티아나의 목소리에선 이미 많은 공부와 재능이 느껴졌고, 다시 한번 정교한 재조립을 거쳐 피아노로 연주되었을 땐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음 하나를 몇 번이나 반복하며 손을 조율한 타티아나는 이어서 천천히 음계를 따라 짚기 시작했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저절로 노래가 된다.

200석 남짓한 홀 안엔 타티아나가 부르는 노래와 함께하는 피아노 소리만이 가득했다.

알레한드로는 이 공간에서 자신의 심장 소리마저 방해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넋을 놓고 타티아나가 하는 연습을 보던 알레한드로는 이윽고 그녀가 무슨 이유로 이런 진귀한 장면을 보여 주는 것인지 이해했다.

‘평소 이렇게 연습한다는 의미인가…….’

타티아나는 적나라하게 자신이 평소 하는 연습을 보여 주었다.

적당한 퍼포먼스 같은 것이 아니라는 걸 피아니스트인 알레한드로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이건 기욤 감독이 요청했던 대로 연습 장면을 보여 주겠다는 의지와 동시에 재미있는 건 없냐며 걸고넘어졌던 알레한드로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좋게 해석하자면 타티아나가 한 번 참고 알레한드로의 리퀘스트를 들어준 것이겠지만, 그녀의 옆모습에선 여전히 피아니스트 특유의 고집스러운 성정이 드러나고 있었다.

적어도 지금 이 연습을 이해한다면 앞으론 쓸데없이 찔러보지 말란 뜻이었다.

알레한드로는 이것이 일종의 비꼼이자 항의의 의미란 걸 분명하게 느꼈다.

아마 좋을 대로 받아들이거나 모른 척한다면 타티아나는 절대 두 번째 기회를 주지 않겠지.

‘이렇게 보면 참 신중한데…….’

파티장에선 여러 도발에도 꿈쩍 않고 현명하게 대처하더니, 이번엔 덜컥 대결하자고 으르렁거리다가 이내 진정하고는 점잖게 나무란다.

또래답게 변덕스러운 것이라 보기엔 마음에 걸리는 점이 많았다.

타티아나가 곧은 심지를 기준으로 삼으며 판단하고 결정을 내린다는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레한드로의 관심은 그녀의 심지로 향했다.

집중하는 사이 타티아나가 자신의 목소리로 손을 조율하는 일련의 연습은 모두 끝났고,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입을 열지 않고 오른손만으로 피아노를 일정한 리듬에 맞추어 누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알레한드로의 머릿속엔 타티아나의 노랫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환청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이미 그 정도로 그녀의 목소리와 피아노의 음색이 동화되어 버린 것이다.

피아니스트로서 소리에 민감한 알레한드로조차 지금 타티아나가 부린 마법엔 완전히 지배당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여기서 아무 곡이라도…….’

그런 욕심이 강하게 치밀어 오른다.

손을 조율한다는 말도 안 되는 광경을 실제로 봤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까지 확인했다.

그런데 이런 준비를 하고 막상 본론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러나 알레한드로는 이미 타티아나에게 음악으로 시비를 걸었다가 빈축을 산 바 있었다.

생각이 있는 성인이라면 절대로 지금 그녀에게 다른 리퀘스트를 할 수 없다.

‘당했나…….’

지금까지 알레한드로는 일부러 신경전을 걸면서 타티아나를 시험했다.

한 피아니스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음악을 구사하는지 알아보려면 이렇게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분석한 건 타티아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타티아나는 절대로 만만치 않은 피아니스트였고, 알레한드로가 어떤 부분에서 흥미를 보이는지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지점에 성큼 들어서선 거꾸로 알레한드로에게 일종의 테스트를 하고 있었다.

“…….”

타티아나는 손을 멈추고 조용히 알레한드로를 돌아보았다. 무슨 말이라도 하려면 해 보라는 듯하다.

알레한드로가 여기서 입을 연다면 타티아나는 잔뜩 비웃으며 그의 바람을 들어줄 것이다.

그리고 알레한드로는 손 하나 까딱해 보지 못하고 영원한 패자가 될 터다.

이건 대결이 아닌 일방적인 시험이었다.

만약 대결을 해서 피아니스트로서의 역량의 차이로 진다면 억울하지라도 않을 텐데, 지금은 순전히 알레한드로 본인의 욕심이 그를 패배의 길로 밀어 넣고 있었다.

깊은 고뇌의 시간이 3초 정도 지났을 때였다.

{여기까지 할까요?}

타티아나는 뒤끝이 긴 사람은 아니었다. 처음으로 미소를 보이며 타티아나가 몸을 돌려 카메라 쪽으로 앉았다.

기욤이 스프링처럼 튀어 나가며 극찬을 쏟아 냈다.

{좋은 장면이 찍혔습니다! 베르체노바 씨!}

{평범하게 독주곡을 연주하는 편이 어땠을까 하…….}

{아뇨! 괜찮습니다. 이쪽이 훨씬 더 신비롭고 아름답게 보일 겁니다. 제가 장담하죠.}

{그, 그래요?}

그의 엄청난 칭찬에 타티아나는 약간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의도치 않은 반응이었나 보다.

타티아나는 기욤에겐 적당한 영상만 남겨 주고 메인 메뉴는 알레한드로로 삼으려는 속셈을 지니고 있었던 듯했다.

기욤이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타티아나를 치켜세우는 동안에도 그녀는 알레한드로에게 시선을 보내왔다.

타티아나는 자기가 아니다 싶은 것에는 강경하게 반응하면서도 본성은 정말 착한 사람이었다.

{마술 같은 실력이네.}

{……감사해요.}

{수많은 전문가가 네 음반을 알아보겠다고 덤벼들었지만 원류가 어딘지도 못 알아낸 이유를 알겠어.}

알레한드로는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했다.

타티아나의 첫 번째 음반은 1년 동안 전 세계에 퍼져 있었는데도 연주자가 누군지, 심지어 사사한 피아니스트가 누구인지조차 가닥이 잡히지 않았다.

그건 타티아나가 스승에게서 배운 소리를 레퍼런스로 삼은 것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의 목소리를 기준으로 잡았기 때문인 듯했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부정했다.

{그건 살짝 달라요. 제가 내는 소리에서 원류를 알아보기 힘든 건 제 선생님들이 많기 때문이니까요.}

겸양의 뜻으로 들렸지만 동시에 진실임이 분명했다.

타티아나는 피아노뿐만 아니라 목소리를 내는 법 역시 누군가에게 충실히 배운 것 같았다.

알레한드로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렇게 많은 선생을 사사한 결과물을 네 나이에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게 정말 믿기지 않네……. 평소에도 항상 그렇게 감을 잃지 않으려고 하고 있는 거지?}

{음, 혼자 있을 땐 목소리를 내지 않아요.}

{뭐?}

{이미 머릿속에 있으니까요. 거기에 맞춰서 연주만 하죠.}

{……그럼 지금은 왜 낸 건데?}

타티아나는 가벼운 서비스라는 듯 웃었다.

{제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연주만 했다면 제가 뭘 하는지 페테르손 씨가 알 수 있었겠어요?}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알레한드로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 타티아나가 그냥 터치 연습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을 터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깊이를 느꼈겠지만 지금같이 혀를 내두르진 않았을 테지.

알레한드로는 타티아나가 불쾌감을 느낀 상황에서도 믿어 준 것임을 깨닫고 지금이야말로 사과할 마지막 찬스임을 느꼈다.

{미안했어. 네 실력을 알아보고자 했던 건 맞는데…… 난 이런 방법밖에 몰라서.}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저도 화답했잖아요?}

변명조가 섞인 사과였는데도 타티아나는 쿨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곤 그녀 역시 옅은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저야말로 사과를 드리고 싶어요. 가볍게 하신 말씀에 너무 과민하게 반응했다고 생각해요. 약간 예민해져 있었던 것 같아서……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야. 괜찮아, 베르체노바. 난 욕을 얻어먹을 각오까지 하고 있었거든. 정말이야.}

{그럼 해도 되나요?}

{?}

난데없는 물음에 알레한드로는 당황해서 얼어붙었다.

평생 누군가에게 욕먹는 걸 무서워해 본 적이 없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이상했다.

알레한드로가 입만 벙긋거리고 있는 모습을 웃으며 지켜보던 타티아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스스로 했던 말을 회수했다.

{물론 안 되겠죠.}

{뭐…… 아니, 네가 그러고 싶다면…….}

{아뇨. 그게 아니라 제 오빠한테도 아직 못 해 봤거든요.}

{……?}

영어로 소통하니까 말이 이상하게 해석되는 건가? 러시아어로 해야 하나?

하지만 농담을 거는 와중에도 은근히 거리를 두는 타티아나가 사람들이 많은 여기서 단둘이 러시아어로 속닥이는 걸 허락할 것 같진 않았다.

파티장에서 타티아나가 가출한 적이 있다는 폭탄 발언을 했던 때가 떠올랐다.

그것도 혹 오빠와 관련된 일인지, 여러 궁금증이 있었지만 프라이버시에 관한 걸 깊게 캐물어 볼 순 없었다.

‘어쨌든 한숨 돌렸나.’

타티아나는 적당히 사과를 받아 주려는 것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너무 편하게 가까워지려고 하면 안 되겠지만, 알레한드로는 일단 이쯤에서 괜히 타티아나를 더 자극하진 않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었다.

{그럼 다음은 페테르손 씨 차례예요.}

{베르체노바. 마지막으로 궁금한 게 있어.}

{무엇인가요?}

알레한드로는 목소리를 낮추며 가까이 다가온 타티아나에게 물었다.

{왜 이번엔 참지 않기로 한 거야?}

타티아나의 역린이 어디에 있는지 짐작은 할 수 있지만, 자신만의 기준으로 움직이는 그녀의 생각을 제대로 들어 볼 필요가 있었다.

다음에 같은 실수를 또 한다면 아마 타티아나는 쉽게 용서해 주지 않을 것이다. 알레한드로는 그런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타티아나는 이내 짧게 대답했다.

{피아노가 있잖아요.}

타티아나가 휘두를 수 있는 직접적인 무력은 바로 저 피아노에서 나온다.

그렇기에 성인 남성을 상대로 그녀는 이 자리에서 매듭을 지어야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그 뜻을 이해한 알레한드로가 고개를 끄덕이자 타티아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세연이 없잖아요.}

그 대답은 약간 의아했다.

확실히 타티아나가 세연을 아낀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세연 앞에선 호전적인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을 정도일 줄은 몰랐다.

에르네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그녀는 경계가 풀어진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약간 다른 감정이 엿보였다.

알레한드로는 그 감정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가늠해 봤으나 한마디로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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