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098화 (1,098/1,277)

##  1098화

이미 세연 앞에선 못 보여 줄 모습을 많이 보여 줬다. 울기도 했고, 절망감에 휩싸여 방에 틀어박혀 있기도 했었지.

그때마다 세연은 아무렇지 않게 내게 더 다가왔고, 덕분에 우린 친구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 앞에서 더 풀어진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건 아니다.

난 세연에게 주고 싶은 것들이 많다. 내 개인적인 욕심이면서 사명이자 속죄라고 생각하는 것들.

그녀가 언젠가 내 어깨를 밟고 더 높은 곳으로 향할 때, 그제야 비로소 난 진정으로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내 쪽에서 일부러 무릎을 굽혀 줄 순 없다. 내가 스스로를 낮춰 그녀에게 져 주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늘 최선을 다해 나아가고 있다.

적어도 지금은 그녀에게 있어 난 친구이자 강한 라이벌로 존재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이미지엔 연주자로서의 강함뿐만이 아니라 음악가로서의 성숙함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 내가 발끈했었다는 걸 알면 그 아이는 재미있어하겠지만…….’

보다 친밀한 모습으로 다가가면 우리 사이는 더 가까워질 수 있겠지. 그러나 그건 궁극적으로 내가 원하는 관계가 아니다.

때문에 세연 앞에선 조금 더 침착하게 신경전에 임하는 연주자처럼 굴었다.

지금도 카메라 렌즈들이 내 행동을 억제하고 있긴 하지만, 이건 세연의 존재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때문에 난 인내심을 잃고 폭발했다가 진정하고 나서도 적당히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알레한드로에게 도전적인 메시지를 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알레한드로는 그런 내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하하하. 그래, 피아노가 있고 눈치 볼 사람이 없는데 무엇이 방해되겠어?}

알레한드로는 기분 좋게 껄껄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불쑥 내게 악수를 청했다.

다시 잘해 보잔 뜻인가? 난 별생각 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강한 손아귀 힘이 느껴진다.

그는 손을 슬쩍 흔들더니 놓아주지 않고 그대로 내 손등을 위로 들었다. 이번에도 무언가 탐색하는 것 같은 기운을 느꼈다.

잠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데 그가 내 손을 더 들어 올렸다. 순간적으로 난 휙 하고 손을 뺐다.

{…….}

{왜?}

{하지 마세요.}

{경의를 표하려던 참인데.}

말없이 알레한드로를 강하게 노려보자 그는 미안하다는 듯 양손을 들어 올렸다.

손등에 키스하는 건 양 볼을 스치며 인사하는 비주처럼 흔하진 않지만 그래도 종종 하는 가벼운 인사이자 표현법이다.

경의를 표할 생각이었다는 알레한드로의 의도를 이렇게 강하게 거절하면 되레 내 쪽이 실례였다.

하지만 싫은 건 어쩔 수 없다. 카메라가 이렇게 많은데 창피하기도 하고.

‘방심할 수가 없는 사람이네.’

아르헨티나의 문화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알 바 아니다.

이렇게 갑자기 거리를 좁혀 오면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다. 의도가 어떻든 상관없었다.

난 명확하게 의사 표현을 하며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알레한드로는 조금 난처해하더니 사과했다.

{또 기분 상하게 만들어 버렸나?}

{약간요.}

{음, 이번에도 내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 같아. 미안해.}

대충 둘러대는 말 같진 않았다. 그는 정말로 내가 보여 준 것들에 감탄하고 있었으니까.

아마 진심 어린 표현을 하려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내 태도가 누그러지는 일은 없었다. 난 냉정하게 뒤편의 피아노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무언가 표현하고 싶다면 피아노로 해 달란 의미였다.

알레한드로는 내 뜻을 알아듣고는 팔짱을 끼고 고민했다.

{네가 성의를 보여 준 만큼 나도 그래야 할 것 같은데…… 솔직히 뭘 해야 할지 모르겠네. 지금 머리가 새하얗게 비어 있어.}

{답례 같은 걸 생각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렇다고 어떻게 그냥 넘어가? 나도 명색이 피아니스트인데.}

{……그럼 마음대로 해 보세요.}

지금 대결을 하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알레한드로는 지금 아무 대응도 하지 않으면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 의욕에 가득 차 있었다.

팔짱을 낀 채 피아노 앞까지 향하면서도 그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바닥을 보면서 무언가 깊게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고민은 피아노 앞에 다다를 때까지만 이어졌다.

의자에 앉은 그는 지체 없이 의자 높이를 낮춰 조절하더니 고개를 들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엔 강렬한 확신이 서려 있었다. 이거라면 날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라 장담하고 있는 것 같다.

{…….}

난 삐딱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누가 연주하든 난 늘 경청해서 듣고 거의 병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하는 편이다. 이번엔 그 평가를 조금 더 엄격하게 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내가 감상할 준비가 되고, 이어 기욤 감독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카메라 준비되었습니다. 시작하시죠.}

그 신호와 동시에 알레한드로는 부드럽게 페달을 밟으며 건반을 눌렀다.

조성을 읽기 어려운 기묘한 음향. 마치 즉흥 연주로 더듬거리며 음악을 그려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잠시 후, 허공에 둥실 떠오른 음악은 눈 깜빡하는 사이 주변을 휘어잡고 있었다.

‘불꽃을 향하여vers la flamme…….’

스크리아빈은 신과 인간 그리고 우주의 신비에 대한 탐구에 매진하던 작곡가였다.

그는 독특한 감각의 소유자로 소리와 화음에 대한 연구에도 열정적이었는데, 그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전해져 오던 음악적 틀을 부수는 데에도 적극적이었다.

그중엔 시곡이라는 형태의 곡들이 있었다. 짧고 조성이 모호하며 그 의도는 분명하지만, 결코 쉽게 이해하긴 어려운 곡들이다.

알레한드로가 연주 중인 곡은 1914년 작곡된 스크리아빈의 마지막 시곡 op.72이었다. 부제는 불꽃을 향하여.

그 제목은 단지 이 곡의 이미지를 나타내고 있을 뿐이지만, 마치 어떠한 이끌림이라도 있는 것처럼 스크리아빈은 이 곡을 작곡하고 1년 후 모스크바에서 죽었다.

‘무게가 없는 불꽃을 무겁게 연주하는 것이 쉽지 않을 텐데…….’

알레한드로는 마치 음악과 동화되기라도 한 것처럼 팔을 휘두르며 연주를 이어 나갔다.

당연히 그의 실력이 뛰어날 것이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평소 언행이 미덥지 못했던 탓인지 난 내심 그를 약간 평가 절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평가는 지금 모조리 수정되었다.

알레한드로의 실력은 내가 쉽게 평가해선 안 될 정도로 뛰어났다.

시곡이란 장르로 규정된 만큼 이 곡은 일종의 음악적 언어를 피아노로 드러내야만 했다.

연주자 고유의 소리가 담기지 않으면 제대로 음악이 형성조차 되지 않는 매우 까다로운 곡이다.

그는 내가 목소리와 피아노 소리를 맞추는 연습 장면을 보고서 이 곡을 고른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의도는 아주 명확하게 내게 다가왔다.

‘…….’

피부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서운 실력이다.

알레한드로는 고개를 까딱이며 긴 문장처럼 늘어지는 프레이즈를 연주해 나갔다.

기술적으로도 어렵고 음악성을 살리려면 더더욱 어려운 구간임에도 그는 마치 장난이라도 치듯 건반을 누르고 있었다.

그 터치에서 드러나는 이해도와 깊이는 쉽게 가늠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만약 정말 대결이라도 했다면…….’

신경전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생각만으로 이런 사람에게 대뜸 대결을 걸다니, 정말 경솔한 판단이었다.

물론 나 역시 보다 제대로 된 대결용 곡을 선곡했겠지만 지금 알레한드로 역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시곡 불꽃을 향하여는 스크리아빈이 남긴 수많은 유산 중 후기에 작곡된 뛰어난 곡이지만 이보다 더 대결에 적합한 곡들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알레한드로는 그저 내가 앞서 연주한 것에 대한 답곡을 연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난 다시 한번 그와 내 실력을 헤아려 보고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이곳 벨기에에서 앞으로 마주하는 피아노 연주자들은 모두 다 괴물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다음부턴 절대로 감정을 앞세워 발끈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난 음악에 집중했다.

‘…….’

처음엔 일렁이는 불기운처럼 희미하게만 느껴지던 음악은 이내 서서히 그 폭력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바람이 휙 불자 거기에 응답하여 불꽃이 폭발하듯 커진다. 눈이 따가울 정도로 화려한 열기가 다가왔다.

불꽃의 끝이 이곳저곳으로 흔들리며 거기에 닿는 모든 것을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공기는 물론이고 사람 역시 예외는 없다.

주변이 뜨거워졌다는 기분이 든다. 난 뜨거운 공기를 마시는 것조차 부담스러워졌다.

열풍이 휩쓸고 지나간 곳엔 뜨거운 재가 흩날린다. 알레한드로는 손바닥을 들어 재를 쓸어내리고는 탁 하고 털었다.

{이거 너무 오랜만에 쳐 보네.}

스크리아빈의 시곡, 불꽃을 향하여. 6분이 조금 안 되는 이 짧은 곡은 알레한드로가 어떤 사람인지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박수를 치고 있었다. 알레한드로는 내가 그럴 줄은 몰랐다는 듯 약간 놀란 눈으로 보더니 피식 웃었다.

***

기욤 메를랑은 진땀을 빼고 있었다.

바네사 왕비가 오프닝 영상을 제대로 만들길 원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이것이 일생일대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번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시작하기도 전부터 상당한 기대를 얻고 있었다.

참가자들의 수준이 예년에 비해 굉장히 높았기 때문이었다.

여러 곳에서 검증된 피아니스트들은 물론이고, 많은 주목을 받는 어리고 유망한 피아니스트들도 이곳을 찾았다.

올해는 쇼팽 콩쿠르도 진행되는데 이렇게 수준 높은 피아니스트들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많이 참가한 것에 대해 콩쿠르 관계자들은 한껏 고양되어 의욕적으로 일했고, 바네사 여왕 역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 첫 번째 단추가 바로 오프닝 영상이었다.

연주자들이 해외에서 와야 하기 때문에 소스를 촬영할 시간도, 편집할 시간도 부족했지만 기욤은 이 영상에 그야말로 모든 것을 걸 작정이었다.

그런데 첫 촬영부터 쉽지 않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기본적으로 피아니스트들을 상대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래도 협조적인 피아니스트들은 카메라를 들이밀면 멋진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하곤 한다.

하지만 지금 여기 있는 두 사람은 정말 카메라에 무엇이 찍히든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원래 콩쿠르 경쟁자이니 서로 경쟁심을 느끼거나 공격적인 것도 어느 정도 이해는 하지만……

알레한드로는 아예 타티아나를 자극하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 같았고, 타티아나는 절대 얌전한 성격이 아니었다.

결국 타티아나가 대결이라도 하자고 말했을 때 기욤은 여기서 막지 않으면 정말 촬영이고 뭐고 다 허사가 되리라 생각하고는 필사적으로 말렸다.

‘제발.’

찍어야 할 다른 피아니스트들도 많지만, 알레한드로와 타티아나는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적격인 피아니스트들이었다.

기욤은 반드시 이 두 사람을 오프닝 영상에 포함하고 싶었다.

각자 연습하는 것은 물론이고 나이 차이도, 사는 곳도 다른 두 연주자가 진지하게 대화라도 하고 있는 모습을 담을 수 있다면 무척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서로 거의 싸우려고 드니 기욤으로선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그냥 최대한 싸우지만 않도록 중재하면서 각각 촬영할 생각이었는데, 막상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자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가 바뀌었다.

‘정말 거짓말 같군.’

신경질적으로 알레한드로를 대하던 타티아나는 노래를 하며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고, 잔뜩 날이 서 있던 분위기를 순식간에 가라앉혔다.

기욤은 허밍을 하는 피아니스트는 몇 번 봤지만 타티아나처럼 노래하는 피아니스트는 처음 보았기에 그 모습이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알레한드로는 그 이상의 감상을 느꼈는지 정식으로 타티아나에게 사과했다.

기욤의 눈엔 그가 완전히 항복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타티아나도 웃으며 그의 사과를 받아 주었고, 다음으로 알레한드로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의 연주 역시 훌륭했고, 아주 좋은 장면이 찍혔다.

‘피아니스트들의 교류라는 건가?’

분명 서로 잡아먹을 것처럼 으르렁거렸던 두 사람은 피아노 소리가 오고 가자 마치 거짓말처럼 서로를 알겠다는 듯 금방 화해했다.

타티아나는 알레한드로에게 박수를 보냈고, 두 사람이 서로를 인정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 사이에 있는 존중과 균형은 전체적인 분위기를 평온하게 만들었다.

망하기 직전까지 갔던 대치가 이렇게 쉽게 풀릴 수도 있다는 걸 기욤으로선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어쨌든 상황이 진정되어서 기뻤다. 비로소 그는 두 사람에게 다음 장면 연출을 요청할 수 있었다.

{연습 장면 촬영은 여기서 마치고, 다음은 밖의 테이블에서 찍도록 하죠. 괜찮겠습니까?}

{그럽시다.}

{그럼 잠시 쉬고 계시죠. 촬영 장비들을 거두고 다시 세팅해야 하니까요.}

알레한드로는 짧게 고개를 까딱이고는 홀 밖으로 나갔다. 그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면서 기욤은 안심했다.

느낌이 좋았다. 다음 장면은 가볍게 찍고 바로 마치면 될 것 같았다. 기욤은 팀원들에게 다음 촬영에 대한 지시를 내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밖으로 나왔을 때 두 사람의 분위기는 매우 진지하고 무거웠다.

기욤은 카메라를 들이밀고 대화를 자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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