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112화 (1,112/1,277)

##  1112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첫 라운드는 하루 2세션으로 진행된다.

각 세션은 오후 3시 그리고 저녁 8시에 시작되는데, 세연은 저녁 세션의 첫 순서였다.

이른 저녁을 먹고 5시쯤이 되자 호스트 패밀리의 멜리아 아주머니가 세연보다 더 바쁘게 뛰기 시작했다.

{세연 양, 드레스랑 가방은 차에 실었고…… 혹시 모르니 두통약도 준비했어요. 컨디션은 어때요?}

{정말 좋아요!}

{다행이네요.}

한국에 있는 어머니가 같이 왔더라도 이 정도로 꼼꼼하고 적극적으로 챙겨 주었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멜리아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세연은 일부러 더 활발하게 대답하며 움직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더 에너지를 얻기도 했다.

완벽한 준비를 마친 후 세연은 멜리아가 운전하는 차에 올랐다. 콩쿠르가 진행 중인 플라지 빌딩까진 30분 정도 걸린다.

목적지로 가는 사이 멜리아는 세연이 혼자서 조용히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덕분에 세연은 이동 중에도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자신의 레퍼토리를 차분하게 정리하면서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도착하기 직전, 세연은 방해받지 않기 위해 무음으로 해 두었던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잠깐 사이 수십 통이나 되는 메시지와 전화가 와 있었다. 모두 세연을 응원하는 사람들에게서 온 것들이었다.

세연은 전화로 목소리를 들으면 지금 이 텐션이 깨져 버릴 것 같은 기분에 모두에게 메시지로 답장을 보냈다.

친한 학교 친구들에게 답장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열심히 잘하겠다고 하면 될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몇몇 사람에겐 바로 메시지를 보내지 못하고 고민했다.

그중 한 명은 김종혁이었다.

[시차 계산하다가 귀찮아져서 그냥 대충 보낼게. 연주 전에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잘해. 응원할게.]

김종혁은 항상 그렇듯 친오빠처럼 짓궂고 유쾌했다.

세연은 미소를 머금으며 그에게 어떻게 장난을 칠까 고민하다가 그렇게 계산이 어려우면 차라리 어제 보내지 그랬냐고 핀잔을 보냈다.

다음으로 확인한 건 박성재 교수의 메시지였다.

[지금까지 잘해 왔단다. 그러니 연습했던 대로 하면 분명 만족할 수 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음을 의심하지 말거라.]

그 메시지를 보자마자 약간 부족했던 자신감이 꽉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박 교수는 세연이 콩쿠르에서 무조건 좋은 결과를 얻길 바라지 않았다.

그건 처음 세연을 맡았을 때부터 일관적으로 보였던 태도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세연은 더더욱 좋은 결과로 보답하고 싶었다.

세연은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결국 열심히 잘해 보겠다는 짧은 메시지만 보낼 수 있었다. 제일 좋은 건 역시 무대에서 음악으로 보여 주는 일이었다.

마지막은 타티아나의 메시지였다.

[상황이 어떠신지 몰라 전화 대신 메시지만 남겨요. 혹시 전화해도 괜찮은 상황이라면 답장을 해 주세요.]

같은 참가자이다 보니 타티아나는 세연의 입장을 조금 더 잘 헤아리는 부분이 있었다. 세연은 웃으며 답장했다.

[이제 막 플라지 빌딩에 도착했어. 전화할 틈은 없을 것 같아.]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세연은 거기에 휩쓸리지 않도록 마음을 가다듬었다.

잠시 후, 타티아나에게서 새 메시지가 날아왔다.

[잘하실 수 있을 거에요.]

마치 미래를 보고 온 사람처럼 타티아나는 확고하게 말했다. 메시지로 보는 문장인데도 그녀가 응원하는 마음이 분명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조금 후 이어서 온 메시지는 약간 더 길었다.

[전 얼마 전 세연을 만났을 때 준비를 정말 많이 하셨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신 모든 걸 보여 주세요. 응원할게요.]

세연은 조용히 그 메시지를 몇 번이나 읽었다.

어쩐지 마음이 뭉클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타티아나는 참가자인데도 마치 세연의 선배나 선생님같이 말하는 부분이 있었다.

이렇게 메시지들을 놓고 보니 그 점이 더더욱 두드러졌다.

타티아나는 쓸데없는 말들을 늘어놓지 않고 짧고 강하게 세연을 향한 믿음을 보냈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박 교수도 타티아나도 세연에게 지금껏 못 했던 걸 과하게 바라지 않았다.

그저 하던 대로 하면 자연스럽게 될 것이라고, 세연을 인정하고 믿어 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피아니스트들이 이렇게 자신을 인정해 준다는 건 더할 나위 없이 강력한 동기이자 자신감이 되어 주었다.

차에서 내린 세연은 위풍당당한 발걸음으로 플라지 빌딩으로 향했다.

무대에 서기 전 준비 과정은 무척이나 길었다. 제일 먼저 세연은 자신이 왔음을 콩쿠르 측에 알렸고, 다음으론 관계자들의 손에 이끌려 분장실로 향했다.

메이크업과 헤어 세팅을 받고 드레스를 입기까지 세연은 완벽한 관리를 받았다.

전문가들이 달라붙어 모든 것을 다 챙겨 주니 직접 해야 할 일이라곤 손톱을 다듬는 것 하나뿐일 정도였다.

{손톱은 건반을 터치할 때 영향을 주는 부분이기 때문에 저희가 어떻게 해 드릴 수가 없네요. 괜찮으신가요?}

{예, 물론이죠! 그리고 지금은 딱히 손톱 만질 생각이 없어요.}

세연은 전날 손톱을 깔끔하게 다듬었고, 지금 이 상태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이대로 연주를 해도 아무 지장이 없다는 걸 이미 집에서 확인까지 한 상태였다. 괜히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전문가들에게 철저한 관리를 받고 난 뒤엔 직원 한 명이 세연을 연주자들을 위한 개인 대기실로 안내했다.

방 안엔 피아노 한 대와 마실 물 같은 것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모든 준비가 문제 없음을 확인한 직원은 세연에게 인사하고 나가려 했다.

{여기서 준비하고 계시면 됩니다. 그럼.}

{아, 잠깐만요!}

세연은 얼른 그녀를 붙잡았다. 질문이 있다면 듣겠다는 듯 직원이 멈춰서서 세연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조금 무섭기도 했지만 세연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저기…… 제가 쳐야 할 곡은 언제 알려 주시나요?}

{무대에 오르기 30분 전에 알려 드립니다. 지금 42분이니…… 12분 후에 다른 직원이 올 겁니다.}

직원은 시계를 보면서 정확한 시간을 알려 주었다. 세연은 그 정확한 계산에 할 말을 잃었다.

{또 질문 있으신지?}

{아뇨…… 없습니다.}

{그럼.}

직원이 소리 없이 문을 닫고 나갔고, 대기실 안엔 세연 혼자 남았다.

「압박감 장난 아니야…….」

세연은 중얼거리며 피아노 앞에 앉았다.

무대에 오르기까지 1시간도 남지 않았다. 당장 손을 풀고 연습에 들어가야 하는데 머리가 살짝 어지러웠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기분이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가 그토록 악명이 높은 데엔 정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지금 세연이 겪고 있는 것이 그중 하나였다.

각 연주자가 첫 라운드에서 연주해야 할 곡은 4곡이다. 하지만 준비해야 할 곡은 6곡으로 훨씬 더 많다.

이 이상한 차이는 바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만 있는 시스템에서 비롯된다.

‘생각 이상으로 스트레스네, 이거.’

준비해야 할 6곡을 따져 보자면 요컨대 다음과 같다.

베토벤, 하이든, 모차르트의 소나타 중 하나를 골라 1악장.

자유곡 1곡.

에튀드 4곡.

이 에튀드들은 쇼팽 에튀드에서 1곡, 리스트 에튀드에서 1곡, 그리고 여러 음악가들을 두 카테고리로 나누어 각각 1곡을 고르게 되어 있었다.

첫 라운드에서 6곡을 준비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본격적인 문제는 소나타와 자유곡 그리고 4곡의 에튀드를 준비해서 목록을 제출하면 심사 위원들이 그것을 체크하고는 에튀드 중 2곡만 골라 통지해 준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무대에 오르기 정확히 30분 전에.

연주자는 선택권 없이 통지받은 대로 맞춰서 연주해야만 했고, 심사 위원이 고르지 않은 남은 에튀드들은 그대로 버려진다.

‘제발…… 쇼팽 치게 해 주세요…….’

세연은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기도했다.

누구든지 피아니스트들은 자신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곡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기껏 연습한 곡들이 버려지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스트레스인데, 심지어 그것이 제일 주력으로 삼았던 곡이라면 정말 치명적인 정신적 데미지가 될 수 있었다.

그 패닉을 이겨 내지 못하고 무대를 망치는 참가자들도 생길 정도였다.

실력과 준비성은 물론이고 순발력과 스트레스 컨트롤 능력까지.

연주자의 총체적인 능력을 평가하고 선별하는 목적을 지니고 있는 건 좋지만, 그 방식이 너무 잔인하고 가혹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측에선 규칙을 바꾸지 않고 고수해 나갔다.

덕분에 악명은 더더욱 높아져만 갔고, 연주자들은 이 콩쿠르에 도전할 때 단단히 각오를 다져야만 했다.

「으…….」

세연이 바라는 건 쇼팽과 프로코피예프의 에튀드였다. 하지만 남은 12분 내내 기도만 한다고 해서 피아노의 신이 세연의 기도를 들어줄 리 만무했다.

그래서 세연은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손을 움직여 건반을 누르자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스트레스로 굳어 있어 봐야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세연은 바쁘게 스케일 연습을 하면서 정신을 집중했다. 그녀가 피아니스트로서 해야 할 준비는 달라지지 않는다.

연습으로 12분의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세연이 피아노를 치고 있는데도 문이 벌컥 열렸다. 깜짝 놀란 세연이 돌아보자 처음 보는 직원이 그녀에게 다가와선 쪽지를 건네주었다.

{임세연 양. 연주하셔야 할 곡 목록입니다. 참고하셔서 순서대로 연주해 주시길 바랍니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종이를 받아 든 세연은 질끈 감았던 눈을 살며시 뜨며 에튀드 목록을 확인했다. 에튀드 2곡의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fryderyk chopin etude in e flat major op. 25/5

gyorgy ligeti etude n.5 “arc-en-ciel“

통지를 확인하자마자 세연은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으악!’

쇼팽은 바라던 대로니 괜찮았다. 자주 연습했던 곡이고, 손가락에 거의 각인되어 있다시피 한 곡이었다.

하지만 죄르지 리게티는 마지막에 연습해 놓은 곡이라서 다른 곡들에 비해 자신이 없었다.

‘왜 하필…….’

이 곡을 골라 준 심사 위원들이 원망스러웠지만, 그 이유를 아예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리게티 에튀드가 포함된 카테고리에 있는 작곡가들은 모두 인상파 이후 현대 음악에 가까운 곡들을 쓴 작곡가들이었기 때문이다.

심사 위원이 이 곡을 골라 주었다는 건 세연의 현대 음악 이해도를 보고 싶다는 의견이나 다름없었다. 세연의 역량을 판단하기 위해 정확하게 골랐다고 할 수 있다.

‘열심히 하긴 했는데…….’

세연은 중얼거리며 리게티의 선율을 떠올렸다.

그나마 조금이나마 알고 칠 수 있는 작곡가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리게티가 포함된 에튀드 카테고리에 있는 다른 작곡가들은 한스 아브라함센hans abrahamsen, 파스칼 뒤사팽pascal dusapin, 브루노 만토바니bruno mantovani, 올리비에 메시앙olivier messiaen, 모리스 오하나maurice ohana,에이노유하니 라우타바라einojuhani rautavaara처럼 정말 하나도 모르는 현대 음악 작곡가들 뿐이었다.

세연이 절망과 혼란을 왔다 갔다 하고 있는 사이, 세연에게 쪽지를 전해 준 직원은 세연의 상태를 살피는지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시선을 의식한 세연은 얼굴을 붉히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알겠어요. 이해했어요. 30분 준비해서 나가면 되죠?}

{그렇습니다.}

{연습 시작할게요.}

그제야 직원은 고개를 까딱이고는 문을 닫고 나갔다.

「아…….」

세연은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폐 속에 있는 모든 공기와 온몸에 깃든 모든 긴장이 빠져나가도록 계속해서 끝까지 내쉬다가 머리가 어지러워질쯤 크게 들이마셨다.

「흡.」

극단적인 심호흡은 정신을 차리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피아니스트라면 그 어떤 상황에 마주하더라도 준비한 만큼은 확실하게 보여야만 한다.

세연은 진지한 눈으로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앞으로 결정된 4곡의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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