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113화 (1,113/1,277)

##  1113화

3시에 시작된 콩쿠르 1라운드 오후 첫 세션을 전부 관람한 류카는 흡족한 기분으로 외젠 플라지 광장을 거닐었다.

‘잘 모르는 어린 연주자들이 많았는데도 기대 이상이었어.’

타티아나 한 명에게만 관심이 있어서 이곳에 왔지만 막상 보니 다른 참가자들도 굉장히 실력이 좋아서 볼 만했다.

특히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레퍼토리가 다양하기로 유명하다.

고전부터 낭만, 현대에 이르기까지 엄청나게 넓은 스펙트럼의 곡들을 연주자에게 빠짐없이 요구한다.

때문에 이 콩쿠르를 준비하는 연주자들은 모두 힘들어하지만, 청중들은 풍부하게 음악을 즐길 수 있었다.

열정적인 청중들은 적극적으로 연주자들의 실력을 가늠하고 평가하며 서로 이야기하기를 즐겼다.

인터미션 사이 류카는 청중들이 참가자들에 대해 평가하고 누가 붙고 떨어질지 내기까지 하는 것을 보며 처음엔 조금 당혹스러웠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격렬한 토론에 참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단순한 흥미 이상의 열기…….’

청중들 중엔 벨기에 현지인들이 많았고, 그들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를 매우 사랑하며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엄정하고 가혹한 평가를 통과한 연주자들은 클래식 세계에서 유명세를 얻고 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게 그들의 상식이며 문화였다.

따라서 콩쿠르는 천재들을 세상에 선보이는 등용문이고, 청중들은 그 증인이었다.

‘이 정도 자부심을 가질 만하지.’

이곳의 열정적인 분위기에 매료된 류카는 저녁에도 그 분위기에 함께할 수 있음에 기뻐했다.

사실 피곤하면 저녁 세션은 보지 않고 호텔로 가서 쉴 생각이었는데, 오후 세션을 보고 나니 그럴 생각이 싹 사라졌다. 류카의 티켓은 데이 티켓이었다.

어차피 휴가를 낸 데다 한 세션에 9유로, 데이에 15유로라서 데이로 구매했던 것인데 그 선택이 이렇게 만족스러울 줄은 몰랐다.

류카는 기분 좋게 근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플라지 빌딩 아래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빨리 저녁 세션을 보고 싶다는 생각만 머리에 가득했다. 류카는 남은 시간 동안 계속 다음 연주자들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았다.

『아, 벌써 시간이…….』

7시 30분쯤이 되자 류카는 고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은 아직도 밝았다. 날씨가 따뜻해질수록 해가 점점 길어져서 요즘은 저녁 9시가 넘어도 해가 지지 않았다.

류카의 에너지 역시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서서히 고조되는 기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플라지 빌딩의 로비엔 류카 같은 사람들이 이미 많이 모여 있었다.

각자 어떤 이유로 이곳에 왔는지 서로 설명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뜨거운 분위기였다.

아직은 간신히 점잖은 형태를 하고 있긴 하지만 류카는 이 사람들이 얼마나 정열적인지 잘 알고 있었다.

류카는 그 무리의 열기에 편승하며 8시 이브닝 세션을 기다렸다.

『류카 씨.』

5분쯤 지났을 때 누군가가 류카를 불렀다.

프랑스 여행객인 류카는 벨기에에서 누가 자신을 부른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 그쪽을 바라보았고, 곧 몇 시간 전 사귄 친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 기욤.』

『역시 저녁에도 오실 줄 알았습니다. 휴가까지 내신 분이 데이 티켓을 안 사셨을 리가 없죠.』

기욤은 웃으며 손에 든 팸플릿을 팔랑거렸다.

류카는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 그와 악수했다.

원래는 같이 식사라도 하고 싶었는데, 첫 세션 도중 기욤은 갑자기 바쁜 일이 생겼다면서 처리하고 오겠다며 나갔었다.

『바쁘신 일은 잘 끝났습니까?』

『예, 사실 별로 바쁜 일도 아니더군요. 왜 괜히 오라 가라 하는지, 원……. 두 명이나 못 봐서 손해가 막심합니다.』

『하하하, 오후 세션 마지막 두 명이 정말 잘 쳤는데 말이죠.』

『그렇습니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처리해서 다시 돌아왔다면 다행이다. 류카는 기욤과 함께 조금 더 조용한 곳으로 갔다.

어차피 연주 영상은 전부 녹화되어 있으니 못 본 두 연주자의 무대는 지금 스마트폰으로 봐도 상관없지 않냐고 묻자 기욤은 고개를 저었다.

『놓친 무대는 다음에 다시 보기로 하고…….』

기욤은 자신의 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듯 나지막이 물었다.

『앞에 놓인 무대에 신경 써야죠. 저녁엔 어떻습니까? 눈여겨보시는 연주자라도 있습니까?』

『음…… 딱히 없군요.』

저녁 세션에 나올 6명의 연주자는 전부 생소했다. 류카가 고개를 젓자 기욤이 웃었다.

『류카 씨는 한 사람만 보고 휴가를 냈다고 하셨으니 말이죠.』

『아뇨, 꼭 그런 이유 때문인 건 아니고.』

여전히 류카는 타티아나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자체를 즐기고 있기도 했다.

때문에 다른 연주자들에게도 충분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 단지 신경 써서 봐도 그렇게 특별하게 주목할 만한 부분이 없었을 뿐이다.

조금 미안한 기분도 들지만, 류카는 자신의 느낌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솔직히 저녁 6명의 프로필을 상세히 봐도…… 직접 들어 보지 않고선 잘 모르겠더군요.』

『맞는 말씀이십니다. 들어 보지 않으면 모르죠.』

기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으나 그보다 더 재미있는 걸 알려 주겠다는 듯 손가락을 흔들며 말했다.

『하지만 과거의 행적을 보며 기대할 수 있는 경우가 있기도 하죠.』

『뭐, 그건 그런데…….』

『예컨대 이 연주자는 어떻습니까? 첫 번째.』

뻔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길래 뭔가 싶었는데 난데없이 기욤이 짚은 연주자는 류카가 상상도 못 했던 인물이었다.

한국에서 온 열일곱 살의 어린 피아니스트. 아직 음악원에 다니고 있지도 않으니 여학생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고, 그 뒤에 있는 과거의 행적들도 특별할 것 없었다.

때문에 류카는 저녁 세션의 6명 중 이 피아니스트를 제일 신경 쓰지 않았다.

『아까부터 궁금했었는데, 이 이름 정확히 어떻게 읽는 겁니까?』

『임세연이라는 발음일 겁니다.』

아직 이름도 똑바로 모를 정도로 류카는 별로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기욤은 정반대 의견 같아 보였다.

기욤의 심미안이 꽤 대단하다는 걸 아는 류카는 그를 무시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번엔 조금 이상하다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잘 모르겠습니다.』

『역시 그렇죠?』

『전 기욤 씨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군요……. 과거 행적을 보며 기대할 수 있다기엔 이 연주자는 너무 어린데요.』

그가 했던 말에 대한 근거로 삼기엔 너무 빈약하다. 조금 더 그럴싸한 연주자들이라면 여기 얼마든지 많다.

특히 같은 나이임을 고려하면 프로필이 훨씬 화려한 타티아나라든가.

기욤은 반박을 듣고도 기분 나빠 하지 않고 인정하며 껄껄 웃었다.

『하하하, 그렇죠. 경력이라곤 청소년 콩쿠르 경력들밖에 없죠. 그것도 규모가 있는 건 두 개뿐.』

『혹시 개인적으로 잘 아는 연주자입니까?』

『아뇨.』

기욤은 담백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이 거짓 같지는 않았다.

기욤은 음악계에 대해 아는 것이 많은 사람 같았지만 멀리 있는 임세연과 연결 고리를 가지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욤의 눈빛엔 뚜렷한 기대가 감돌고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콩쿠르 5위 그리고 포트워스 청소년 콩쿠르 2위……. 실력이 점점 좋아지고 있어요.』

그건 그렇지만 실력이 점점 좋아지고 있는 건 다른 연주자들도 모두 똑같다.

류카가 그렇게 반문하려는 순간, 기욤이 다시 이어 말했다.

『그리고 멈추지 않고 나이가 되자마자 바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출전하기까지.』

말을 뱉으려던 류카가 입을 닫았다.

기욤이 어디에서 가능성을 읽었는지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이력 말고 그 이면에 있는 어떤 거대한 의지력이 느껴진다.

류카는 조용히 팸플릿을 바라보았다.

그가 임세연을 어리고 경력도 얕다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임세연 본인도 스스로에 대해 훨씬 더 잘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괴물들만 모여드는 것으로 유명한 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도전한 것이다.

『자신이 없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보죠.』

『듣고 보니 그렇네요.』

『아니면 반드시 이렇게 해야만 할 이유가 있든가.』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반적인 의지력이 아님은 분명했다.

일단 이 콩쿠르의 예선을 뚫고 73명 안에 합류했다는 것만으로도 기본적인 실력은 인정받은 셈이다.

『어쨌거나 성장성 있는 피아니스트임은 분명하고, 오늘 첫 순서이니 재미있게 볼 만할 겁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즐기라는 듯 기욤이 류카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웃으며 손을 흔들며 나갔다.

류카는 혼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연주자들에겐 정말 중요한 각축의 순간일 텐데, 그걸 즐겁게 지켜보며 등락을 예측하는 등 가볍게 여기는 것에 대해 류카는 여전히 약간 미안함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복잡한 생각을 가져 봤자 달라지는 건 전혀 없었다.

어차피 제대로 된 심사는 심사 위원들의 몫이니 류카가 무겁게 생각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신사 숙녀 여러분, 곧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이브닝 세션이 시작됩니다. 홀로 입장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스마트폰 등 소음을 낼 수 있는 기기들은 잠시 꺼 주시고…….』

오후에 들었던 것과 같은 안내 방송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영어, 독일어 등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 안내에 따라 홀로 향한 류카는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았다.

옆자리엔 기욤이 아닌 다른 사람이 앉았다. 아마 기욤은 저녁에 다른 좌석을 구한 모양이었다.

당장 이야기할 사람은 없었지만 류카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곧 이곳에선 대화가 금지될 테니까.

연주자가 손으로 하는 이야기만 제외하고.

‘시작인가…….’

청중석이 어두워지고 모든 것들이 무대로 집중된다.

조명, 시선, 기대감, 집중력 등 홀 안에 존재하는 모든 기능과 사람들이 무대 쪽으로 에너지를 쏟아 냈다.

사회자가 나와서 세션의 시작을 알리고, 곧바로 첫 번째 레퍼토리와 연주자를 소개했다.

『박수로 맞이해 주시길 바랍니다.』

폭발적인 박수 소리와 함께 무대 위로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연주자가 걸어 나왔다.

류카는 이제 그녀의 이름을 안다. 임세연은 아직 귀엽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연주자였다. 실제로 보고도 그 감상은 별로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임세연이 꾸벅 인사를 하고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 조금씩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하이든…….’

임세연이 택한 첫 번째 곡은 하이든의 피아노 소나타 hob XVI:52.

각 연주자들의 첫 무대의 고전 소나타들은 그 연주자의 기본적인 기량을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 이 고전 소나타를 잘 치는 연주자는 이어지는 곡들도 잘하는 편이다.

그런데 임세연의 하이든 소나타는 깜짝 놀랄 정도의 웅장함과 생생함이 살아 있었다.

앞선 연주자들 그 누구와 비교해도 전혀 모자람이 없는 연주였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서로 말은 하지 않지만 무대로 향하는 청중들의 집중력이 한층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 있는 류카는 그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곳의 청중들의 눈과 귀에 세연은 이미 단단히 각인되고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콩쿠르를 젊은 연주자들의 등용문 정도라 생각하고 있었던 류카는 그보다 더 강한 무언가를 추구하는 듯한 이곳의 분위기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열정은 단순히 준비된 연주자들에게 향하는 기대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바로 이 자리에 반짝이며 빛을 내는 연주자들이 있고, 음악의 신에게 선택받은 것에 대해 청중들은 감탄과 선망을 보낸다.

따라서 콩쿠르는 곧 시대의 별을 탄생시키는 용광로였고, 청중들은 열과 압력이 응축된 불길이었다.

모두가 각자 역할을 정확하게 알고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류카 역시 새롭게 부여받은 자신의 역할을 느끼며 눈도 깜빡이지 않고 세연의 무대를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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