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6화
아르헨티나 출신의 알레한드로 페테르손.
열 살에 모차르트 협주곡으로 데뷔하였으며, 열두 살에 부에노스 아이레스 고등음악원에 입학해 피아노를 배웠고, 이후 러시아 모스크바 음악원과 독일 쾰른 음대를 거치며 각국의 피아니즘을 섭렵한 천재였다.
마누엘이 알레한드로를 처음 본 것은 쾰른 음대에서였다.
‘그땐 세상에 이런 천재도 있구나 싶었지…….’
쾰른 음대 피아노과는 독일인은 물론이고 세계 유수의 유학생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천재는 발에 차일 정도로 널려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알레한드로의 실력을 유독 뛰어나서 돋보였다.
그가 마스터에 준하는 과정을 거치는 2년 동안 피아노과에서 알레한드로 페테르손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마누엘 역시 알레한드로를 알고 있었고, 우연찮게 같은 수업을 들은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 수업에서 마누엘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그때 그가 보여 주었던 천재적인 실력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때문에 마누엘에게 알레한드로는 굉장히 높은 목표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기회가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적어도 같은 라운드까지만 가면…….’
물론 누군가 목표를 묻는다면 당당하게 우승이라고 말하겠지만, 마누엘은 알레한드로와 같은 위치에 머무는 것을 현실적인 목표로 삼고 있었다.
이런 큰 무대는 흔하지 않다.
이런 생각은 다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들켰을까 싶어 마누엘은 옆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타티아나는 이쪽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정말 대단하네.’
아담 마테유가 연주하는 약 20분 내내 타티아나는 그야말로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서 경청했다.
그사이 테이블에 턱을 괴었다가 다리를 이리 꼬았다 저리 꼬았다 하기도 한 마누엘로선 그녀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단지 가만히 있는 것만이었다면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누엘은 그녀가 멍하니 있는 것처럼 보여도 속으론 아주 냉철하고 날카롭게 들리는 모든 것을 분석 중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아직 열일곱 살. 마누엘보다 다섯 살이나 어리다. 하지만 그녀는 마누엘보다 음악을 조금 더 깊게 읽어 내고 있었다.
연주도 중요하지만 듣는 귀는 더더욱 중요하고, 그건 쉽게 얻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재능은 물론이고 클래식 음악 전반에 걸친 엄청난 공부가 따라 줘야 하는 것이다.
‘배울 점이 많다고 해야 할까…….’
직접 만나기 전까지 마누엘은 타티아나의 실력에만 흥미가 많았다. 정말 많은 사람이 그녀의 음악에 열광했고, 마누엘 역시 그중 하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만나 보니 피아니스트로서의 면모는 타티아나가 지닌 천재성 중에서도 단편적인 능력에 가까웠다.
그녀의 진정한 힘은 바로 음악에 대한 깊은 공부와 그것을 대하는 태도 등에 있었다.
그 경건한 태도를 보고도 타티아나에게 빠져들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음악가 중에는.
{베르니케 씨?}
마누엘이 멍하니 생각에 잠긴 사이 타티아나가 물었다. 정신을 차린 그는 얼른 대답했다.
{왜?}
{혹시 알레한드로에게 잘하라고 말해 줬나요?}
{……무슨 말이야 갑자기?}
{오늘 만나지 않으셨어요?}
타티아나는 마치 당연하지 않냐는 듯 물었다. 알레한드로의 무대 중계를 볼 예정이라고 말해 뒀으니 개인적인 친분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할 만도 했다.
하지만 마누엘과 알레한드로는 그 정도의 친분까진 없었다.
단지 예전에 같은 클래스에서 인사 정도만 했을 뿐이다. 알레한드로는 아마 이쪽을 기억도 못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 같은 참가자라는 위치까지 올라왔는데, 불쑥 찾아가선 잘하라고 응원한다? 솔직히 그건 좀 웃긴 일이었다.
마누엘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오늘이 아니라 저 사람이랑 직접 본 게 벌써 몇 년 전인데?}
{아, 그러시군요.}
자신이 오해했다는 걸 알고 타티아나가 납득했다.
마누엘은 만약 그녀가 자신의 상황이라면 어떻게 했을지 궁금해졌다. 음악가인 그녀의 생각과 태도는 확실히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면이 있었다.
그걸 조금 알고 싶어져서 마누엘은 슬쩍 물었다.
{이렇게 보고 있으려면 아까 찾아가서 잘하라고 했어야 했나?}
{아뇨…… 생각이 없으셨다면 굳이 그러진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타티아나도 딱히 마누엘과 생각이 크게 다르진 않았다. 단지 상황이 달랐을 뿐이었다.
{그런데 전 아까 알레한드로를 만났었거든요. 그런데 잘하라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것이 마음에 조금 걸리네요.}
지금 타티아나가 신경 쓰는 피아니스트는 알레한드로뿐만이 아니었다. 그다음에 나올 아나스타샤가 아마 더 중요하겠지. 둘의 관계도 꽤 유명했다.
원래 친구였던 두 사람은 콩쿠르에 함께 참가해서도 마찬가지였고, 각별한 그녀를 위해 타티아나는 플라지 빌딩까지 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알레한드로를 만났으나 미처 잘하라고 하진 못하고 어영부영 헤어진 모양이다.
드디어 약간 열일곱 살처럼 보인다. 마누엘은 크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 무슨 그런 걸 다 신경을 써? 혹시 잊었어? 우린 경쟁자야, 베르체노바 양.}
{그건 당연히 알죠.}
{경쟁하는 입장이라고 해도 당연히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과 같은 곳에 있고 싶으니까 응원 정도는 해 주는 게 좋긴 하지만, 그렇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타티아나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사소한 것에도 꽤 신경을 쏟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유약하거나 답답한 성격은 아니었다. 고민을 길게 한다고 해도 결정한 일에 대해선 단호하다.
{그건 그렇겠네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타티아나는 이미 이 일로 고민 같은 건 하지 않기로 정한 모양이다.
마누엘이 타티아나가 무서운 사람이라고 느낀 이유 중 하나는 그런 단호함에 있었다.
얼핏 보면 말도 붙이기 어려울 정도로 냉담해 보인다.
하지만 지금은 그 정도로 그녀가 어렵진 않았다. 농담을 건네면 받아 주기도 한다는 걸 안다.
{그렇다고 나한테 실수하라고 저주 같은 걸 걸진 말고.}
콩쿠르 참가자들끼리 적당히 할 수 있는 농담이었다. 나란히 무대에 오를 예정이니 이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타티아나의 반응은 생각과 전혀 달랐다.
그녀는 마누엘의 농담을 진지하게 들었는지 싸늘한 눈으로 무언가 생각하더니 곧 표정을 달리하며 차분하게 말했다.
{전 베르니케 씨도 잘하셨으면 좋겠어요. 준비한 바 후회 없이 완전하게 선보이시길 바라요.}
뭔가 잘못 건드린 느낌이다. 마누엘은 그녀가 오늘 우울하다고 했었던 걸 떠올렸다.
그 우울함에 지금 한 농담이 약간 얽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어렴풋이 들었다.
말실수 때문에 망한 것 같지만,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마누엘은 아예 더 과장스레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가, 갑자기 그렇게 말하니까 더 긴장되는데.}
{진심이에요.}
{뭐…… 나도 그래. 네가 어떤 무대를 보여 줄지 기대가 많거든.}
그렇게 마무리를 짓자 타티아나도 나쁘지 않게 알아들은 모습이었다. 마누엘은 간신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타티아나는 여전히 대하기 편한 상대는 아니었다. 마누엘은 수명이 줄어드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서로 잘해 보자고.}
{예.}
{일단은 지금 진행 중인 무대에 집중하고. 맞지?}
{후후.}
다행히 웃음을 끌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딱 알맞게 사회자의 안내도 끝났다.
무대 뒤에서 한 남자가 성큼 발을 내딛었다. 자신감이 느껴지는 걸음걸이였다.
알레한드로는 무대 매너도 상당히 뛰어났다.
중앙에 선 그는 정중하게 인사하고는 청중들이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도록 청중석을 좌에서 우로 쭉 훑었다.
콩쿠르인데도 마치 자기 연주회인 것처럼 노련한 모습이었다.
그가 준비한 첫 번째 곡은 라흐마니노프의 에튀드 op.39의 1번이었다.
‘마침 라흐마니노프라니…….’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수학한 적 있는 알레한드로는 라흐마니노프의 연주에 굉장히 뛰어났다.
아마 에튀드 중에서 이 곡을 제시한 콩쿠르 심사 위원들도 그의 러시아 피아니즘을 들어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알레한드로는 호쾌하게 손을 휘둘러 피아노를 연주했다.
일렁거리는 음형의 오른손과 가볍게 뛰어다니는 것 같지만 깊게 내리꽂는 왼손의 소리가 선명하게 조화된다.
알레한드로는 이 에튀드를 그저 테크닉을 과시하는 용도로 사용하지 않았다. 앞으로 있을 연주 전체에 앞선 전주곡이자 자신을 소개하는 음악이었다.
세련된 비장미가 무척 돋보였다. 심지어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인데도 조금 전 아담 마테유와의 차이가 느껴졌다.
다른 사람과 비교된다는 것은 정말 잔인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같은 피아노로 낼 수 있는 소리가 이토록 차이가 난다는 건 실력의 차이 말고는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으니까.
웅장하게 마무리된 에튀드를 들으며 마누엘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이어진 곡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6번이었다.
‘개인 프로그램 아니야?’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선 심사 위원들이 에튀드 4곡 중에서 2곡을 고르게 되어 있다.
때문에 피아니스트 측에서 아무리 신경 쓰더라도 결국 생각했던 대로 구성하긴 어려운 법이다.
하지만 라흐마니노프의 에튀드에서 베토벤 소나타로 이어지는 알레한드로의 프로그램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편안했다.
알레한드로는 운 좋게 받은 프로그램의 구성을 허투루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운도 좋고 실력도 좋네.’
치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깔끔하고 용맹한 연주다. 마치 베토벤 소나타는 이렇게 연주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 같은 멋진 연주였다.
한순간에도 몇 번씩이나 분위기가 바뀌는데도 그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고 산뜻했다.
고전 소나타는 클래식 피아니스트의 자격 증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알레한드로는 피아니스트로서 그것을 여실히 증명해 냈다.
7분 정도 되는 고전 소나타를 듣고 마치 리사이틀에 온 것 같다는 기분을 느낄 즈음, 그 생각이 깨진 건 2악장 없이 다른 곡으로 넘어간 덕분이었다.
‘전 악장을 다 연주하지 못한 건 알레한드로도 아쉽겠는데.’
이렇게 멋지게 시작해 놨는데 중간에 끊어야 한다는 건 정말 아쉬운 일이다.
그 아쉬움을 다시 음악으로 풀어 버리겠다는 듯 알레한드로는 곧장 이어서 다음 곡인 드뷔시의 에튀드 7번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부제는 반음계에 대하여. 그 부제에 걸맞게 엄청난 속도로 반음계 스케일이 약동하기 시작했다.
‘이건 진짜 테크닉 과시네.’
끊임없이 진행되는 무궁동perpetuum mobile 형식의 에튀드다.
여기엔 어떠한 음악적인 묘수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압도적인 속도와 테크닉만으로 승부할 뿐이다.
시간은 2분 정도였지만 그사이 알레한드로는 이전에 있었던 베토벤의 잔향을 깔끔하게 정돈해 버렸다.
그렇게 무대를 청소한 그는 다음으로 마지막 곡을 깔기 시작했다.
브람스의 랩소디 op.79의 1번. 알레한드로가 준비한 자유곡이었다.
엄격한 뉘앙스의 단조의 멜로디를 중심으로 장대한 음악이 펼쳐진다. 독주곡이 아니라 마치 협주곡을 마주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어둡게 시작한 랩소디는 순식간에 듣는 모든 사람들의 집중력을 빨아들였다.
‘조용해졌어.’
카페 안에 있던 모든 소음이 사라졌다. 차를 따르던 주인마저도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정도였다.
직전에 빠른 에튀드를 과시했을 땐 이 정도로 조용하지 않았다.
모두들 뛰어난 피아니스트라면 많이 보았으니 이번에도 작게 소곤거리며 의견을 나눌 뿐이었다.
하지만 이 브람스의 랩소디는 너무 압도적인 퀄리티를 가지고 있어서 다른 말을 할 여유조차 없게 만들었다.
텔레비전을 통해 들리는데도 음의 색상이 눈앞을 물들일 정도였다.
『와우.』
『브라보.』
연주가 끝난 뒤 곳곳에서 찬사가 들렸다. 넋을 놓은 사이 9분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최소 수만 명의 9분을 알레한드로가 확실히 빼앗았음을 마누엘은 확신했다.
시간을 빼앗긴 사람들은 이 피아니스트를 분명히 뇌리에 각인했을 테고, 이 콩쿠르의 주요 후보로 올려놓았을 것이다.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피아니스트가 큰 무대에서 그 실력을 보여 준 것에 대해 마누엘은 경쟁해야 할 상대라는 것도 잊고 약간의 뿌듯함마저 느꼈다.
그리고 지금은 옆에 이 감상을 공유할 최고의 상대가 있기도 했다.
마누엘은 타티아나에게 말했다.
{이렇게 본 보람이 있네.}
{그렇네요. 역시 대단한 피아니스트예요.}
타티아나는 긴말 하지 않고 바로 인정했다. 그녀도 이 정도 퍼포먼스를 보여 준 피아니스트에겐 찬사 말고는 보낼 것이 없는 듯했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기대 중인 피아니스트는 알레한드로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전 아나스타샤라면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해내? 뭘?}
{……글쎄요. 지켜보세요.}
타티아나는 확실하게 말해 주지 않고 조용히 말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