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7화
알레한드로는 겨우 20분 정도의 프로그램이었지만 가진 모든 힘을 다했다. 그 증거는 지금 떨리는 팔과 어깨로 드러났다.
그리고 그가 보인 무대의 값어치는 청중들의 리스펙트로 나타났다.
청중석을 비추는 조명이 들어오자 각각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알레한드로는 박수 소리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보이는 광경 역시 굉장히 만족스러워 미소 지었다.
‘대충 알겠네.’
알레한드로는 앞선 60명의 무대를 전부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열정적인 청중들과 심사 위원들은 거의 봤을 터. 때문에 이 반응 자체가 바로 60명과 알레한드로를 비교하는 척도라고 할 수 있었다.
이전 참가자들에 비해 얼마나 잘했는지, 24명 안에 들려면 어느 정도 수준의 연주를 해야 하는지. 알레한드로는 잘 몰라도 이 앞의 사람들은 안다.
그리고 모두가 알레한드로가 24명 안에 들어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듯 보였다.
【감사합니다.】
청중석을 향해 스페인어로 멋들어지게 인사를 보낸 알레한드로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거의 완벽했다.
심사 위원이 4곡의 에튀드 중 라흐마니노프와 드뷔시를 고른 것이 약간 아쉽긴 했지만, 그럼에도 알레한드로는 마치 원래 이렇게 정해진 프로그램인 것처럼 소화해 냈다.
베토벤 소나타도 무척 마음에 들었고, 브람스의 랩소디는 지금까지 연습했던 것 중 최고였다.
그간 여러 콩쿠르에 참가한 경험을 근거로 만들어진 직감은 그에게 반드시 통과할 것이라는 확신을 주고 있었다.
당당한 발걸음으로 알레한드로는 연주자 대기실로 돌아왔다. 안에 있던 홀 직원들이 박수를 쳐 주었다.
『좋았어요.』
{브라보.}
여러 언어로 된 찬사였으나 알레한드로는 대부분 알아들었다. 그는 짙게 웃으며 인사에 화답했다.
그러나 길게 인사할 틈은 없었다. 대기실 벽 쪽에 삐딱하게 서 있는 한 사람이 알레한드로의 시선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베이지색 드레스를 입고 화장을 한 아나스타샤는 로비에서 만났던 때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꾸며 놓으니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즈마일로바.”
알레한드로는 일부러 아나스타샤를 성으로 불렀다. 러시아의 방식이 아니었지만 그녀의 기분을 살짝 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나스타샤는 대답도 하지 않고 그냥 알레한드로를 힐긋 보기만 했다. 무슨 용무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방금 연주를 마치고 왔는데, 너무 삭막한 반응 아닌가.
그래도 알레한드로는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 가고 싶어서 일단 눈에 보이는 대로 칭찬했다.
“드레스 멋지네.”
“고맙습니다.”
여전히 시큰둥한 대답이었다.
알레한드로는 약간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다.
로비에서 그가 친한 척을 했을 때도 그리 기분이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지금은 분명히 달갑잖아 하는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예상컨대 그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타티아나가 무슨 이야기를 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알레한드로는 타티아나를 약간 의심할 수밖에 없었지만 마지막에 좋게 헤어졌던 그녀가 험담을 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리고 말로 상대를 깎아내리는 건 정면에서 할 수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행동이다.
며칠 전 타티아나는 그야말로 정면에서 알레한드로를 들이받은 적이 있는 거물이었다.
불만이 있다면 직접 이야기했지 아나스타샤를 데리고 가서 따로 말할 사람이 아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본 알레한드로는 또 다른 가설을 하나 떠올렸다.
어쩌면 타티아나가 험담이 아니라 변호를 해 줬을지도 모르겠다는 가설이다. 아나스타샤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지금 삐딱한 것이고.
물론 근거라곤 지금 직감으로 느끼는 분위기 하나뿐이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직접 묻자니 비협조적인 아나스타샤가 대답해 줄 리 만무했고.
때문에 알레한드로는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다.
“들었어 혹시?”
“마지막 곡만 약간요.”
주어진 연습 시간을 꽉 채우면 이전 사람의 연주를 들을 틈도 거의 없는데, 아나스타샤는 미리 나와서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알레한드로는 그녀의 평도 듣고 싶었다. 얼른 말해 보라는 눈치를 주자 아나스타샤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나쁘지 않았어요.”
“뭐야, 평가가 박한데?”
“제가 원래 성격이 좀 그래서.”
아나스타샤는 스스로를 나쁘게 말하는 데에도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상황을 곤란하게 해서라도 알레한드로와 더 대화하기 싫다는 느낌이 팍팍 느껴졌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는 평가만으론 부족하다. 솔직하지 않은 느낌도 들고. 때문에 알레한드로는 조금만 더 물어보기로 했다.
“괜찮아. 난 긍정적인 성격이니까 좋게 받아들일게.”
“…….”
“아무튼 이제 나랑 이야기할 생각이 들었나 보네. 그렇지?”
알레한드로는 은근히 그렇게 상황을 정의하면서 몰아갔다. 보통은 이 정도면 아차 하는 사이 그의 언변에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듣자마자 인상을 쓰더니 사납게 말했다.
“방금 그 말 때문에 생각이 싹 사라졌네요. 전 실력과 성품을 구분 지어서 봐요.”
“그게 무슨 말이야?”
“피아노 좀 잘 친다고 해서 사람이 달리 보이겠어요?”
말문이 턱 막힐 정도로 공격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알레한드로는 그녀의 말 자체엔 동의했다.
사람을 볼 땐 다각도로 봐야 한다. 그건 앞으로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도 중요한 부분이었다.
“정말 현명한 방식이긴 해. 피아노 잘 치는 쓰레기들도 많으니까. 앞으로도 그대로 지켜 나갔으면 좋겠네. 그런데 난 피아노도 잘 치고 인격자이기도 한데?”
“우웩.”
“요즘 애들은 정말 어렵네…….”
어지간하면 적당히 맞장구쳐 줄 만도 한데……. 너무 적나라한 거부 반응이 연달아 들이닥치자 아무리 넉살 좋은 알레한드로라도 버티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기분 나쁘다는 듯 말했다.
“애 취급 마세요. 전 다음 참가자니까.”
“어이쿠, 실례했네. 그럼 이번 네 차례 때 나보다 잘해 봐. 그럼 내가 선배라고 불러 줄게.”
이렇게 된 이상 남은 건 하나뿐이라고 생각하며 알레한드로는 대기실에 있는 모니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모니터는 무대와 피아노를 비추고 있었다.
“아까 실력과 성품은 달리 봐야 하느니 어쩌니 했지만, 사실 이 장소에선 조금이라도 실력이 높은 쪽이 하는 말이 옳은 거고 선배니까. 그렇지?”
일단 아나스타샤는 절대 만만한 성격이 아니었고 머리 회전도 엄청 빨라서 구슬리기도 어려웠다.
결국 실력을 견주고 나서야 제대로 된 이야기가 가능할 것 같았다.
그리고 이렇게 미리 말해 놓아야 잠시 후 아나스타샤가 자기 순서를 마치고 났을 때 할 말이 있었다.
여러 계산을 가지고 알레한드로는 그녀에게 약간 내기를 걸듯 제안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살짝 눈가를 찡그린 채 알레한드로를 보더니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혹시 타티아나에게도 그런 소리 했어요?”
“응……? 아니.”
“다행이네요.”
아까 로비에서 아나스타샤를 데리고 갔던 타티아나가 무슨 말을 했을지 알레한드로가 궁금해하는 것처럼 아나스타샤 역시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이나 대화 등을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알레한드로는 이 대화의 주도권이 이제야 약간 자기 쪽으로 넘어왔다고 느끼며 웃었다.
“하하, 당연히 타티아나에겐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지. 말 안 해도 어차피 나와 비슷한 부류라서…….”
“저기요, 잘 모르고 말씀하시는 것도 그쯤 하세요.”
그러나 그의 웃음은 아나스타샤의 싸늘한 한마디에 뚝 끊어졌다.
저번 촬영 때, 타티아나는 자신의 연습을 보여 주며 피아노와 육체를 완벽하게 통제하면서 반사조차 억누를 수 있음을 설명해 준 적이 있었다.
광기 어린 그 모습에서 알레한드로는 그녀가 정말 피아노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타티아나는 그런 스스로를 약간 감추고 싶어 했다. 친구들에겐 보통 사람으로 있고 싶어서 보여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알레한드로는 아나스타샤도 모르는 타티아나의 진면목을 자신만큼은 조금 더 이해하고 공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그야말로 착각이었다. 수 년간 타티아나를 바로 옆에서 지켜본 아나스타샤가 그녀의 특별함을 몰라볼 리 없었다.
“얼핏 보면 타티아나는 피아노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죠. 그 애는 피아노에 집중하지 않는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니까.”
“그래, 그 집중력은…….”
“하지만 그것만 보고 판단하는 건 그 애를 손톱만큼도 모르는 거예요.”
아나스타샤는 코웃음 치며 알레한드로를 비웃었다.
“페테르손 씨가 말하는 기준 같은 것, 타티아나는 이미 넘어간 지 오래니까요.”
알레한드로는 순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해 몇 번이나 되뇌고 나서야 짚이는 부분을 떠올릴 수 있었다.
피아니스트에겐 피아노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그 진리에 대해 알레한드로와 타티아나는 의견을 함께한다.
그러나 진리를 깨닫고 계단을 딛고 서면 담 너머로 보이는 것들이 있기도 했다.
타티아나는 스스로를 엄격하게 관리하면서도 타인에게 그 기준을 강요하지 않았다.
신앙 깊은 성직자가 성당을 떠나 사람들을 마주하러 가는 것처럼 그녀는 음악가들이 왜 음악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고뇌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타티아나는 아직 어리고, 답을 내지 못했으며, 자신을 피아노에 몰두시켜야만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아보는 사람들은 알아보는 것이다. 그녀가 쉽게 음악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아나스타샤는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듯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 타티아나는 단 한 번도 당신처럼 그저 단순화한 논리를 진리처럼 들이민 적 없어요.”
알레한드로는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명백한 그의 패배였다.
아까 한 말들은 전부 실언이 되었고. 지금 아나스타샤가 뭐라고 욕을 해도 그는 할 말이 없었다.
묵묵히 이어질 질타를 기다리고 있는데, 대화가 너무 길어졌는지 직원이 아나스타샤를 불렀다.
{준비하십시오, 아나스타샤가 세르게예브나 이즈마일로바 양.}
{예.}
아나스타샤는 짧게 대답하고는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알레한드로의 곁을 막 스쳐 지나갈 때, 그는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내가 조금 방해가 된 것 같네.”
“조금?”
피식 웃으며 되물어 본 아나스타샤는 이내 손목을 탁탁 털더니 말했다.
“뭐, 상관없어요. 지금 실력을 증명해야 할 상황이라는 건 잘 아니까요.”
그 말만을 남기고 그녀는 문 앞으로 가선 똑바로 섰다. 그리고 잠시 후 사회자가 이름을 호명하자 당찬 걸음으로 무대로 향했다.
알레한드로는 멍하니 모니터를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상당한 실력자라는 건 이미 어느 정도 예감했었다. 하지만 성격도 이렇게 만만찮을 줄은 미처 몰랐다.
타티아나도 대단했었던 걸 생각하면 과연 친구는 닮는 것인가 싶기도 했다.
‘일단 한번 지켜볼까…….’
알레한드로는 옆의 의자를 끌어와선 아예 앉아 버렸다. 아예 여기서 그녀의 연주를 다 지켜볼 심산이었다.
무대 위의 아나스타샤는 그야말로 화려했다. 그 외모도 분위기도 사람의 눈길을 끄는 데가 있다.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연주는 그것의 백 배는 더 화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