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138화 (1,138/1,277)

##  1138화

피아니스트의 역량은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고 알려져 있다.

기악 연주라는 행위가 전신을 빠르고 정교하게 움직여야 하는 일이니만큼 당연히 몸에 문제가 있으면 연주에도 문제가 생기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사실 컨디션은 몸의 상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정신적인 부분이 그보다 더 크게 작용할 때가 훨씬 많았다.

무대에 서는 것에 대한 긴장감, 준비한 곡에 대한 자기 평가와 불신, 결과에 앞선 불안감, 초조함 등의 복합적인 나약함이 항상 피아니스트를 뒤흔들곤 한다.

그것을 자신감과 고양감으로 이겨 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항상 정신적 균형의 불안함 위에 놓여 있는 입장인 피아니스트가 무대에 오르기 직전에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다는 건 정말 위험한 일이다.

‘그 아저씨…… 정말로 날 도발해서 엿 먹이려는 거였다면 완벽하게 해냈어…….’

아나스타샤는 짜증이 나 있었다. 알레한드로의 말은 사사건건 그녀를 거슬리게 했다.

지금 느끼는 이런 짜증이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건 안다. 알레한드로는 그녀를 업신여길 생각이 없어 보였고, 되레 상당히 흥미를 가지고 대하고 있었다.

그 정도도 모르진 않았다. 타티아나가 말했던 대로 그는 그저 음악과 콩쿠르에 중점을 두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그렇게까지 이상한 사람이라고 볼 순 없었다.

하지만 너무 쉽게 타티아나를 이해한 것처럼 구는 건 참기 힘들었다.

‘뭘 안다고…….’

알레한드로는 타티아나가 자신과 같은 부류라고 말했다. 피아니스트로서의 역량이 전부고 삶의 전부를 거기에 쏟아붓는 사람들.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로 어느 정도 공감대를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데엔 이유가 있을 터다.

아마 피아노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음악관에 대한 이야기라도 했겠지. 타티아나는 평소 다른 사람들에게 하던 대로 거의 피아노에 미친 사람처럼 말했을 테고.

대부분의 음악가들은 그런 타티아나의 태도에 옴짝달싹 못 하고 붙잡혀 버린다.

자신의 생각 같은 건 모조리 뭉개지고 그녀의 사상에 동조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자신도 그랬고, 에르네스트도 그랬다. 그걸 부정할 순 없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바라는 것이 정말 피아니스트로서 성공하는 것 하나뿐인가?

‘다들 멍청이야.’

모두 속고 있었다.

타티아나는 음악 외엔 모두 불필요한 것처럼 구는 경향이 있었지만 사실 그녀는 더 중요한 가치를 위해선 거리낌 없이 음악을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무시무시한 실력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약한 몸으로 연습하다가 기절해 버릴 정도의 노력을 쏟아부어 이루어 낸 실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티아나는 아마 그녀가 옳다고 생각하는 상황이 주어진다면 고민하지 않고 자신이 이룬 것들을 내려놓겠지.

말도 안 되는 예감이지만, 아나스타샤는 그녀를 오래 지켜보면서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타티아나는 결코 피아노 치는 로봇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음악에 미친 광인 같은 것도 아니고. 정말 필요한 진리를 깨닫고는 성실하게 끝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배회하는 불쌍한 아이였다. 아무도 그걸 모른다.

‘나도 그 애에겐 짐밖에 되지 않겠지만…….’

아나스타샤는 자신만이라도 타티아나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걸 위해서라면 사사로운 감정 같은 건 접어 둘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를 따라온 입장이다. 딱히 그녀와 무엇을 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목적은 에르네스트였다.

바보 같은 에르네스트는 당시 콩쿠르 두 개를 모두 참가하여 성과를 내겠다고 으스대고 있었으니 적어도 한 부분에서 그를 꺾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콩쿠르에 나올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콩쿠르 시기가 도래한 지금은 얼굴도 보여 주지 않고 아예 자신만의 길을 찾아서 가 버렸다.

아마 그게 타티아나가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에르네스트 역시 타티아나에게 경도된 사람 중 한 명이었고, 피아노를 우선시하는 것이 곧 타티아나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때문에 지금 다른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하지만 아나스타샤의 생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당장 지금 그가 타티아나 옆에 있어 줘야 했다.

전화라도 하고 영상으로 지켜보겠다고 해 주었어야 했다. 그게 그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 부분에서 아나스타샤는 에르네스트와 큰 의견 충돌을 느꼈고, 마지막에 헤어질 때 꽤 심한 말들도 주고받았다.

그게 아나스타샤는 지금도 조금 후회되었다.

‘만약 에르네스트를 설득했었더라면…….’

조금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그와 대립하는 입장이었기에 무슨 말을 해도 진정성이 떨어졌다.

그렇게 에르네스트와의 상황도 이상하게 꼬여 버렸는데, 심지어 최근엔 임세연과의 사이도 묘하게 틀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렴풋이 느껴지는 직감이라는 것이 있었다. 타티아나는 일부러 보다 냉정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그럴 때 마음속으로 깊은 상처를 입은 상태라는 걸 아나스타샤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간신히 마음을 가다듬고 홀에 온 타티아나에게 아나스타샤는 무슨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모두가 타티아나에게 짐이 되어 버렸고, 곁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 족쇄처럼 아나스타샤의 정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연주를 망치면…….’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따질 것도 없이 당장 눈앞에 닥친 무대를 똑바로 해내지 못한다면 다음에 연주할 타티아나에게 영향이 가 버린다.

가뜩이나 마음의 짐이 많을 그 애를 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생각만으로 아나스타샤는 당차게 움직일 수 있었다.

지금 알레한드로가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의중을 가졌는지 따위는 전혀 관심 없었다.

단지 지켜보고 있을 타티아나를 안심시켜 주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잘해야 올라가서 나중에 에르네스트를 볼 수 있기도 하고.

{준비되셨습니까?}

옆에 서 있던 직원이 물었다.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름에 따라 무대로 향한 아나스타샤는 조명과 박수를 받으면서 점점 더 준비되어 가는 스스로를 느꼈다.

피아니스트로서 훈련받은 나날들이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준비해 온 음악들을 가지런히 정리한 아나스타샤는 그중 첫 번째 곡을 피아노 위에 올렸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콩쿠르 측에서 그녀에게 요구한 에튀드 2곡 중 첫 번째는 핀란드의 작곡가 에이노유하니 라우타바라의 에튀드 op.42의 6번이었다.

아나스타샤는 한숨을 작게 쉬고는 몸을 살짝 기울여 양손을 모으고 순서대로 건반을 두드려 음악을 뽑아냈다.

일반적인 조성을 넘어선 신비주의적 화성과 선율의 흐름.

오른손 너머로 왼손을 교차하며 음을 찍어 내던 아나스타샤는 지금 이 곡이 자신의 감정을 너무 억누르지 않고 적당히 쏟아 내도 잘 어울린다는 것에 안도했다.

약간의 분노와 짜증 그리고 무력감, 후회 등의 감정들은 음악을 통해 구체화되어 빠져나갔다.

그렇게 형체를 갖춘 자신의 감정들을 돌이켜 보면서 아나스타샤는 서서히 냉정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정신적 컨디션이라는 것은 참 오묘해서 이렇게 스스로를 진단하고 마음의 방향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금방 괜찮아진다.

부정적 감정조차 음악의 요소로 변환하여 써먹을 수 있다는 건 피아니스트로서 완성되었다는 증명일 터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이조차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마 타티아나도 그랬을 테니까.

***

현대곡으로 시작한 아나스타샤의 연주를 보던 마누엘은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조금 전 들었던 알레한드로의 브람스 랩소디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보통은 인상적이었던 연주가 있으면 다음 연주자가 피아노 앞에 앉아도 계속 비교하게 된다.

앞선 연주에 영향을 받지 않고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 아나스타샤는 불과 몇 초 만에 홀 내에 남아 있던 알레한드로의 잔향을 모조리 지워 버렸다.

그리고 그녀의 음악으로 모두를 끌어들이는 데에 성공했다.

차별화된 특별한 음악으로 앞서 나간다는 건 콩쿠르 참가자로서 당연히 지향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그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기 모여 있는 피아니스트들은 모두 세계적 기대를 받고 있는 괴물들이었고, 청중들은 인간을 넘어선 연주를 바라고 있었으니까.

그 엄청난 수준과 기대를 초월할 수 있을 정도로 특출해야 하는 것이다.

아나스타샤는 그 기준을 뚫고 자신의 특별함을 완벽하게 보여 주었다.

‘타티아나의 친구라길래 약간 기대는 했지만…….’

이미 타티아나가 평범한 수준을 한참이나 넘어서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까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전주곡처럼 연주되는 라우타바라의 에튀드 6번은 아티큘레이션이 까다롭거나 표현을 복잡하게 해야 하는 곡은 아니었다.

그저 음의 배치와 리듬의 흐름이 가져오는 신비로운 느낌 자체를 나열해 놓은 곡이었다. 본능적으로 음악을 휘두르기만 하면 연주자 본연의 색이 튀어나온다.

지금 아나스타샤가 흩뿌리는 음색은 아주 어둡고 짙었다. 공기의 무게가 무거워진 것 같이 느껴진다.

어떻게 이 곡으로 이 정도의 감정을 쏟아 낼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 뚜렷한 감정에 조금 익숙해져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 될 즈음, 곡의 태도가 조금 바뀌었다.

드러내던 감정을 조금 숨기고는 태연한 피아니스트의 에튀드로 돌아간다. 종잡을 수 없는 느낌에 혼란스럽다.

멍하니 듣는 사이 다시 곡은 처음의 긴장감을 일깨우더니 환영처럼 휙 하고 사라져 버렸다.

마누엘이 알기로 이 곡은 겨우 50초 정도밖에 안 된다. 그러나 피아니스트가 자기소개를 하는 데에 이보다 길 필요는 없었다.

‘…….’

엄청난 적막이 홀 안에 감돌았다. 마누엘이 앉아 있는 카페의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원래 여러 곡을 연달아 연주하여 다채로운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 이 콩쿠르 무대에선 곡과 곡 사이에 박수 등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피아니스트가 잠시 숨을 돌리는 동안 청중들도 쉬면서 함께 다음 곡을 준비하는 분위기가 있곤 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 강한 침묵이 도는 건 처음이었다.

모두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아나스타샤에게 압도된 탓이었다.

피아니스트인 마누엘조차 지금 텔레비전 너머로 들은 아나스타샤의 음악에 사로잡혔음을 느꼈다.

현장의 청중들은 아마 마누엘보다 더 강렬한 감상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고 부러울 지경이었다.

그렇게 첫 곡에 경악한 마누엘은 잠시 잊고 있던 것을 떠올리곤 빠르게 고개를 돌려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타티아나는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알레한드로가 그렇게 싫었던 걸까요.}

{……뭐?}

마누엘이 깜짝 놀라 되묻자 타티아나는 실언이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못 들은 걸로 해 달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아까 알레한드로의 연주가 끝난 직후 타티아나가 지켜보라고 했던 것은 분명 이런 의미였을 터다.

친구의 역량을 분명하게 꿰뚫어 보고 있고, 그것이 알레한드로에게도 절대 밀리지 않는다는 걸 믿고 있기에 타티아나는 차분하게 콩쿠르를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이다.

겨우 열일곱 살. 이번 콩쿠르에 참가한 사람들 중에선 가장 어린 이 피아니스트들이 대체 얼마나 준비를 하고 온 것인지 마누엘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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