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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154화 (1,154/1,277)

##  1154화

세연은 약간 긴장하고 있었다.

1라운드를 통과할 24인의 결과가 발표되는 날이라 그렇기도 했지만,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은 타티아나의 순서가 오늘 마지막인 것이 가장 컸다.

타티아나는 피아니스트로서 늘 완벽한 자기 관리를 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 엄격하고 성실한 태도는 항상 세연에게 귀감이 되어 주었다.

한때는 타티아나를 모든 조건이 갖춰진 타고난 천재라고 생각했다.

그 초인적인 실력과 흔들리지 않는 정신력을 마주해 보면 도저히 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세연에게 있어 타티아나는 피아노의 화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지키고 있는 것들을 조금씩 따라가 본 세연은 그것이 절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타티아나도 사람이다. 지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한다.

그녀라고 어째서 유혹과 충동이 없겠는가. 게다가 그녀는 긍정적인 성격인 세연과 달리 무척 신중하고 섬세한 성격이다.

세연은 신경도 쓰지 않고 넘어갈 일을 타티아나는 깊게 보고 고뇌한다.

타티아나가 고통을 느끼는 역치는 생각보다 굉장히 낮았다.

단지 늘 참고 견디고 있을 뿐이다. 이제 세연은 그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그걸 알면서도 난…….’

몇 번이고 되풀이했던 후회를 다시 느끼며 세연은 목을 축 늘어뜨렸다.

중요한 무대를 앞두고 있는 타티아나에게 하필이면 음악을 가지고 신경 쓰이게 만들다니.

만약 그 때문에 타티아나가 제 실력을 내지 못하고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같이 기권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그게 알맞은 보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타티아나와의 사이가 어떻게 될지 세연은 알 수가 없었다.

불안감과 긴장감 그리고 걱정이 뒤섞이며 세연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식욕도 뚝 떨어져서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는데, 간신히 조금 먹을 수 있었던 건 지금 혼자가 아닌 덕분이었다.

{이 애도 꽤 잘 치네.}

식사를 마치고 스마트폰으로 콩쿠르 중계를 보던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세연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나스타샤는 오후 내내 세연과 같이 있어 주었다.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동안 그녀는 중앙음악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이나 다른 콩쿠르에 대해 말해 주며 이야기를 쭉 이어 나갔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타티아나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일부러 안 하는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피한다는 느낌보다는 타티아나를 강하게 믿고 있기 때문에 굳이 이야기를 꺼낼 필요가 없다는 느낌이었다.

세연은 그런 아나스타샤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다.

‘꼴사납네…….’

교수님까지 대동해서 타티아나를 잔뜩 흔들어 놓고, 막상 그녀가 무대에 설 시간이 가까워지자 무섭고 긴장되어서 다른 친구와 함께 있고 싶어졌다.

인간이 이렇게 이기적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티아나는 이 와중에도 꿋꿋하게 혼자 무대를 준비하고 있을 텐데, 자신은 혼자서 그녀를 지켜보는 것조차 무서워하다니.

인격의 차이가 대체 얼마나 나는 건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타티아나가 잘하길 응원하고 똑바로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냥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연은 이 모든 것을 자초했으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자신에게 한심함을 느꼈다.

그때 말없이 있는 세연을 아나스타샤가 불렀다.

{세연.}

{으응?}

{스마트폰으로 보자니 조금 불편해서 난 일단 집에 가서 볼 생각인데. 넌 어떻게 할래?}

현재 시간은 8시 10분. 저녁 식사를 하고 나니 이 시간이었다.

콩쿠르 저녁 세션은 이제 시작했고 앞으로 6명이 연주를 더 해야 타티아나의 차례가 온다.

세연은 살짝 고민하며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다. 무슨 결정을 해도 상관없다는 듯 아나스타샤는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세연은 깊이 갈등했다.

아나스타샤는 지금까지 세연과 같이 있어 주었다.

그것도 상당히 신경을 써 주면서. 그게 그녀의 배려라는 것도 몰라 볼 정도로 바보인 건 아니었다.

그걸 당연하게 여기며 앞으로도 같이 있어 주길 바라는 건 너무 양심 없는 행위였다.

그래서 세연은 슬슬 연습실에나 가 있겠다고 말하려 했다.

{그럼…….}

하지만 입을 연 순간 아나스타샤의 눈빛에서 세연은 그녀가 일방적인 배려로 자신과 함께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타티아나를 잘 아는 아나스타샤에게서 확신과 믿음을 조금이나마 얻으려는 세연처럼 아나스타샤 역시 목적을 가지고 있기에 세연과 같이 있고 싶어 했다.

그 눈빛에 담긴 목적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순 없었다. 하지만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어디론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잡아 두려고 한다는 걸.

아나스타샤는 세연과 타티아나 그리고 박 교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캐묻지 않았지만, 세연이 불안감을 느끼며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는 건 분명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불안감에 져 버린 세연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 때문에 옆에 두고 지켜보고 있는 것이었다.

아나스타샤는 무대에 서는 타티아나를 외면하는 걸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배려와 엄격함을 동시에 느끼며 세연은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다. 지금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혹시 나도 같이 가도 될까?}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물어본 거야. 상관없긴 한데, 네 친구들은?}

{친구……?}

{아, 선배인가?}

아나스타샤가 이야기하는 건 양지은과 이연주였다.

두 사람은 세연의 선배로서 이곳에 함께 왔다. 같이 모여서 콩쿠르 1라운드 마지막 날 무대를 보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만약 세연이 지금 전화를 걸어서 불러낸다면 두 사람은 기꺼이 응해 주리라.

하지만 세연은 지금 그 두 사람보다는 아나스타샤와 같이 있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지금 세연의 머릿속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건 타티아나에 대한 걱정과 긴장이었다.

그걸 약간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나스타샤뿐이었다.

생각을 정돈한 세연은 확고하게 말했다.

{딱히 같이 보자는 이야기는 없었어. 아, 멜리아 아주머니에겐 이야기해 둬야겠네. 홀에는 늦게 갈 거라고.}

{결과 보러 와 주신대?}

{응.}

오늘 밤 콩쿠르 1라운드 결과로 참가자 76명 중 24명이 선택된다. 세연의 보호자인 멜리아는 꼭 같이 가 주겠다고 약속했다.

아나스타샤의 일정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이 마지막 세션만 관람하고 다시 플라지로 돌아가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끝까지 같이 다니기로 결정한 아나스타샤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럼 그때까진 같이 있자, 세연.}

{……고마워.}

세연은 중얼거리며 감사를 표했다.

지금 아나스타샤는 단순히 세연만을 위해 같이 있어 주는 것이 아니다. 약간의 감시 의도도 있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연은 아나스타샤에게 감사했다. 어른스러운 그녀가 있기에 조금 차분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식당을 나와 택시를 잡았다. 아나스타샤가 신세를 지고 있는 샤르베가는 택시로 불과 10여분 밖에 걸리지 않는 곳이었다.

아무 선물도 없이 다른 사람의 집에 찾아간다는 것이 세연은 약간 걱정이었으나, 아나스타샤는 지금 그렇게 시간을 보낼 상황은 아니니 괜찮다며 그대로 직행했다.

샤르베가의 사람들은 세연을 무척 환영해 주었다.

{레아 샤르베야. 반가워!}

{임세연이에요. 한국에서 왔어요.}

{오, 한국! 그렇지 않아도 지금 연주하는 게 한국 피아니스트던데.}

대학생인 레아는 산뜻하게 세연을 안내했다. 거실의 텔레비전에선 콩쿠르 중계가 진행되고 있었다.

레아가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아는 사람이니?}

{어…… 잘 몰라요.}

세연은 저번 환영 파티장에서 사람들을 잔뜩 소개받았긴 했지만 솔직히 잘 기억하지 못했다.

지금 연주하는 사람도 박경민이라는 이름만 알 뿐이었다.

세 사람은 나란히 소파에 앉았고, 이어 샤르베가의 아주머니가 과일과 마실 것을 가져와 주었다.

세연은 친절한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선 어쩔 줄 몰라 했다.

예전 같았으면 훨씬 더 활발하게 나섰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위축되어 있는 세연으로선 어색하지 않게 웃는 것이 최선이었다.

간신히 사과를 하나 집어 먹고 있는 사이 아나스타샤와 레아가 이야기했다.

{식사는 했어?}

{응. 네가 친구랑 먹고 온다고 해서. 이 친구였구나?}

{맞아.}

세연은 그냥 이럴 거면 식사는 이곳에 와서 할 걸 그랬다고 생각하며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

박경민은 굉장한 피아니스트였다.

들리는 사운드로 보아 아마 박 교수의 제자는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훌륭한 교육을 받은 사람임이 분명했다.

선명하고 교과서적인 연주는 고전 소나타를 연주할 때 특히 빛났다. 세연은 멍하니 지켜보다가 연주가 모두 끝난 후 박수를 쳤다.

레아 역시 찬사를 보냈다.

{이야, 정말 깔끔하네.}

{그러게.}

{어떻게 생각해? 통과할 것 같아?}

{그건 나도 모르지.}

이 정도로 잘 쳤는데도 심사 결과는 알 수 없다는 말에 레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의 말은 사실이었다.

기계와 같이 연주를 잘 해냈다고 해서 콩쿠르에서 1등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세연의 의견 역시 아나스타샤와 비슷했다.

박경민의 연주는 분명 흠잡기 어려울 정도로 깔끔했지만, 그 깔끔함은 세연의 흥미까지도 하얗게 칠해 버렸다.

다음 무대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그리 크게 들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던 세연은 지금 남을 평가하고 있을 때가 아니란 걸 떠올리며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쉬는 시간 없이 바로 다음으로 올라온 건 영국의 피아니스트, 루시 스튜어트였다.

{저 사람도 꽤 잘할걸.}

아나스타샤가 어디 지켜보자는 듯 말했고, 그 말대로 루시는 유감없이 실력을 보여 주었다.

루시 스튜어트라는 피아니스트를 지금까지 잘 몰랐던 세연은 세상에 이런 대단한 사람이 많다는 걸 새삼 느끼면서 감탄했다.

지금까진 정말 유명한 피아니스트들이나 타티아나만을 바라보며 연습해 왔다.

그러나 정말 큰 콩쿠르에 와 보니 좁은 시야에 매몰되어 있다간 정말 큰일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많았다.

그 후로도 콩쿠르는 계속 진행되었다.

미국의 앤서니 마셜의 연주는 그 키와 덩치만큼이나 파워풀해서 모두를 전율하게 만들었고, 일본의 시라이시 타츠야는 힘없어 보이는 외모와 다르게 테크니컬한 연주를 해 지켜보는 이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세연은 옆에 있는 아나스타샤, 레아와 함께 조금씩 의견을 나누면서 중계를 지켜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머릿속엔 타티아나에 대한 생각이 가장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어떤 연주도 세연의 신경을 돌려놓지 못했다.

타티아나의 차례가 가까워지자 긴장되기 시작했다.

‘지금 대기실에 가 있겠지…….’

마지막으로 남은 건 독일의 마누엘 베르니케와 타티아나뿐이다.

아마 대기실에서 이미 타티아나는 에튀드 곡까지 받고 연습하고 있을 터였다.

지금 그녀가 어떤 기분으로 어떤 연주를 하고 있을지 세연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불안한 기분으로 옆을 보니 빈 물컵을 들고 있는 아나스타샤가 보였다.

그녀는 그리 내색하지 않고 있었지만 옆얼굴에서 긴장하고 있는 게 보였다.

세연은 다시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다음으로 무대에 오른 건 마누엘 베르니케였다.

클래식 피아니즘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의 연주자인 만큼 마누엘의 연주는 아카데믹하고 수준이 매우 높았다.

현장에서 들리는 박수 소리가 그의 성공을 증명했다.

그리고 마지막.

본래 한 세션에 6명씩 무대에 오르는 일반적인 진행대로라면 이번에 인터미션이 있어야 했지만, 이번 마지막 세션은 7명이기에 인터미션 없이 끝까지 진행되었다.

저녁 10시 30분. 시간도 많이 늦었고 음악을 원하는 욕망이 사그라들 때였다.

휴식 없이 연달아 이어지는 연주는 청중들을 지치게 한다. 앞선 연주들은 충분히 수준 높았고, 그 종류도 무척 다양했다.

때문에 이미 청중들의 귀는 상당히 만족한 후였다. 아무리 맛있는 요리라고 하더라도 끝없이 나오면 질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열정적인 청중들은 그래도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서서히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건 비단 청중들만이 아니라 심사 위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뿐이다.

마지막으로 타티아나의 이름이 불리고 그녀가 무대에 오른 순간, 홀 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급변했다.

지금까지 봤던 그 어떤 무대보다 강렬한 열기가 홀 안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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