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5화
안토니오 발디니는 세계 곳곳에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주세페 베르디 음악원 피아노과 학장, ARC 예술 연구 위원회 이사, KKL 루체른 컨벤션 센터 예술 자문 위원.
그가 40년 넘게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면서 전 세계에서 인정받고 적절한 위치를 받은 것이 바로 이 직함들이었고, 안토니오는 그 모든 일을 사랑했다.
안토니오는 이번에 자신에게 맡겨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심사 위원직 또한 다른 일들 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했다.
바쁜 일정에 시달리는 안토니오에게 한 달이나 붙잡혀 있어야 하는 심사 위원 일은 사실 피해야 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 콩쿠르를 맡은 건 피아니스트로서 처음 스포트라이트 아래에 발을 내딛게 해 준 콩쿠르가 바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이기 때문이었다.
벌써 30년도 더 된 일이었지만 안토니오는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했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성공한 음악가의 삶을 살게 된 만큼 이번에도 자격 있는 피아니스트들은 반드시 발굴해 내어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안토니오가 생각하는 음악계에 헌신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자격이 없다면 어림없지.'
안토니오는 오늘 점수를 매긴 6명의 피아니스트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기준에 통과한 사람은 2명뿐이었다.
물론 심사 위원단은 총 12명이고 그중 위원장을 제외한 11명의 점수로 통과자를 정하게 되지만, 안토니오의 심사는 깐깐하고 정확하기로 유명했다.
지금까지 그가 심사를 맡았던 대부분의 콩쿠르에서 그가 고점을 주었던 연주자는 다른 심사 위원에게 낮은 점수를 받더라도 결국은 마지막에 좋은 결과를 내곤 했다.
이번에 안토니오는 그런 자신의 안목을 보다 정확하게 만들기 위해 개인 채점표를 따로 마련했다.
다른 심사 위원들과 공유해야 하는 채점표와 달리 보다 디테일한 점수를 기록하고 순위를 매길 수 있는 차트를 만들어 태블릿 컴퓨터에 넣어 온 것이다.
그의 앞에 놓인 태블릿 컴퓨터 화면엔 75명의 연주자의 점수가 모두 기록되었고, 점수에 따라 정렬되어 있었다.
이제 마지막 한 명만이 남았다.
‘베르체노바…….’
이미 안토니오는 그녀의 실력을 어느 정도 안다. 세간의 화제였던 음반도 들어 봤고, 연주회 영상도 보았다.
하지만 그건 콩쿠르가 아닌 활동들의 기록이다.
녹음이나 연주회 등에선 강세를 보이는 연주자가 수십 명의 경쟁자가 있고, 곡을 통보하는 식의 돌발 상황이 존재하는 콩쿠르에선 그 역량을 똑바로 보이지 못하고 침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각각 연주자들의 성격이나 특기가 모두 다른 탓이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 다른 심사 위원들은 그녀에게 기대가 굉장히 많았지만 안토니오는 그녀에 대한 정보를 모두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연주 실력은 물론이고 차분함과 순발력까지 모든 부분에서 연주자의 능력을 확인하는 것이 바로 이 콩쿠르의 목적이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이제 나오는군요.}
{좋아요.}
양옆의 심사 위원들이 기지개를 켜며 웃었다. 일단 가장 긴 심사의 끝이 보인다는 것에 피로를 푸는 모습이다.
안토니오 역시 피곤한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꼿꼿하게 앉아서 지켜보았다.
곧 마지막 피아니스트인 타티아나의 이름이 불리고, 라벤더색의 드레스를 입은 피아니스트가 우아한 걸음으로 무대 위로 올라왔다.
실력만이 아니라 외모로도 유명세를 떨친 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무대 중앙에 선 타티아나는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보냈다.
거의 그녀의 리사이틀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굉장한 박수가 쏟아졌다. 앞선 6명의 연주로 지쳐 있는 청중들의 에너지가 아니었다.
그만큼 타티아나의 외견과 자세엔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힘이 있었다. 그 또한 피아니스트의 능력이자 힘이다.
티켓 파워가 강한 피아니스트를 찾는 홀은 세상 어디에나 있으니까.
그것을 다시 확인하며 안토니오는 태블릿 컴퓨터의 화면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타티아나는 아직 76위였다. 과연 그녀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 그리고 24위에 들 수 있을지는 안토니오조차 모른다.
그는 즉각적으로 들리는 연주에 반응하여 점수를 매길 뿐이니까.
‘실력 한번 볼까.’
펜을 빙글 돌리며 안토니오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인사를 마친 타티아나는 천천히 피아노 앞에 앉았다.
드레스 자락을 정돈하고 의자를 높이며 자리를 잡는 행동에서조차 기품이 느껴졌다.
모든 청중은 타티아나가 준비하는 동안에도 집중력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보통은 딴청을 피우거나 잠시 한숨을 돌리기 마련이라 자연스레 어수선한데, 이번엔 분위기가 달랐다.
그렇게 완벽하게 준비된 홀 안에서 유일하게 소리 내는 것을 허락받은 타티아나는 손을 들어 올려 건반을 짚었다.
‘하이든.’
첫 곡은 하이든의 피아노 소나타 호보겐 16의 34번이었다.
마단조의 음울한 사운드가 서서히 바닥을 적셨다.
안토니오는 그 음악의 물결에 발끝이 젖는 것을 느끼며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타티아나의 하이든은 따뜻하고 촉촉했다.
이 곡은 정갈한 구조성을 탄탄하게 가지고 그 위에 감정을 올려야 한다. 하지만 그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18세기에 작곡된 고전 소나타인 만큼 연주자의 개성적인 해석이 개입될 여지가 굉장히 적었고, 때문에 꽉 막힌 음표와 박자 안에서 그저 아티큘레이션만으로 감정을 표현해 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어린 학생들이 고전 소나타에서 애를 많이 먹는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구사하는 하이든은 그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어 있었다.
음표 하나하나에 생동감이 살아 있었고, 스토리가 있고, 감정이 꿈틀거렸다. 가장 어린 참가자의 연주라곤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어지간한 프로들보다 훨씬 나은데.’
클래식 피아니스트가 하는 일은 과거의 음악을 현대에 재현하는 것으로 누구나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아티스트와 앤티쿼리언antiquarian을 구분 짓는 결정적인 차이는 그 재현도에 달려 있다.
재현도가 일정 수준을 넘어가서 생동감을 가지게 되면 음악은 시간을 초월하는 압도적인 가치를 지니게 된다.
수학과 기하학에 기본 원리를 두고 인간의 감정을 움직이는 방법을 연구한 것이 바로 클래식 음악이다.
그 원리는 시간이 지나도 전혀 위력이 쇠퇴하지 않았다. 수백 년의 시간 정도로 인간은 바뀌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건 시대를 막론하고 먹힐 수준이야.’
수백 년 전 사람들을 열광하게 했었던 사운드는 지금도 똑같은 힘을 발휘한다. 타티아나는 그 부분을 파악하고는 적절하게 휘두르고 있었다.
규칙적으로 박동하면서 가슴 졸이게 하는가 하면, 작게 사그라들면서 귀끝을 간질이다가 멀리 달아난다. 무언가에 홀린 듯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 곡에 충분히 익숙한 안토니오도 구워 삶을 정도로 매혹적인 연주를 하면서도 타티아나가 하이든의 박자를 멋대로 다루거나 리듬을 비트는 일은 없었다.
그녀의 연주는 어디까지나 정갈하고 단정했다. 그 노련함에 안토니오는 혀를 내둘렀다.
5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연주된 하이든의 소나타 1악장은 완성도가 너무 높아서 마치 단악장의 프렐류드처럼 들리기까지 했다.
연주가 끝나자 청중석에서 짝짝 하고 박수를 치는 소리가 몇 번 들리다가 급히 사라졌다.
한 번에 여러 곡을 연주하는 콩쿠르에선 보통 모든 곡이 끝나기 전엔 찬사를 미룬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이곳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도 모르게 박수를 친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타티아나는 청중석으로 살짝 고개를 돌리며 미소를 지었다.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감사를 표하는 모습이었다.
‘찬사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 이해가 가는군.’
안토니오 역시 지금 타티아나의 연주를 굉장히 고평가했다.
그 증거로 그의 개인 채점표 내에서 타티아나의 순위는 시작이었던 76위에서 급상승하여 33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단 한 곡만으로 타티아나는 중위 이상의 실력을 증명해 낸 것이다.
아직 다른 시대의 곡들을 보지 못했으므로 이 이상 높게 평가하긴 어려웠다.
안토니오는 약간 흥분한 마음을 다스리면서 다음으로 이어지는 그녀의 곡을 기다렸다.
심사 위원단에서 타티아나에게 요구한 에튀드 두 곡은 모두 낭만 시대의 곡이다. 그 첫 번째는 프란츠 리스트의 초절 기교 에튀드 5번이었다.
‘모두들 거의 만장일치로 이 곡을 꼽았지.’
타티아나가 자신의 프로그램으로 써낸 네 곡의 에튀드는 모두 매력적이고 이 콩쿠르의 목적에 부합하는 곡들이었다.
타티아나와 그녀를 코칭한 선생은 연주자로서의 실력뿐만 아니라 음악가로서도 출중한 능력을 보였다.
규칙에 따라 그중 두 곡을 고르고 나머지 두 곡은 버리게 되면 보통 연주자들이 아쉬워했지만, 이번엔 심사 위원들이 아쉬워할 정도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두 곡을 선택해야만 했고, 그중에서 가장 많은 선택을 받은 것이 바로 이 곡이었다.
이 5번 곡의 부제는 도깨비불. 까다로운 초절 기교 에튀드 중에서도 그 난이도가 매우 높은 곡이다.
어설픈 기교로는 박자를 저는 것은 물론이고 아예 손가락이 꼬여서 음을 전부 뭉개 버리는 일도 허다하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손가락으로 음들을 쭉 끌어 올렸다.
‘오전에 봤던 이즈마일로바도 대단했지만…… 러시아 음악계가 부럽군.’
열일곱 살짜리가 알캉의 곡을 연주하는 것을 보고 기절할 뻔했는데, 타티아나가 연주하는 초절 기교 에튀드도 만만찮게 수준 높았다.
어려운 스케일과 2도 트릴을 연타하면서도 타티아나는 고개를 살짝 더 들 뿐이었다.
어려운 것을 어려워 보이지 않게 연주한다는 건 그 분야를 정복한 프로페셔널이나 다름없다는 의미였다.
타티아나의 연주는 그만큼 숙련되었고 뛰어났다.
도깨비불이라는 부제에 걸맞게 타티아나가 흔드는 음들은 무대 위에서 일렁이며 춤을 추었다.
그 초자연적인 이미지엔 타티아나 역시 불꽃으로 참가하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따라 형태를 바꾸고 불티를 튀기면서도 불꽃이 하는 일은 바뀌지 않는다. 그건 바로 계속 하늘로 팔을 뻗으며 솟아오르는 일이다.
때론 장난스러우면서도 진지하게. 타티아나는 음악의 순간과 음악가의 일생을 그려 냈다.
안토니오는 당장 박수를 치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애써야만 했다.
기술적인 부분을 많이 따져 봐야 하는 에튀드였지만 이미 그런 건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타티아나는 초절 기교 에튀드의 음악성도 그 두 손에 거머쥐고 있었다.
연주가 끝나고 안토니오가 점수를 입력하자 타티아나의 순위는 19위로 치솟았다.
‘두 곡만으로 라운드 통과나 다름없군…….’
안토니오가 개인적으로 매긴 순위에선 이미 타티아나는 준결승에 진출해야 했다. 그는 결코 편애하여 점수를 주지 않았다.
되레 타티아나의 기존 명성을 생각해 더 경계하며 객관적인 심사 기준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클래식 피아니스트로서 할 수 있는 정공법으로 연주에 임했고, 안토니오는 그녀의 음악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그녀가 보여 준 음악엔 뛰어난 가치가 있었다.
다른 심사 위원들의 반응 역시 안토니오와 다를 바 없었다.
모두들 심사는 둘째 치고 타티아나라는 피아니스트에 눈이 벌겋게 되어 흥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두 번째 곡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듯 타티아나는 곧장 이어서 다음 곡을 연주했다. 라흐마니노프의 에튀드 op.39의 3번이었다.
‘마치 기대했다는 듯이 치는군.’
처음부터 이렇게 결정되어 있었다는 듯 타티아나는 전혀 흔들리지 않고 곡을 열었다.
리스트의 음색과 라흐마니노프의 음색은 다르다. 시대도 나라도 다른 작곡가들의 곡이니 당연히 달라야만 했다.
하지만 현대 음악가들은 라흐마니노프를 후기 낭만파로 엮으며 리스트와 비슷하게 다루는 일이 많았고, 그러한 연구는 잘못된 해석을 낳곤 했다.
타티아나에게 리스트에 이어 라흐마니노프가 주어진 건 그러한 차이점을 파악하고 있는지에 대한 테스트에 가까웠다.
그리고 지금, 타티아나는 그 의도를 인지하고 대답했다. 그 대답은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조금 전 리스트의 곡을 연주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타티아나는 절묘하게 라흐마니노프의 음색을 구사했다.
조금만 이해도가 떨어졌어도 대충 비슷한 스타일로 연주했을 텐데, 타티아나의 연주엔 빈틈이 없었다.
빠르게 진행되는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음향은 타티아나가 자신 있어 하는 것임이 분명했다.
매력적이고 여유가 넘치는 선율은 귀를 현혹하고 감동을 선사했다.
‘과시하는 기색도 전혀 없고…….’
이쯤 되면 화려함에 중점을 두고 연주할 만도 한데, 타티아나는 분위기에 휩쓸리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라흐마니노프다운 연주를 보여 준 것이다.
2분이 조금 넘는 짧은 곡이었지만 안토니오는 이걸로 의심을 완전히 거두었다.
타티아나는 콩쿠르 무대에서도 자신의 실력을 완전히 보여 줄 수 있는 피아니스트였다. 그야말로 스타가 될 자질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안토니오의 개인 채점표에서 타티아나의 순위는 7위가 되어 있었다.
지난 며칠간 전 세계에서 모인 천재들의 경쟁을 평가하며 안토니오는 감탄했었다. 수준 높은 연주자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틈바구니에서도 타티아나는 굉장히 높은 곳에 다다라 있었다. 안토니오는 자신이 매긴 순위를 보면서도 믿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물론 마지막 곡이 남아 있었다.
‘이 곡이 중요해.’
지금까지 타티아나가 연주한 곡들은 그녀의 평가를 계속 끌어 올렸다.
마지막 네 번째 곡도 무난하기만 했다면 타티아나는 1라운드를 가볍게 넘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선택한 자유곡은 결코 무난하지 않았다.
이 곡에 도전한 많은 연주자를 아는 안토니오는 그녀의 실력을 믿으면서도 걱정부터 앞섰다.
만약 이 곡을 제대로 연주하지 못하면 연주하는 시간 내내 지옥 같을 테고, 그건 타티아나의 순위를 급격하게 떨어뜨릴 확률이 높았다.
앞선 세 곡이 워낙 좋아서 기본적인 평가는 크게 바뀌지 않겠지만, 자칫하면 24명 밖으로 튕겨 나갈 수도 있다.
지금까지 연주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일이다.
‘제발 잘하길…….’
지금까진 탄탄한 실력을 보여 주었지만 타티아나의 마지막 선택엔 기묘한 불안감이 내재되어 있었다.
그걸 느낀 안토니오는 자기도 모르게 염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