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6화
호텔방에서 박 교수는 텔레비전을 계속 틀어 놓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중계는 그의 머릿속을 조금 맑게 해 주었다.
신예 피아니스트들의 경합에서 나오는 강렬한 에너지는 그 자체로 음악계의 생명 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오늘은 1라운드 결과도 발표되는 날이다.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교수는 제자인 세연과 함께 마지막 세션을 보고 같이 플라지로 가서 결과를 받아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모종의 일로 세연과 사이가 틀어졌고, 지금 그는 홀로 있어야만 했다.
「하…….」
박 교수는 한숨을 쉬며 소파에 몸을 뉘었다.
이 와중에도 세연은 혹시 박 교수가 걱정할까 봐 메시지로 친구인 아나스타샤와 같이 있겠다고 전해 왔다.
하지만 그녀가 굉장히 긴장하고 있다는 건 메시지에서도 느껴졌다.
박 교수는 약간의 책임감을 느끼며 테이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거기엔 따지 않은 와인병이 있었다.
마음 같아선 마시고 싶었다. 세연의 무대를 볼 때도 마셨었고.
하지만 지금 박 교수는 가급적 맨정신으로 콩쿠르 중계를 봐야 할 것 같다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카페에서 마지막으로 헤어질 때 타티아나가 했던 말이 아직도 어른거렸다.
「그럼 보여 주겠다고……?」
위험한 게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 주겠다는 그녀의 도발적인 말에 박 교수는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지금까지 그녀가 했었던 음악들은 모두 나름대로 자중하고 있었다는 걸 의미했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뒤늦게 그녀를 달래 보려 했지만, 이미 한 번 울리기까지 했던 그로선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결국 상황은 안 좋게 흘러갔고, 결국 이렇게 엉망이 되어 버렸다.
박 교수는 여러 번 후회했다.
세연에 대해서도 타티아나에 대해서도 보다 신중해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도 타티아나의 음악에 대한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왜냐면 난 그걸 잘 알고 있으니까…….’
그는 타티아나의 음악을 굉장히 높게 평가하면서도 어린 나이에 다룰 만한 음악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음악은 심원하다.
개인적 철학과 신념에 의하여 만들어진 날카로운 칼을 보는 듯하다.
무릇 음악가라면 그런 무기를 하나씩 가지고 있는 편이 좋지만, 그건 세상을 어느 정도 살아 보고 알게 된 후 천천히 형태를 만들어 나가야 하는 일이다.
열일곱 살이 지니기엔 너무 위험하고 무거운 무기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생각보다 훨씬 더 그 무기를 잘 다루었고, 비슷한 재능이 있는 세연이 거기에 매료되었다.
앞으로도 계속 잘해 나가기만 하면 상관없다.
지금 타티아나는 박 교수가 따로 간섭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훌륭한 피아니스트였고, 뭇 음악가들의 인정을 받고 있었으니까.
세연도 그렇게 될 수 있다면 피아니스트로서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생이란 것이 항상 잘 풀리기만 하는 건 아니다.
피아니스트는 쉬어야 할 일도 종종 생긴다.
꼭 사고가 아니더라도 과도한 연습으로 의한 근육 부상이나 염증, 혹은 슬럼프나 입스 같은 정신적인 문제까지.
그럴 때 음악 외의 자신을 갈고닦지 못한 음악가들은 쉽게 무너져 버린다.
음악과 함께할 땐 그토록 강했던 인간이 한순간에 어떻게 되는지 박 교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절대로 세연에게 음악이 세상의 전부라고 가르치지 않으려 애썼다.
「…….」
되도록 잊으려 했던 과거 일을 떠올린 박 교수는 의식적으로 그 과거를 지웠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세연의 일뿐이었다.
그래서 박 교수는 더더욱 콩쿠르 중계에 집중했다.
지금 세연에게 가장 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건 타티아나와 그녀의 음악이었다.
그것을 똑바로 확인하고 교수로서 해야 할 일을 할 필요가 있었다.
묘하게 타티아나는 박 교수에게 협조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기분 좋게 이해해 주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굉장히 우울해하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안타깝군…….」
박 교수는 타티아나를 불편하게 볼 수밖에 없게 된 것이 무척 안타까웠다.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생각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태도도 바르고 실력도 무척 뛰어난 타티아나가 굉장히 훌륭한 피아니스트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조심해야 할 인물이었다.
타티아나의 음악은 너무 예리하다.
다행히 그녀는 실력만큼이나 이성적인 사람이라서 아무렇게나 휘두르지 않고 칼집에 잘 넣어 다니고 있었던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긴장을 늦출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제자의 친구이자 후배 피아니스트로 마음 편하게 대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지 생각하며 박 교수는 텔레비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순서대로 피아니스트들이 자신의 실력을 보여 주곤 내려갔다.
그것이 몇 번 반복되고, 이윽고 기다리던 타티아나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
겉으로 보기에 타티아나는 어디 아픈 것 같지도 않았고,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기까지 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그 무표정한 얼굴에 드리웠던 우울함을 떠올린 교수는 지금 그녀의 모습이 약간 의아했지만 한편으론 안도했다.
깔끔하게 인사를 한 타티아나는 피아노 앞에 앉았고, 하이든의 소나타부터 연주하기 시작했다.
숨 죽인 채 연주에 집중하던 박 교수는 이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완성되었다고 해도 무방한데.」
타티아나의 음악은 그녀만의 완전한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억지로 흠을 잡으려고 해도 불가능할 정도였다.
하이든으로 보여 준 고전 음악에 대한 이해도는 그 깊이가 정말 깊어서 베테랑 피아니스트들과 비교하더라도 어깨를 견줄 수 있을 정도였다.
세상 어디에 그녀의 음악을 보이더라도 좋거나 나쁘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타티아나의 음악은 말 그대로 그녀만의 것이었다.
그 뒤에 이어진 리스트의 초절 기교 에튀드 5번과 라흐마니노프의 에튀드 op.39의 3번에 이르러서는 그 원숙함이 최고조에 다다랐다.
기교적 난해함은 가볍게 풀고 표현의 자유로움은 깊고 무겁게 제시한다.
그 이중적이면서도 아름다운 균형을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전율이 이는 것을 느끼며 박 교수는 다시 분석적으로 음악에 파고들었다.
그 해석은 굉장히 세련되면서도 작곡가의 의도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해서 매력적이었다.
그는 그녀와 하이든과 리스트 그리고 라흐마니노프를 놓고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다는 기분을 느꼈다.
그렇게 가장 잘하는 곡들로 타티아나는 자신의 가치를 충분히 입증해 냈다.
박 교수는 그녀를 다시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보여 주겠다고 했던 것은 마지막에 존재했다.
「이거였나.」
건반을 연타하는 강렬한 음형이 터져 나온다.
열광적인 광기. 격정적인 춤. 도취와 향락. 타티아나가 이전까지 보여 주었던 정갈한 느낌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성령인가…….’
프랑스 현대 음악의 거장 올리비에 메시앙의 모음곡.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스무 가지 시선vingt regards sur l'enfant-jésus. 그중 제 10곡인 기쁨의 성령의 시선regard de l'esprit de joie.
메시앙의 많은 피아노 곡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곡으로 꼽히며 그 난해함과 까다로움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피아니스트의 손에 의해 연주된 곡이다.
그야말로 현대 음악의 지평을 여는 곡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유명하고 뛰어난 곡이라고 해서 반드시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콩쿠르에서 연주하기엔 너무 위험 부담이 컸다.
이 곡의 가치를 전부 뽑아낼 수 있다면 이만한 선택도 없겠지만, 깊은 공부와 연습 그리고 재능이 필요한 곡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음악에 깊게 파고들어 내재되어 있는 이미지를 끌어내어 표현하는 데엔 어마어마한 실력과 배짱을 가지고 있는 피아니스트였다.
그녀는 주저 없이 손을 쭉 뻗어 메시앙의 음악 가장 깊은 곳에 집어넣었고, 순식간에 음악을 뽑아냈다.
‘대단하군…….’'
미친 듯이 계속되는 음악은 얼핏 마구 연주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곡엔 박자표조차 없었다.
당연히 마디의 구분도 거의 무의미했다.
음표의 속도만 주어지고 그것을 쪼개어 펼친 음악이다.
그러나 쪼개진 음 하나하나에 모두 정교한 아티큘레이션이 요구되며 거기에 유연하면서도 탄성 있는 박자감이 동반되어야만 했다.
어설프게 따라 하는 걸로는 그저 바보 같은 짓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실력 있는 피아니스트는 이 곡으로 그야말로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타티아나의 실력은 특히 그런 표현력에서 빛을 발했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뻗어 나가는 음악은 홀의 천장을 밤하늘로 채우고 그것을 넘어 우주를 투영했다.
그것을 인지한 순간 박 교수의 귀엔 이 음악이 성가로 들리기 시작했다.
예배용 음악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현대 음악임에도 결국 향하는 길은 같았다.
종교를 주제로 한 표제와 신비로운 선법의 조화는 신과의 만남 그리고 기쁨을 노래했다.
하지만 그저 찬양만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
메시앙이 종교적 테마를 가지고 한창 곡을 작곡할 무렵은 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였다.
메시앙은 프랑스인으로서 전쟁에 참가했다가 붙잡혀 포로 생활을 하기도 했고, 수용소에서도 여러 곡을 썼다.
간신히 포로에서 풀려난 메시앙은 파리 음악원의 화성학 교수가 되었지만 1944년 이 곡을 쓰기까지 전쟁으로 초토화된 파리에서 가장 어두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가톨릭에 귀의한 메시앙이 본 참극과 절망은 여러 의문을 남겼다.
그는 그 의문에 대해 필설로 형용한 적 없었지만 음악으로는 보다 솔직하고 명료하게 드러냈다.
바로 그 모순적이며 잔혹한 부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바로 이 곡을 연주하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깊은 철학적 상념이 없다면 이 곡,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스무 가지 시선은 그저 전위적인 음형만 흩뿌리는 현대 음악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분명하게 그 지점을 파고들었다.
‘무슨…….’
첫 주제에서 드러났던 어두운 뒤틀림은 그 규모를 키워서 주제를 먹어 치우진 않았지만 계속해서 등 뒤에 머물며 불안감을 일으켰다.
타티아나는 굉장히 영리하게 그 뒤틀림을 제어하고 있었다.
정열적으로 춤을 추고 있지만 그 모든 행동에서 억눌린 무언가를 느낀 건 박 교수의 착각이 아니리라.
이어진 음악은 보다 대규모의 성가로 이어졌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복하는 성가대의 노래와 새소리 그리고 별빛의 찬란함이다.
공명하는 여러 소리가 한데 얽혀 환상적인 소리를 자아냈다.
종교적으로 해석하지 않더라도 박 교수는 이 음악에서 신앙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이윽고 거대한 성가대가 우르르 몰려 나가고 무대 가운데에 등장한 것은 기쁨의 성령이었다.
성령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복하며 노래한다.
성령은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지 않았다.
광채에 휩싸인 모습은 흡사 비둘기와 닮았지만 많은 날개와 눈을 가지고 있었다.
강한 바람을 이끌고 불의 혀는 칼을 휘감고 있다.
초현실적인 무언가의 모습으로 무대를 맴돌며 기이한 노랫소리를 울리는 성령은 인간으로서 범접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네 아기 예수는 누구지?」
놀라움과 두려움이 뒤섞이며 경외라는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박 교수는 멍하니 그 장면을 지켜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