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167화 (1,167/1,277)

##  1167화

오케스트라와 협연자가 1시간 동안 알아볼 수 있는 것들은 정말 적다.

심지어 오케스트라가 사전에 협연자에 대한 정보도 거의 알지 못하고, 협연자에게 맞춰 줄 여유도 별로 많지 않은 상황이라면 더더욱.

때문에 가스파르는 리허설 시작 전에 세연에게 충분한 설명을 마쳤다.

그건 그녀를 압박하거나 겁먹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말 그대로 현실을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가 원래 좀 그렇긴 한데.’

이 콩쿠르는 이상할 정도로 연주자를 강하게 몰아붙이는 경향이 있었다.

현업으로 살다 보면 불합리한 상황에 떨어지는 일도 종종 발생하곤 하지만, 사실 이 정도로 막장이면 못 해 먹을 지경이다.

그러나 콩쿠르라는 조건 아래에서 모든 연주자들이 다 같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어떻게든 해내야 하는 것이다.

불평만 하고 앉아 있다가 집에 갈 사람은 없다. 모두 최대한의 집중력과 기량을 짜내 상황을 타개하려 한다.

강철은 용광로에서 나온다. 가스파르는 적어도 그 용광로의 불을 지피는 일에 충실해야 했다.

‘임세연이라.’

세연의 첫인상은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한국 출신의 학생 연주자.

한국 출신 클래식 음악가들의 약진이 최근 두드러지긴 하지만, 가스파르는 그것이 정말로 한국의 클래식 음악적 인프라가 강해지고 있기보다는 시험에 강한 면모가 드러나는 면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동북아 출신의 사람들은 주어진 조건에서 최고의 효율을 뽑아내는 걸 굉장히 잘하곤 하니까.

그러나 협연은 혼자서 결과를 뽑아낼 수 있는 시험이 아니다.

음악가로서의 깊이가 있는지, 아니면 순발력으로 버티고 있는지 정도는 순식간에 드러난다.

물론 순발력과 침착함도 굉장히 중요한 자질이고 콩쿠르에서 요구하는 조건들이지만 가스파르는 이 정도 상황이라면 즐겁게 해 나갈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껏 그렇게 해낸 연주자들도 많았고.

‘그런데…….’

연주하기 전부터 가스파르는 세연에게 약간의 흥미를 느꼈다.

그녀는 이런 상황이 처음인지 굉장히 당황해하고 버벅이기도 했지만 결국은 잘 알아듣고는 금방 하나하나 적응하며 자신의 일을 찾아 똑바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낙천적이고 활동적이며 머리도 좋아 보인다. 여기에 실력까지 뒷받침된다면 더할 나위 없다.

가스파르는 기분 좋게 웃으며 그녀를 피아노 앞으로 보냈다.

‘그리 어렵지 않아. 잘해 보자고.’

가스파르는 세연의 연주를 들어 본 적이 없어 실력이 어떤지 잘 모른다. 단지 여기까지 올라왔을 정도면 기본은 되어 있으리라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기본적인 실력이 있다면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은 일단 1시간 리허설로 문제없이 해낼 수 있어야 했다.

그만큼 레퍼런스가 분명하고 자주 연주되는 곡이기 때문이었다.

어린아이들도 곧잘 공연하는 곡이다. 차세대의 피아니스트를 노린다면 당연히 어렵지 않게 해내야 한다.

다만 문제는 앞서 그녀에게 말했듯 오케스트라를 얼마나 활용할 수 있느냐였다.

그저 피아노 혼자서 귀를 막고 연주하는 것이라면 문제없겠지. 그러나 이건 협연이다.

생전 처음 보는 오케스트라와 어떻게든 음악을 맞춰서 연주해야만 했다. 그러려면 피아니스트로서의 이끌림, 즉 카리스마가 있어야 한다.

물론 깔끔한 실력으로 음악을 제시하는 것도 좋겠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을 한 번에 납득시키고 데리고 가려면 긴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피아니스트의 기백이 필요했다.

그리고 세연에게선 그러한 면모가 아주 조금 엿보였다.

‘나쁘지 않은데?’

피아노 앞에 앉자마자 자신에게 맞게 세팅을 마친 세연은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가스파르와 마주 본 세연은 말이 없었다. 지금 그녀는 이미 피아니스트로서 말을 잃은 상태였다.

가스파르는 빠르게 준비된 오케스트라를 확인하고는 지체 없이 지휘봉을 휘둘렀다.

지금 가스파르가 지휘하는 음악은 우리 오케스트라는 이 음악을 이렇게 연주한다는 인사와도 같았다.

그야말로 레퍼토리에 충실한 도화지 같은 음악이다.

가스파르가 이끄는 왈로니아 로얄 챔버 오케스트라는 이런 연주를 워낙 자주 해 왔기에 자연스럽게 곡을 이끌어 나갈 수 있었다.

오케스트라가 전주를 연주하는 사이 세연은 가만히 본인의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초조해하지도 않고 눈을 부릅뜨고 어깨에 힘을 주고 있지도 않은 편안한 모습이었다.

그저 약간의 텐션만이 그녀의 등허리에 들어가 있었다. 가스파르는 그 모든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세연의 차례가 왔을 때, 마치 고무줄을 튕기듯 가스파르의 인사에 응답했다.

가스파르가 그녀에 대해 이해하기까진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좋습니다. 여기까지.}

첫 리허설이기 때문에 서로 합이 맞지 않아 중간에 실수가 나오거나 버벅인 부분도 있었지만 되레 세연이란 피아니스트의 이해에 더 도움이 되었다.

어쨌거나 10분가량 되는 1악장을 전부 연주할 수 있었던 건 굉장한 수확이었다. 그리고 세연은 오케스트라에게 확신을 주었다.

가스파르는 혼자서 모든 것을 파악하지 않는다. 그는 지휘자로서 오케스트라 단원 전체의 의견을 듣는다.

그리고 그 의견 파악은 목소리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음악이나 표정, 태도, 분위기 등 여러 가지 요소가 의견으로 전해진다.

그렇게 단원들의 종합적인 판단을 파악한 가스파르는 세연의 점수가 꽤 괜찮다는 것을 느꼈다.

이 정도면 의욕적으로 따라 줄 만하다고 생각하는 단원들도 꽤 많아 보였다.

아직은 대여섯 명 정도였지만 10분 만에 대여섯 명을 설득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세연은 그것을 해낸 것이다.

가스파르는 흡족한 미소와 함께 세연에게 말했다.

{우리 호흡이 어떤지는 서로 대충 이해한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말씀대로예요. 이해했어요. 제 호흡보다는 조금 느리네요.}

세연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눈은 어딘가 먼 곳을 보고 있었다.

방금 했던 연주를 잊지 않고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 머릿속을 정돈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정확하게 오케스트라의 상태를 파악하고는 어떻게 음악을 맞춰야 할지 가늠하는 모습이다.

이렇게 빠르게 자기 음악을 굽히는 유연함도 협연자로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긴 했다.

잘만 한다면 정말 좋은 피아니스트가 될 것 같다고 생각하며 가스파르는 웃었다. 그를 본 세연은 그 웃음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급히 말했다.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어요. 제가 더…….}

{아뇨, 그건 제가 할 말이죠.}

{예?}

가스파르가 말을 자르자 세연은 당황해했다.

지금 여기서 그녀는 가장 어리고 경험 없는 피아니스트일 뿐이다.

때문에 베테랑 오케스트라의 지휘에 맞추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방금 들어 본 그녀의 음악은 그렇게 줏대 없이 유연하기만 하지 않았다.

분명히 그녀만의 음악성을 지니고 그것을 고집 있게 관철할 실력과 의지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가스파르가 찾던 카리스마였다. 그 앞에서 나이 고하나 경험 차이 같은 것은 무의미하다.

가스파르는 그녀가 오해하지 않도록 다시 한번 반복해 말했다.

{피아니스트가 선도하면 거기에 맞추는 것 정도는 해내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세연은 이번에도 금방 말을 이해하고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어서 조금 더 해 보죠.}

{예!}

가스파르는 문 옆에 서 있는 직원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 단지 견학을 위해 있는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리허설 시작 후 정확히 1시간이 흐르면 리허설을 중단시킬 것이다.

그러니 가스파르가 조금 더 리허설을 하고 싶다고 해서 계속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주어진 시간 동안 최대한 세연이 익숙해질 수 있도록 리허설의 밀도를 높이는 것뿐이었다.

가스파르는 세연이 그것을 받아 낼 실력이 충분히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

토요일 하루는 전날의 피로를 푸는 것을 우선하며 보냈다.

물론 느긋하게 축 늘어져 쉬기만 할 순 없었다.

난 계속 악보를 읽거나 가볍게 연습을 하면서 연주자로서의 심신을 준비해 나갔다.

그전까진 연습의 대부분 시간을 1라운드에서 연주할 하이든이나 에튀드, 메시앙의 곡에 썼기 때문에 이번엔 다시 머리를 비우고 준결승에서 연주할 곡들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할 때였다.

그렇게 충실하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하루 정도는 금방 지나간다.

일단 콩쿠르 측에서 아무 말도 없는 것을 보면 내가 내일 무대에 오를 일은 없겠거니 싶었다.

약간 안심할 즈음, 아나스타샤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콩쿠르 홈페이지에 일정이 업데이트되었다는 정보였다.

“어, 정말이네.”

빠르게 홈페이지를 확인해 보니 정말로 4명의 연주자 이름이 준결승 목록에 업데이트되어 있었다.

이번엔 각 연주자들의 프로그램까지 다 결정되어 올라왔다.

아마 내가 쉬면서 준비하는 사이 저 4명에겐 독주곡 프로그램을 통보하고 오케스트라와의 리허설까지 모두 마친 모양이었다.

그중엔 내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 연락해 볼까…….’

저녁 10시. 밤늦은 시간이다.

지금 세연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갑자기 전화를 했다가 방해라도 된다면 민폐다.

하지만 세연이 내일 무대에 오른다는 것을 알고 나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난 일단 메시지부터 하나 보냈다. 그랬더니 금방 전화가 걸려 왔다.

-{타티아나! 홈페이지는 또 언제 봤어?}

{방금요.}

별것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자 세연은 살짝 흥분한 투로 빠르게 말했다.

-{바로바로 올라오나 보네? 맞아. 방금 다 끝내고 집에 돌아온 참이야.}

{괜찮으셨나요?}

-{괜찮고말고! 어떻게 했었냐면…….}

그녀는 콩쿠르 측으로부터 연락을 처음 받은 7시부터 지금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전부 이야기해 주었다.

그녀가 전해 주는 생생한 이야기는 내 준비에도 도움이 되었다.

독주곡 프로그램을 전달받은 것도 중요한 일이었지만, 제일 중요했던 건 왈로니아 로얄 챔버 오케스트라와의 리허설이었다.

-{와, 진짜로 딱 1시간만 주더라니까? 연주 중이었는데도 얄짤 없이 그만 끊는 것 있지?}

{그런 부분은 정확하네요.}

-{진짜 너무 짧은 것 아닌가 했는데…… 그래도 어떻게 되긴 하더라. 일단 지휘자님이 말보다는 음악이 앞서는 사람이라서 시간 낭비도 거의 없었고.}

말보다 음악이 앞선다. 피아니스트가 지휘자를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그보다 더 적합한 말도 없을 것 같았다.

난 대번에 그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았다.

난 피식 웃으며 그녀와 대화를 이어 나갔다.

난 준결승 준비가 어떻게 되는지 정보를 들을 수 있었고, 세연은 나와 대화하면서 조금씩 긴장을 풀어 나갔다.

시계를 확인하면서 난 그녀에게 물었다.

{그럼 내일 8시네요.}

-{응. 앞으로…… 22시간 정도 남았나?}

{잠도 주무셔야죠.}

-{그야 그렇지. 그런데 지금 잘 수 있으려나 모르겠어.}

이 밤중에 리허설까지 하고 왔으니 지금은 머릿속에 온통 소리들밖에 들리지 않아서 누워도 잠을 잘 수 있는 상황이 아닐 것이다.

그래도 난 세연이 잘하리라 믿었다.

{최상의 컨디션으로 내일 무대에 설 수 있길 바랄게요.}

세연은 잠시 말이 없다가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 진짜 열심히 할게, 타티아나.}

언뜻 내게 의지하는 것 같은 말로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난 그녀가 지금은 의존보다 훨씬 더 강한 자존감과 향상심으로 날 대하고 있다는 걸 잘 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날 무척 기쁘고 즐겁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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