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8화
5월의 일요일. 다른 사람들은 따뜻한 휴일을 만끽하고 있겠지만 내 일과엔 그리 큰 변함이 없었다.
난 오늘도 컨디션 관리만 신경 쓴 후 계속 연습에만 집중했다.
미리 순서를 알려 주면 좋겠지만, 콩쿠르 운영 측은 그렇게 하지 않았기에 정확히 얼마나 여유가 남아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며칠 치 일정을 세울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를 당장 내일 무대에 선다는 마음으로 준비해야만 했다.
이렇게 참가자를 압박하는 것도 이젠 그러려니 한다. 난 주어진 시간을 최고 효율로 사용할 수 있도록 연습에만 몰두했다.
‘세연도 이제 슬슬 마지막 준비 중이겠지…….’
그렇게 피아노에 파고드는 와중에도 가끔 시계를 보면 문득 세연이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그녀는 오늘 저녁 8시면 무대에 서야 한다.
물론 1라운드를 일찍 마쳤기 때문에 준비할 시간이 그만큼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그사이 나와 교수님 때문에 모든 시간을 연습에 투자하진 못했을 터다. 그 점이 난 조금 신경 쓰였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금방 가라앉힐 수 있었다. 어제 마지막으로 들었던 세연의 목소리에서 강한 기백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독주곡 프로그램도 통보받고 리허설까지 마쳤는데 그런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상황과 조건을 인지하고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다는 의미였다.
분명히 잘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때문에 난 더더욱 연습에 박차를 가했다.
만약 세연이 결승에 올라갔는데 내가 떨어져 버린다면 정말 그녀를 볼 낯이 없을 것 같았기에.
세연과 아나스타샤의 존재는 내가 이곳에서 좋은 결과를 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동기가 되어 주고 있었다.
‘한 번만 더 하자.’
협주곡을 다시 한번 복습하며 언제든 오케스트라와 리허설을 할 수 있도록 나 자신을 팽팽하게 준비시켰다.
난 함께할 오케스트라가 어떤 연주를 하는지 전혀 모른다.
그들과 딱 1시간 맞춰서 연주를 해내려면 방법은 둘 중 하나였다. 내가 그들에게 따라가거나, 그들이 날 따라오게 만들거나.
1시간 사이 두 가지 방법을 모두 써 보고 맞는 방법에 따라 움직여 볼 생각이었다.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당황하지 않을 수 있도록 난 모든 경우의 수를 염두에 두고 곡을 준비하고 있었다.
독주곡 프로그램 역시 마찬가지였다.
공통적으로 연주해야 할 미발표 의무곡을 포함하여 총 일곱 곡. 어떤 프로그램을 요구하더라도 바로 응할 수 있도록 연습했다.
해야 할 곡이 많다 보니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조차 별로 없었다. 물론 나만 이렇게 머리 아프진 않을 테다.
준결승 진출자 24명 모두가 같은 조건에서 비슷한 압력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걸 못 버티는 순간 나가떨어질 것이란 위기감이 확실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조금 더 집중해서 연습하려는데, 문 밖에서 약간의 소음들이 내 귀를 간질였다.
‘……?’
일요일이다 보니 밖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많았다.
내 귀는 상당히 밝은 편이라서 자동차나 산책하는 사람들의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는데, 피아노에 집중하면서 그런 잡음들은 알아서 다 걸러 내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방문 앞에서 나는 소리는 무시하기 어려웠다.
아마 데보라 아주머니가 내게 무언가 하실 말씀이 있지 않을까 싶다.
소곤거리고 계시기도 하고. 그런데 문제는 그 옆에 아주머니와 대화 중인 사람이 또 있다는 점이었다.
그 정체불명의 사람은 파스칼 아저씨나 칼스도르프 씨가 아니었다. 이 집에서 처음 듣는 남자의 목소리와 인기척이다.
난 혼자서 고민하다가 음색이 흐트러지는 것을 느끼곤 손가락을 멈추었다. 이대로 연습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
연습을 중단하자 방문 앞 소리도 뚝 멈추었다. 난 곧장 일어나선 문 쪽으로 다가갔다.
{문 열게요.}
손잡이를 잡으면서 말하고 동시에 문을 열었다. 문 앞엔 웅크려 앉은 채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명은 데보라 아주머니였는데, 다른 한 명은 누군지 모르겠다.
가만히 내려다보자 남자가 슬쩍 손을 들었다.
『아, 안녕.』
그 모습이 마치 내 눈엔 인사가 아니라 항복하겠다는 의사 표현으로 보였다.
웅크린 것만 봐도 나보다 훨씬 커 보이는 남자가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조금 어색해졌다.
연습을 방해받아서 화가 나거나 한 건 아니라는 의미로 반걸음 물러서자 두 사람이 일어섰다.
내 예상대로 아주머니 옆의 남자는 키가 무척 컸다. 고개를 들고 올려다봐야 할 정도였다.
일단 이 상황을 정리할 수 있는 건 데보라 아주머니뿐이었다. 아주머니는 빠르게 끼어들었다.
“놀랐지? 타티아나. 미안해.”
“아뇨, 괜찮아요.”
“여기는 아들 녀석, 클레망이야. 인사라도 할래? 영어는 어느 정도 알아들을 텐데.”
난 랑스가에 왔던 첫날을 떠올렸다.
데보라 아주머니는 가족에 아들이 있긴 한데 학기 중이라 집에 없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었다.
아무래도 내가 불편할 걸 생각하신 것 같은데, 사실 난 그런 걸 그리 신경 쓰지 않는 편이기도 하고…… 얼마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그럭저럭 심적인 여유도 있는 상황이었다.
사람과 인사하고 친하게 지낼 여력이 있다면 가급적 그리하는 편이 좋다.
그리고 일단 랑스가의 아들이라면 난 그에게 있어 손님일 뿐이다. 스스로의 입장을 자각한 나는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신세지고 있습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예요.}
{안녕. 난 클레망 랑스.}
{반가워요, 클레망 씨.}
{어, 어…….}
바로 이름을 부를 정도로 친한 건 아니었지만 랑스가에 신세를 지고, 랑스 부인인 데보라 아주머니를 아는 이상 아들인 그를 랑스 씨라고 부를 순 없었다.
이럴 땐 이름을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다.
클레망도 약간 어색해하긴 했지만 아주머니와 내가 빠르게 입장을 정리하자 금방 편안하게 웃었다.
난 문 너머를 일견하고는 두 사람에게 권했다.
“이렇게 복도에 계시지 마시고 들어오세요.”
“응…… 그래도 되겠니?”
이 방은 2주간 내 방으로 사용했다. 그래서 아주머니는 내 프라이버시를 지켜 주려 하셨다. 난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다행히 갑자기 손님이 와도 그리 문제 될 일이 없도록 방 안은 깨끗한 편이었다.
침대와 옷장 쪽엔 정말 아무것도 없고 피아노 옆에만 태블릿 컴퓨터와 탁자, 시계, 수첩, 펜 등 여러 가지가 몰려 있는 걸 보면 정말 내가 저기에서 거의 모든 생활을 했다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난 전기 포트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물 올릴게요? 제가 마시는 디카페인 차밖에 없지만…….”
랑스 모자는 아무거나 상관없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3인분의 차를 타면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간단하게 정리하기도 했다.
침대 맡에 걸터앉아 있던 아주머니는 한참이나 말이 없더니 이내 조심스레 내게 말했다.
“타티아나, 미안해. 신경 쓰이지?”
“예? 무슨 말씀이세요?”
“이전에 아들 녀석 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었는데…… 학기가 일찍 끝나서 와 버렸네. 이렇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
아주머니는 무척 곤란해하셨다. 혹시 콩쿠르 호스트 패밀리 규정에 자녀가 집에 있으면 안 된다는 규칙이라도 있나 싶을 정도다.
하지만 그런 규칙이 있을 리 없다. 아나스타샤와 함께 있는 레아가 있기도 하고.
“잘 모르겠지만…… 학기를 일찍 마치셨다는 건 시험 등을 일찍 끝내셨다는 말 아닌가요?”
“제출해야 할 논문이 있었는데 하루 만에 내 버렸다네?”
“그럼 잘하신 것 아닌가요?”
“모르지. 그 논문이란 걸 제대로 쓰긴 한 건지.”
뭔가 믿음이 별로 없어 보이지만 얼토당토않은 논문이었다면 학기말 과제로 받아 주지 않고 수정해 오라고 했을 것이다.
이렇게 바로 집에 돌아왔다는 것 자체가 클레망이 제대로 논문을 써 냈다는 의미였다.
클레망은 억울한 상황이었다.
학교에서 해야 할 일을 마치고 집에 왔는데 손님이 와 있다는 이유로 홀대 당한다면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아주머니께서 내가 이곳에서 조금이라도 불편하지 않길 바라시기에 이러신다는 걸 알지만, 지금은 그렇게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걸 알려 드리고 싶었다.
“아주머니께서 절 배려해 주신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전 괜찮으니 아드님을 반갑게 맞아 주세요. 그 편이 저도 좋아요.”
데보라 아주머니는 살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뜨시더니 이윽고 못 참겠다는 듯 말씀하셨다.
“어쩜! 이렇게 착하니, 응?”
“그, 그렇지도 않은데요…….”
가까이 있었으면 바로 끌어안으셨을 것 같은 반응이었다. 평범한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이렇게 반응하시니 조금 민망했다.
아주머니는 내 말을 듣곤 프랑스어로 클레망과 무어라 대화를 나누셨다.
그 대화 내용을 알 순 없었지만 조금 전과는 달리 두 사람 간의 분위기가 훨씬 나아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야기를 마치고 나서 클레망은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마 내가 잘 지내고자 한다는 걸 알아준 것 같다.
난 천천히 차를 우려낸 뒤 두 사람에게 내어 주었다.
클레망은 차를 받고도 그걸 마시지 않고 내 쪽에 흥미를 보였다. 난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붙였다.
{클레망 씨께서 거실에 있던 피아노를 이 방까지 옮겨다 주셨다고 들었어요.}
{어?}
{힘드셨죠? 고마워요.}
일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살짝 건넸더니 클레망은 갑자기 목을 까딱이더니 과장스레 말했다.
{하, 하하하. 그랬지. 그날 힘 좀 쓰느라 어깨가 빠지는 줄 알았다니까?}
분명 쉬운 일은 아니었겠지. 아마 옮기면서 불평했을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가 괜히 피아노를 옮겼다고 후회하지 않게 하는 것뿐이다.
다행히 준결승까지 올 수 있었으니 앞으로 며칠 더 이 피아노로 연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재차 감사를 표하려 하자 데보라 아주머니가 말렸다.
{그런 말 하면 이 녀석 금방 잘난 척하니까 그만두렴.}
{내가 언제요? 실제로 힘들었던 건 사실인데.}
금방 다투는 두 모자를 보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어쨌든 처음의 그 어찌 할 줄 몰라 하던 상황은 해소된 것 같다.
주말 오전, 티타임을 즐기기엔 적당한 시간대다. 랑스 모자와 난 가벼운 주제들을 가지고 이야기했다.
대부분은 클레망의 대학교 생활이나 내 출신에 대한 이야기 등이었다.
클레망은 내 나이를 듣더니 그야말로 기겁했다.
{열일곱? 그 나이에 아까 같은 피아노 연주를 한다고?}
{놀라실 정도인가요?}
{난 클래식 음악은 잘 몰라도 네가 프로급으로 잘한다는 것 정도는 알겠어.}
{과찬이세요. 칭찬으로 들을게요.}
애초에 프로란 뭘까. 음악으로 먹고 살 수 있는 것을 기준으로 친다면 이미 난 음반 수익금이나 개런티를 받아 본 적도 있으니 프로라고 해도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마음속 어딘가에선 계속 아직 날 당당한 프로 피아노 연주자라 인정하지 못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불과 얼마 전만 하더라도 난 불안정하고 충동적이었다.
마지막에 그 충동을 꺾은 것도 나 자신이긴 했지만, 멋진 대답을 찾진 못해서 결국 실수로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난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고 생각했다.
‘이 콩쿠르가 끝나면 뭐라도 될 수 있을까.’
이전까진 막연하게 했던 생각들이다. 그런데 직접 부딪쳐 보니 알 것 같았다.
확실히 큰 무대에서 큰 결정을 내리는 것만큼 스스로를 알아보는 데에 좋은 방법은 없었다.
다음 무대에선 무엇을 결정해야 할까. 난 그것을 확실히 할 수 있어야 프로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