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205화 (1,205/1,277)

##  1205화

아나스타샤와 많은 시간을 보내며 난 그녀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아마 아나스타샤도 마찬가지겠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게 된 어느 시점부터 우리 사이엔 대화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서로의 성격이나 사고방식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긴말을 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우린 입으로 하는 말 이외에도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하나 더 가지고 있기도 했다.

현 상태를 말보다 훨씬 더 잘 드러내는 이 음악 덕분에 좋았던 적도 많았지만, 대화가 더 줄어든 것 역시 사실이었다.

우린 성격적으로 효율성을 추구하도록 되어 있는지 별 이유 없이 수다를 떨거나 하는 걸 별로 즐기지 않았다.

다행히 서로 그런 부분에서 잘 맞아 눈빛과 음악만으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건 분명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친구와 나누는 이야기에 쓸데없는 순간이 있을 리 없었다.

“심사 위원단 중엔 알캉 연구를 했었던 분도 계시더라고요. 아마 아나스타샤를 붙잡고 싶어 하시지 않을까요?”

“그래?”

“그리고 모차르트의 권위자로 유명하신 분도 있고요. 그분은 아나스타샤를 상당히 도전적이라고 여기실 것 같아요.”

“완전히 찍혔다는 말이잖아.”

“좋은 의미로 찍혔을지도 모르잖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지금까지 파이널에 간 사람들 모차르트 봐 봐. 다들 얼마나 깔끔하게 쳤는데.”

우린 대기실 옆 복도에 있는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데다 굳이 이런 곳에서 나눌 필요도 없고, 경우에 따라 예민하게 흘러갈 수도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도 나도 이야기를 그만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나란히 앉아 이야기하고 웃으면서 우린 연주자로서의 공감대를 다지며 서로 곤두서 있던 신경을 느슨하게 풀어 놓을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도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안정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한결 편해진 자세로 앉아 있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슬슬 그녀를 드레스 말고 편한 입으로 갈아입히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할 때였다.

직원이 복도를 지나가다가 아나스타샤를 알아보고는 인사했다.

{훌륭한 연주였습니다, 이즈마일로바 님.}

{아, 감사합니다.}

{좋은 결과 있길 바랍니다.}

쿨하게 응원을 남기고 지나가는 직원의 뒷모습을 보면서 아나스타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조금 전 했었던 연주를 다시 돌이켜 보는 듯했다.

난 그녀가 너무나 훌륭한 연주를 해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웃으며 말했다.

“직원도 그러잖아요. 좋은 결과 있을 거라고.”

“예의상 하는 말이라는 거 모르겠니?”

“긍정적인 마인드로 들어 보세요.”

“내가 여기서 얼마나 더 긍정적이어야 하는 건데?”

독주곡을 너무 잘 해냈기에 아나스타샤도 지금은 자신감이 넘쳐흐르는 것 같았지만, 협주곡 무대에서 전의를 상실했었던 기억을 말끔히 잊어버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때문에 그녀는 지금 상황을 두고 좋아해야 할지 긴장해야 할지 약간 헷갈려하는 듯했다.

딱히 긴장할 건 없다고 생각한다. 긴장한다고 해서 앞으로 뭔가 더 잘할 수 있다거나 결과가 바뀌지도 않을 테니까.

어지간하면 독주곡들을 잘 해낸 것을 두고 기뻐하는 쪽이 좋지 않을까 싶다.

내 얼굴을 보던 아나스타샤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너랑 있으면 어쩐지 통과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

“모르는 일이잖아요? 아니면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더 들어 보세요.”

“다른 분?”

“스마트폰 전원 안 켰죠?”

아나스타샤는 대기실에서 자신의 핸드백을 가지고 나오긴 했지만 나와 이야기하는 사이 손도 대지 않고 벤치 옆에 둔 상태였다.

내가 말하고 나서야 생각났는지 그녀는 흠칫하더니 핸드백 안을 뒤적였다.

“아, 이거 켜기 겁나는데…….”

아나스타샤의 준결승 무대는 그 결과를 짐작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러니 아마 청중들의 반응 역시 굉장히 다양하게 쏟아질 것이 분명했다.

물론 아나스타샤에게 연락을 할 만한 사람들이라면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그녀를 응원하는 데에 주력하겠지만, 그래도 아나스타샤로선 어쩔 수 없이 걱정될 것이다.

난 겁먹고 있는 것 같은 그녀에게 살짝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괜찮아요. 아마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까요.”

아나스타샤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말했다.

“내가 워낙 엉망이긴 했으니 불편한 건 피하…….”

“아뇨, 제 말은 그게 아니에요.”

모차르트의 음악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아나스타샤가 협주곡에서 점수를 다 깎아 먹었다는 것 정도는 알 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하지 못할 부분은 아니다. 모스크바에 있는 친구들이나 선생님들은 아마 왜 그렇게 된 건지 듣고 싶어 할 테니까.

하지만 대부분은 모차르트보다 더 관심을 두고 있는 곡이 있을 것이다. 난 장담할 수도 있었다.

“이미 알캉으로 이전 곡 같은 건 다 덮어 버렸을 거예요.”

“뭐 얼마나 됐다고?”

“그 얼마 안 된 시간이 중요하죠. 단기간에 그 정도로 훌륭하게 수습해 냈으니 아나스타샤의 실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걸요.”

연주자의 일은 정말 위태로워서 한 번의 실수가 엄청난 실패로 이어져 평생의 커리어에 흠집을 낼 수도 있지만, 그걸 덮어씌우는 것 역시 연주자의 일이었다.

걱정 말고 일단 확인해 보라는 뜻으로 손가락으로 스마트폰을 슬쩍 가리키니 아나스타샤는 심호흡을 했다.

“켤게.”

긴장한 모습으로 스마트폰의 전원이 켜지길 기다리는 그녀 옆에 더 가까이 다가서며 화면을 같이 보았다.

잠시 후 화면이 켜지더니 갑자기 알림이 우르르 쏟아졌다. 최신 스마트폰이 버벅거릴 정도로 엄청난 양의 알림들이었다.

아나스타샤는 빠르게 화면을 넘겨 보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사이 무슨 메시지가 백 개도 넘게 왔네……. 아니, 그사이 SNS 팔로우도 이렇게 많이?”

“인기 많으시네요? 후후.”

“장난치지 마. 너도 SNS 시작하면 이 정도는…….”

내 말을 받아 주면서도 아나스타샤의 눈은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나스타샤의 굉장한 실력은 첫 무대에서부터 빛났기에 매스컴의 주목도 많이 받고 인터넷에서의 반응도 좋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처음엔 73명이나 되는 참가자들이 경쟁하다 보니 눈에 띄는 사람이 많아서 상대적으로 조금 덜 관심을 받은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런데 24명으로 좁혀진 지금, 아나스타샤가 연주한 모차르트와 알캉 사이의 간극이 상당히 흥미롭게 비춰진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2시간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졌을 줄은 미처 몰랐는지 아나스타샤는 얼떨떨해하면서 SNS를 관리하고 메시지도 하나하나 확인하기 시작했다.

난 그녀가 인기를 누리는 것에 집중하도록 가만히 두었다. 괜히 옆에서 이러쿵저러쿵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나스타샤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그녀는 깜짝 놀라더니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웃었다.

“우왓, 메시지 확인한 거 봤나 보네.”

“빠르네요. 누군가요?”

“발렌티나.”

“어서 받아 보세요.”

아나스타샤는 이제 각오가 되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스마트폰을 귀에 붙였다.

“어, 응. 방금 스마트폰 켰어……. 왜 빨리 안 켰냐고? 나 연주 끝난 지 지금 10분도 안 됐는데?”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아나스타샤의 말만 들어 보더라도 지금 무슨 대화가 오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마 발렌티나도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을 듣고는 아나스타샤의 상태를 걱정했던 모양이다.

걱정을 끼쳤다는 건 아나스타샤도 아는지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통화를 이어 나갔다.

“응. 응…… 파이널 갈 것 같다고? 그렇게 빨리 결론 내려도 되니?”

너무 성급하다는 듯 말하고 있긴 하지만 아나스타샤의 표정은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발렌티나까지 긍정적인 예상을 하니 기대감이 점점 올라가는 듯했다.

그렇게 흐뭇한 기분으로 통화하는 아나스타샤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복도 저편에서 두 남자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마침 발소리를 들은 내가 돌아보자 그중 한 남자가 알은체했다.

“오, 타티아나. 그리고 이즈마일로바 선배.”

알레한드로 페테르손이었다. 그는 첫 무대에서 아나스타샤에게 졌다며 그녀를 선배로 부르겠다고 했는데…… 그 장난을 아직도 이어 가고 있었다.

귀에 익은 목소리를 들은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들고 알레한드로를 보더니 인상을 쓰며 전화에 대고 말했다.

“어? 아니야. 이상한 사람 왔어.”

대놓고 독설을 할 정도로 아나스타샤는 알레한드로 같은 타입이 상당히 싫은 모양이다.

하지만 알레한드로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하더니 날 바라보았다. 난 그에게 개인적인 감정이 없었기에 웃으며 물었다.

“알레한드로 씨, 어쩐 일이세요?”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지금 뭘 입고 있는지 보이지 않느냐는 듯 알레한드로는 어깨를 쭉 펴더니 양손으로 스스로를 가리켰다. 그는 멋진 턱시도를 입고 있었다.

그제야 난 오늘 참가자 인선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에게 워낙 신경이 쏠려 있다 보니 다른 사람들은 생각도 못 했다.

“아, 다음 차례셨군요.”

“너 정말로 나한테 관심이 없구나……. 친구를 선배라고 부르는 남자는 꼴불견이다 이건가?”

“예? 무슨 말씀이세요? 전 그게 아니라…….”

“아니면 내가 이미 임자 있는 몸이라는 걸 알아서?”

알레한드로가 기혼자이든 아니든 내가 그에게 줄 관심의 양은 똑같다. 갑자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나서 눈을 흘기자 알레한드로는 킬킬 웃더니 팔짱을 꼈다.

“괜찮아. 멸시당하는 날도 오늘로 끝이니까.”

“정말요?”

“그래. 비장의 곡들을 준비해 왔거든.”

기대하라는 듯 그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꼭 들어 달라는 눈빛이어서 조금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난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것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기대되네요. 그런데…….”

“그런데라는 말이 나오면 안 되는데?”

“저도 내일 연주해야 해서 오늘 리허설하고 준비할 것이 많거든요. 아마 알레한드로 씨의 무대를 전부 보진 못할 지도…….”

“아.”

미처 그건 생각하지 못했는지 알레한드로는 멍한 소리를 냈다. 그 옆에 있던 직원이 웃음을 참는 것이 보였다.

난 솔직히 말하고도 약간 미안해졌다. 일단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볼 수 있도록 해 보겠다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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