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6화
알레한드로는 브뤼셀에서 친해진 연주자 중에선 그래도 꽤 자주 마주하며 친근하게 지내는 사람이었다.
준결승 무대 정도는 봐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있긴 했다.
하지만 나 역시 콩쿠르 일정으로 바쁜 상황이라는 걸 알게 된 알레한드로는 이제 자신은 신경 쓰지 말라고 말했다.
그런데 괜히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하는 게, 괜히 장난으로 날 겁주려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콩쿠르를 두고 농담을 나누는 건 자칫 서로 오해를 살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우린 그런 것을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란 걸 이전에 느꼈기에 지금은 꽤 편하게 서로를 대하고 있었다.
내가 빙그레 웃으며 올려다보자 알레한드로도 미소 짓더니 나와 아나스타샤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그런데…… 리허설 때문에 나왔다기엔 너무 일찍 나온 것 같은데? 친구 때문에 겸사겸사 온 건가?”
“그렇기도 하죠.”
사실 꽤 복잡한 사정이 있긴 했지만 그걸 구구절절 말할 생각은 없었다.
가만 보니 알레한드로는 아나스타샤의 모든 무대를 다 본 것 같지도 않았고.
아니나 다를까, 그는 무대의 일부분만 봤다고 말했다.
“아까 스크리아빈의 폴로네이즈 치는 것만 잠깐 들어 봤었는데. 그것 말고 다른 곡은 어땠어?”
“……나중에 직접 들어 보시면 되잖아요?”
“네 평가를 들어 보고 싶으니까 묻는 말이지.”
알레한드로는 은근히 내 의견을 높게 사는 경향이 있었다.
누군가가 날 고평가한다는 건 사실 꽤 기분 좋은 일이었고, 심지어 그게 알레한드로 같은 뛰어난 피아노 연주자라면 정말 감사한 일이었지만 바로 옆에 아나스타샤가 있으니 지금은 말을 삼가야 할 때였다.
“제 친구의 평가를 알레한드로 씨에게 할 이유가 있나요?”
“음…… 그래?”
그런데 내가 이렇게 대답을 슬쩍 회피하는 것과 아나스타샤가 발렌티나와 통화하면서 나누는 단편적인 이야기만으로도 알레한드로는 대충 알겠다는 듯 말했다.
“문제가 있었나 보네.”
생각보다 정말 예리한 사람이었다. 물론 여러 상황을 종합하면 추리가 어렵진 않을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정확하게 볼 줄은 몰랐다.
그래도 그가 원하는 대답 같은 건 해 주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눈에 힘을 주고 올려다보자 알레한드로는 오해하지 말라는 듯 덧붙였다.
“별 상관은 없어. 내가 이렇게 보니 너희들은 뭐가 어쨌든 할 만큼 했다는 얼굴들이기도 하고. 그렇다면 아마 크게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열심히 해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잖아요?”
“그래, 실수도 하고 원하는 사운드가 안 나기도 했겠지.”
무대에선 정말 별의별 일이 다 터진다. 알레한드로는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그는 어렵고 힘든 부분에만 초점을 두지 않고 조금 더 넓게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런데 그런 건 심사 위원들도 너무나 잘 알아. 이런 곳에 훨씬 더 많이 서 보고, 심사도 해 본 사람들이잖아.”
특히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연주자들을 압박하는 강도가 상당히 강한 콩쿠르다.
일반적인 무대에서보다 실수가 곧잘 나오는 편이었다.
그 모든 것이 평가 기준에 들어가겠지만 꼭 감점 사항인 것만은 아닌 것이다.
실수를 극복해서 무대를 완성시키는 것은 가점으로 합산될 테니까.
“그러니까 만약 문제가 있더라도 그것을 뛰어넘는 천재성과 집중력으로 음악을 끝까지 붙잡고 놓지만 않았다면…….”
날 내려다보던 알레한드로는 손을 들어 나와 아나스타샤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마 괜찮을 거야. 너희들은 천재잖아.”
알레한드로는 우릴 응원하려 하고 있었다. 어쨌든 간에 경쟁자인데 이렇게 마음 써 주는 건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난 감사를 담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훨씬 천재다운 분들도 많은 걸요.”
“혹시 엊그제 티토브 생각하는 거야?”
“예?”
“세르게이 파바노비치 티토브 말이야.”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이름이 튀어나와서 조금 놀랐다.
세르게이는 우승 후보로까지 점쳐지던 촉망받는 연주자였다. 그런데 그만 파이널에 가지 못하고 떨어져 버렸다.
난 그런 그를 보면서 역시 콩쿠르의 결과는 알 수가 없는 것임을 새삼 느꼈었다.
그런데 알레한드로는 이유가 확실하게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티토브도 천재이긴 하지. 하지만 실수 한 번 하니까 중간에 음악을 놓아 버렸잖아.”
“아.”
“다른 탈락한 자식들도 똑같아. 이미 너무 오랫동안 준비하느라 많이 지쳐 있는 상태에서 더 집중한다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니까.”
알레한드로는 불쑥 더 가까이 다가오더니 명심하라는 듯 말했다.
“여기까지 온 녀석 중에 실력이 없는 사람은 없어. 그중에서 질긴 놈들만 붙는 거지.”
난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며 지금까지 들은 말들을 종합했다.
그는 아나스타샤가 약간의 실수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걸 꿰뚫어 보고 그걸 위로하고 응원하기 위해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내일 무대에 설 내게도 도움이 되어 주고자 하는 것 같았다.
역시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후후.”
“왜?”
“아나스타샤가 이런 기분이었나 싶어서요. 저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거든요.”
시간이 없어서 거의 막무가내이긴 했지만 아나스타샤에게 정신 차리라고 했던 건 큰 맥락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기까지 온 피아노 연주자들은 같은 시대를 살아가면서 앞으로도 세계에서 자주 보게 될 사람들이었다.
절대적인 실력의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다. 결국 한순간의 집중력 차이가 결과를 가르는 것이다.
“뭐야, 역시 알고 있었잖아.”
알레한드로는 피식 웃더니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부분에서 생각이 비슷하다는 걸 확인한 건 꽤 재미있는 일이었다.
잠깐 동안 나눈 이야기였지만 충분히 만족했다는 듯 알레한드로는 뒤로 물러섰다.
그도 다음 무대에 서기 전에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얻어 간 것이 적잖아 있어 보였다. 서로 도움이 되어 준 것이다.
“아무튼 난 슬슬 갈게. 나중에 보자.”
“준비하신 모든 것들을 후회 없이 보여 주실 수 있길 바랄게요.”
“그래야지. 피아노의 신이 나한테 기회를 주실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
기세 좋게 한마디 남긴 알레한드로는 이어서 아나스타샤와도 손을 흔드는 것으로 인사를 나누고는 직원과 함께 연주자 대기실로 들어갔다.
난 어쩐지 알레한드로가 파이널에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실력도 있고 위닝 멘털리티도 강한 연주자였다. 어떻게든 자기 자리를 일구어 낼 사람이라 느껴졌다.
물론 오늘 뽑는 인원수를 생각하면 아나스타샤의 직접적인 경쟁자겠지만…… 어떻게든 모두 잘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나스타샤도 전화를 끊고는 내게 말했다.
“나도 전화 다 했어.”
“발렌티나가 많이 기다렸나 보네요.”
“그러게…….”
전화뿐만이 아니라 나와 알레한드로가 나눈 이야기도 들었겠지. 그녀는 굉장히 차분해져 있었다.
아마 지금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일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 차례도 배려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듯 보였다.
“아무튼…… 그럼 일단 옷부터 좀 갈아입고 올게.”
“예, 그렇게 하세요.”
“넌 어떻게 할 거야? 오늘 리허설 정확히 언제인지 알아?”
리허설은 내일 무대에 서는 시간으로부터 정확히 24시간 전에 시작된다.
그러니까 이미 오전 세션은 다 지나갔고 저녁 세션의 시작인 8시를 생각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10시.
“글쎄요…… 1시간 전에 부를 테니 아마 7시 아니면 9시겠죠?”
“시간이 좀 남네. 집에 갈 거야?”
“왔다 갔다 하려면 빅토르에게 미안해서요.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까 그냥 근처 연습실에서 연습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부르면 갈 생각인데…….”
클레망에게 적당히 연락하고 나서 일단 오늘 밖에서 해야 할 일은 모두 마치고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나스타샤의 눈치를 보니 그녀가 원하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 난 순식간에 그 바람을 알아보았다.
“같이 연습실 갈래요? 아나스타샤.”
“방해되지 않겠어?”
“무슨 방해요? 청중을 두고 하는 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아시면서.”
난 무대에서 잘 긴장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보는 사람이 있으면 확실히 조금 더 신경 쓰게 된다.
“게다가 피드백까지 완벽하게 해 줄 청중이라면 더더욱 중요하죠.”
예전부터 우린 같이 한 연습실에서 번갈아 연습하면서 자주 의견을 나누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까지 실력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건 그런 연습 방법에서 좋은 영향을 받은 덕분이었다.
아나스타샤는 환하게 웃으며 벌떡 일어섰다.
“알았어. 잠깐 기다려. 금방 올 테니까.”
빠른 걸음으로 의상실로 향하는 그녀를 보며 나도 천천히 벤치에서 일어났다.
“우…….”
짧게 기지개를 켜니 온몸의 찌뿌둥한 기운이 사라졌다.
세연은 이미 파이널리스트가 되었고, 아나스타샤도 자신의 차례를 마쳤다.
이젠 내 차례였다.
***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아나스타샤를 이끌고 플라지 근처의 연습실로 향했다.
우린 콩쿠르를 준비하면서 서로 레퍼토리를 완전히 다 공개하지 않고 있었지만, 이번엔 거리낄 것이 없었다.
난 생각나는 대로 약간 아리송했던 부분들을 연주하여 아나스타샤에게 들려주었고 그녀의 의견을 받았다.
역시 아나스타샤는 듣는 귀가 굉장히 좋아서 내가 의심하는 것을 정확하게 짚었다.
내가 잠시 쉬는 사이엔 아나스타샤가 피아노에 앉았는데, 그녀의 폭발적인 에너지가 담겨 있는 음악은 옆에서 듣는 것만으로도 큰 공부가 되었다.
뭔가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무작정 한 연습실에 두 연주자가 들어갔을 뿐인데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상승 작용은 정말 효율이 높았다.
그렇게 2시간 정도 같이 연습했을 때였다. 루트거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번엔 정말 올 것이 왔음을 직감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내일 저녁 세션 첫 번째 순서이십니다. 그러니 시간에 맞추어 플라지로 오실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제가 모시러 가겠습니다.
“괜찮아요. 지금 근처 연습실에 있거든요.”
-아…… 그렇습니까?
잠시 필요한 이야기를 나누고 전화를 끊으니 아나스타샤가 물끄러미 날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내 타이머가 본격적으로 돌기 시작했다는 걸 느끼면서 지금 했던 연습이 과연 도움이 되었을지 궁금해하는 모습이었다.
난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웃어 보이면서 말했다.
“정말 좋은 연습이었어요. 고마워요, 아나스타샤.”
“그럼 다행이고……. 바로 갈 거니?”
“글쎄요.”
플라지는 바로 옆이라서 아직 여유가 있었다. 난 모처럼이라는 생각에 그녀에게 제안했다.
“식사나 하고 갈까요?”
아나스타샤는 갑자기 나온 내 말에 살짝 당황했지만 그래도 환한 미소와 함께 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