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7화
무릇 연주자란 자신의 수준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끊임없이 곡을 연습하면서 과거의 나와 비교하고, 얼마나 왔는지 그리고 어디까지 더 갈 수 있는지 따지다 보면 완성도라는 걸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난 자신을 갈고 닦아 왔고 실력에 자신감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을 잘 안다고 해도 전부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높게 솟아 있는 세상의 계단에 어디까지 오를 수 있는지 알려면 멀찌감치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가늠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건 직접 발을 딛고 탄탄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알 수 있는 부분들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후…….”
박수와 함성 소리가 전신을 흔들 정도였다. 그 속에서 난 간신히 길게 숨을 내뱉었다.
연주의 집중력이 조금 풀어지자 그 에너지가 그대로 흥분으로 향했는지 심장의 두근거림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고개만 슬쩍 돌려 옆을 보니 수백 명의 눈과 카메라 렌즈의 시선들이 무대 앞을 꽉 채우고 있었다.
지금 몇 명이 날 보고 있는 걸까. 그런 건 감히 가늠할 수도 없었다.
아마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내가 어디에 올라서 있는지 차차 알게 되겠지.
그러니 지금은 그냥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일단 중요한 무대를 하나 잘 해냈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브라바!}
의자에서 일어난 나는 청중석을 보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거기에 반응하여 더 크게 환호성이 일어났다. 음압에 머리가 어질거렸다.
그래도 벌써 힘이 빠진 듯한 모습을 보여 줄 순 없었다. 연주자에겐 보여지는 태도도 중요하니까.
난 부드럽게 돌아서서 이번엔 가스파르 지휘자 쪽을 향했다.
가스파르는 지휘봉을 든 채 어깨를 늘어뜨리고 날 바라보더니 눈이 마주치자 갑자기 성큼 다가왔다.
‘어?’
깜짝 놀란 난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가스파르의 걸음이 훨씬 빨랐고 그는 순식간에 내 앞에 섰다.
물론 그가 내게 바란 건 하나뿐이었다.
‘거기 서 계셔도 내가 갔을 텐데…….’
좋은 연주였다는 의미로 악수하는 건 당연한 관례고, 보통은 협연자가 먼저 다가가는 편이다.
그런데 지휘자가 이렇게 직접 와서 악수를 권하는 건…… 아마 날 인정했다는 뜻이리라.
어렵게 생각할 것 없었다. 피아노 연주자로서 인정해 준다면 기쁘게 받아들이면 된다.
난 환하게 웃으며 그와 잡은 손을 흔들고 이어 다가온 악장과도 악수했다.
{자, 나가죠.}
가스파르가 무대 뒤쪽으로 손짓했고 난 거기에 따라 그와 함께 무대를 빠져나갔다.
흥분을 조금 가라앉히고 있자니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이어 대기실로 들어왔다.
그렇게 모두 들어올 때까지도 청중들의 박수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이제 1부는 끝났고 인터미션이니까 적당히 쉬러 가는 게 보통일 텐데…… 어쩐지 좀 긴 느낌이었다.
언제쯤 끊어지려나 싶어 기웃거리고 있자 단원들이 킥킥거렸다.
{박수가 끊어지질 않네.}
{커튼콜 나가 봐야 하는거 아니야?}
{그러게.}
나도 저 박수 소리에 더 응해 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콩쿠르에서 그런 짓을 했다간 가장 앞줄에 앉아 있는 심사 위원들이 어떤 평가를 내릴지 모른다.
자신 있게 콩쿠르 무대조차 자신의 연주회로 만드는 건 물론 좋은 태도겠지만 무엇이든 적당히 해야 하는 법이다.
‘어쨌든 절반은 해낸 것 같네.’
냉정하게 흥분을 가라앉히고 있자 날 지켜보고 있던 가스파르가 다시 다가왔다. 그는 굉장히 기분이 좋은지 연신 웃고 있었다.
{훌륭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라 난 가스파르에게 정말로 감사했다.
만약 리허설 때 그가 내게 전적으로 총보 연주를 맡겨 주지 않았더라면 이런 연주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가장 어렵지만 효율적인 방법을 제안받고 해낼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가스파르의 안목과 믿음 덕분이었다.
내가 진지하게 감사를 표하자 가스파르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조금 더 긴 시간을 두고 호흡을 맞춰 보았더라면 어땠을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후후, 저도 그래요.}
{분명 좋은 결과를 예상합니다. 잘되면 나중에 연락 한번 주시죠. 한 번 더 무대를 함께하고 싶군요.}
{그 말씀 꼭 기억해 두고 있을게요.}
오케스트라 쪽에서 앞으로도 더 연주하고 싶다는 말을 듣는다는 건 협연자로서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에 가까웠다.
나 역시 이 왈로니아 로열 챔버 오케스트라의 실력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기에 벨기에에서 연주회를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냥 친구랑 한 약속처럼 아무때나 할 수 있는 건 아닐 테고, 적절한 계약과 조율이 있어야겠지만…… 그 정도는 나중에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이 오케스트라와 모차르트가 아니라 프로코피예프의 곡을 같이 연주해 봐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사이, 가스파르가 대화는 이쯤이면 되었다는 듯 말했다.
{자, 그럼 모두들 방해하지 말고…… 아니지, 나가세.}
어제 아나스타샤가 연주를 마쳤을 땐 나가지 않고 대기실 한쪽을 지키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랑은 상황이 또 다른 모양이었다.
가스파르의 지시에 단원들은 웃으며 각자 악기를 들고 하나 된 동작으로 일어났다.
출구로 나가기 전 그들은 내 곁을 스쳐 지나가면서 한마디씩 해 주었다.
{그럼 행운을 빕니다!}
{아, 감사합니다.}
{최고였어요, 베르체노바 양.}
{저도 여러분과 함께해서 최고일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수십 명에 달하는 사람들과 우르르 인사하는 건 정신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인사를 확실히 하고 나니 비로소 협주곡을 정말 제대로 끝맺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에겐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이젠 모든 집중력을 그쪽으로 향해야 할 때다.
그렇게 남은 시간을 따지면서 다음 무대를 생각하려던 차에 클로에가 내게 물병을 건넸다.
{물 마실래?}
마침 목이 마르던 터라 감사히 받았지만 난 뚜껑을 여는 데에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요즘 체력이 정말 많이 좋아졌고 덩달아 쓸 수 있는 힘도 늘어났지만…… 이건 그냥 누가 와서 잡더라도 어려워할 정도로 강하게 잠겨 있었다.
어쩐지 이 각도로 힘을 조금만 더 주면 뚜껑이 아니라 내 손목이 삘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즈음, 클로에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이리 줘 볼래?}
{그…… 부탁드릴게요.}
약간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쭈뼛거리며 물병을 주자 클로에는 가볍게 따선 내 손에 쥐여 주었다. 그러고는 그 대가를 요구했다.
{손 잠깐 보여 줘.}
{예? 예…….}
난 무어라 묻지도 못하고 멍하니 왼손을 내어 주었다. 그러자 클로에는 내 손을 잡고는 진찰이라도 하듯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멍하니 바라보아도 그녀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한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그래서 난 남은 오른손으로 물을 마셨다. 그 와중에도 클로에는 내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뭔가 간질거리기도 하고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슬쩍 빼려고 하자 클로에가 말했다.
{가느다랗긴 해도 확실히 피아니스트의 손 같은 느낌이긴 하네. 손이 이렇게 변할 때까지 연습한 거지?}
그제야 난 그녀가 왜 손을 보자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조금 전 연주가 그녀에게도 꽤 인상적으로 들린 모양이었다. 칭찬의 일환이라면 감사히 받을 뿐이다.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아하하하, 그렇게 말할 것 같았어. 응…….}
클로에는 크게 웃더니 다시 내 손을 꼭 쥐었다.
{다른 사람들은 네 연주를 듣고 다들 천재라고 칭송하기에 여념이 없더라. 그런데 단지 천재이기만 해선 안 된다는 걸 왜 다들 모르는걸까.}
{…….}
클로에에게 있어서 난 그냥 콩쿠르에 참가한 연주자가 아니었다.
어두운 극장에서 내가 푸념을 했던 걸 진지하게 들어 준 순간부터 그녀는 연주자로서의 나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이면에도 신경을 쓰게 된 것이다.
괜한 생각을 하게 만든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고마웠다.
{생각해 주셔서 고마워요. 하지만 괜찮아요.}
{그래? 그러면 됐고.}
{그나저나…… 손 좀 놓아주시면 안 될까요?}
칭찬과 격려를 받는 건 기쁜 일이지만…… 이런 상황은 조금 부끄러웠다.
슬그머니 다시 손을 빼려고 하자 클로에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마사지해 주는 건데?}
{그…… 콩쿠르 측에서 다른 참가자 분들에게도 이런 것을 해 주나요?}
{아니? 그럴 리가.}
{그럼 왜 저만…….}
{피아노를 부숴 버릴 것처럼 억센 줄만 알았던 손이 이렇게 만져 보니까 말랑말랑한 게 은근히 재미있어서.}
{재미요?}
내가 무슨 장난감인가?
연주자인지, 푸념이나 하는 애인지, 아니면 장난감인지……. 클로에가 날 어떻게 보고 있는지 종잡기 어려워서 삐딱하게 바라보자 그녀는 이 정도는 양해해 달라는 듯 웃었다.
{참가자 중에 이만큼 친해진 건 너밖에 없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
그 말을 들으니 반항하려던 생각이 사그라들었다.
처음 클로에와 만난 게 직원과 연주자로서가 아니었기 때문에 우린 이렇게 친구처럼 지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금 내가 태도를 바꾸면 그녀도 바뀔 것 같아 무서웠다. 어쩌면 클로에는 내가 무엇에 약한지 이미 잘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얌전히 앉아 있자 그녀는 이내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장난은 이쯤 할까.}
슬쩍 뒤로 물러선 클로에는 시계를 확인했다. 이 이상 시간을 뺏는 건 방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다음 무대도 있잖아? 그러니까 집중해서 준비 잘해. 난 응원이나 열심히 할게.}
{클로에…….}
그래 봤자 2분도 안 지났으니까 방해라 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클로에가 미안해하는 것 같아서 난 나도 모르게 말했다.
{어, 저기…… 마사지해 주셔서 감사해요. 꼼꼼하게 해 주신 덕분에 손의 피로가 풀린 느낌이에요.}
{응? 그냥 대충 주무른 건데.}
{……예?}
{난 마사지 같은 거 할 줄 몰라. 재미로 한 거라고 말했잖아?}
기껏 괜찮다고 해 주려 했더니……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내가 눈을 흘기자 클로에는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하더니 대기실을 나갔다.
아마 그녀도 그녀 나름대로 할 일이 있겠지. 그 전에 내 다음 무대를 응원하기 위해 일부러 그런 것 같다.
대기실엔 이제 나와 직원 몇 명만 남아 있었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난 다시 연주자의 감각을 되살리며 다음 무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