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1화
밤 11시. 미하일 표도로비치 볼콘스키의 아파트엔 손님이 찾아와 있었다.
초저녁부터 찾아와선 집 안의 모든 술을 바닥낼 기세로 마시고 있는 사람은 바로 미하일의 친구이자 같은 교권에 몸을 담은 선생 그리고 피아니스트 동료인 구세프였다.
구세프가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면 건강이 걱정되기도 하고 구세프의 아내와 딸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미하일과 구세프는 분별력 없이 무작정 술을 마시는 타입이 아니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고 이 정도는 감당 가능하다고 판단했기에 기분 좋게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근 몇 달 사이 실력이 훨씬 더 좋아진 것 같은데?”
텔레비전에선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중계가 이어지고 있었고 카메라가 비추는 무대엔 두 사람의 제자인 타티아나가 올라 연주하고 있었다.
타티아나가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면 두 사람 역시 이렇게 느긋하게 있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4번의 연주를 듣자마자 미하일은 바로 깨달았다.
오늘 타티아나의 컨디션은 최고였고 아마 별일 없이 독주곡까지 모두 마무리 짓는다면 이 세미파이널의 주인공은 그녀가 될 것이라고.
역시나 뒤이은 독주곡 두 곡에서도 타티아나는 엄청난 실력을 발휘했다. 이미 그녀는 두 선생의 손을 떠나 날고 있는 중이었다.
그 사실은 미하일이 인정하건 말건 상관없이 음악으로 드러났다. 참 명료한 세계라고 생각하며 미하일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한 잔 더 할까?”
“좋지.”
그 기분 좋은 제안에 구세프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하일은 몇 년 전에 어디선가 기념으로 선물 받은 와인을 꺼내 왔다.
한 모금 마신 구세프는 즉각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거 맛있군.”
“다행일세. 아껴 놓았던 건데.”
좋은 날에 마시려고 두었던 것이니 오늘만큼 적당한 때가 없었다. 미하일도 와인을 한 잔 따랐다. 향긋한 향이 오늘을 축복하는 듯했다.
술과 친구 그리고 제자의 음악. 세상에 여기에서 더 필요한 것이 뭐가 있겠나 싶을 정도였다.
미하일은 잔을 들고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
드뷔시의 기쁨의 섬. 타티아나는 그 마지막 하이라이트를 연주 중이었다.
이미 몇 번 봐서 그 곡의 위력에 대해선 알고 있었지만 벨기에에 가 있는 사이 그녀는 한층 더 자신의 곡을 업그레이드한 것 같았다.
텔레비전의 조악한 스피커로도 이 음악의 가치를 크게 저해하진 못했다.
구세프 역시 잔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지켜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기분 좋은 날이군. 드뷔시는…… 저 녀석이 거의 혼자서 연습한 곡이라고 했었지?”
“맞네. 내가 조언한 건 서너 번 정도?”
“완성된 걸 듣고 한 게 그렇다는 거지?”
“그래.”
미하일이 선생으로서 일한 건 타티아나가 처음 선곡할 때와 완성했을 때뿐이었다.
중간에 끼어들어서 연주자와 레퍼런스를 추천하거나 상세한 곡 해석 등을 제안할 필요도 없었다.
선곡이 결정되자마자 타티아나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겨우 며칠 만에 곡을 끝까지 완성해 왔다.
물론 처음엔 타티아나가 놓친 흠결이 있었고 미하일은 곡 전체의 완성도를 올리기 위해 레슨을 해 주었다.
하지만 항상 그렇듯 타티아나는 이해력과 실현 능력이 정말 뛰어났다.
미하일이 레슨에서 한마디 하면 그것을 음악에 접목시키며 순식간에 수십 가지는 될 변화들을 자동적으로 고쳐 왔다.
학생으로선 이렇게 편한 학생도 없었다.
미하일이 그녀와의 레슨을 생각하며 미소 짓자 구세프는 안 봐도 알겠다는 듯 말했다.
“빨리 음악원에 보냈어야 했는데.”
“하하하. 아마 그러면 조금 더 나았으려나?”
“아르카디 교수나…… 다른 음악원의 교수 중엔 타티아나에게 좋은 상대가 되어 줄 사람들이 많아.”
“상대?”
“이젠 상대만으로 충분한 수준 아닌가?”
미하일은 구세프의 말에서 그가 이미 타티아나를 일반적인 학생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걸 느꼈다.
음악원에 가서 더 높은 교육을 받으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타티아나에겐 이미 그런 것이 큰 의미가 없다.
다만 그녀에겐 음악적 신선함과 넓은 저변을 알려 줄 상대들이 필요할 뿐이다.
구세프는 와인을 한입에 다 마셔 버리곤 확신에 찬 어조로 덧붙였다.
“몇 년까지도 볼 것 없이 타티아나는 그 모두를 잡아먹고 빠르게 성장했겠지.”
“음…… 그럴지도.”
“뭐, 저 녀석은 이 속도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고. 그래서 더더욱 그걸 증명하기 위해 저 콩쿠르에 나간 것이겠지만…… 어쨌든 음악원에 갈 거라면 빨리 가는 게 낫지 않았나 싶군.”
피아니스트를 키워 내는 현실적인 방법론에 있어 구세프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드물다. 때문에 미하일도 그의 말에 상당 부분 동의했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본 타티아나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만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내 생각은 조금 달라, 구세프.”
반박하는 말에도 구세프는 눈썹을 살짝 꿈틀거렸을 뿐 별 반응이 없었다. 미하일이 이렇게 말하리란 걸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저 아이를 음악원에 보내는 건 무책임한 짓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역시 그런가?”
“그래.”
타티아나는 태도나 실력이나 완성된 피아니스트에 가까웠고 인간적인 면에서도 흠잡을 곳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 내면의 불안정성은 처음 만날 때부터 있었던 것이었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표면의 실력만 보고 다른 곳으로 보내 버린다는 건 그녀를 처음 발굴해 낸 선생으로서 해선 안 될 일이었다.
기쁨의 섬 연주가 끝났다. 기교부터 표현력까지 어느 하나 문제없었다.
그리고 더욱 고무적인 건 바로 타티아나가 내적으로도 상당히 성숙해졌다는 느낌이 바로 음악에서 그대로 전달되어 왔다는 점이었다.
안달하거나 공격적이지 않게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타티아나의 모습을 보며 미하일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이제부터 증명될 걸세. 우리가 데리고 있었던 것이 과연 책임감 있는 일이었는지 말이야.”
이다음 곡도 타티아나와 미하일이 함께 고민하고 고른 것이었다.
미하일은 걱정하고 타티아나는 자신 없어 했지만, 그럼에도 결론적으로 사제는 그 길을 나아가기로 했다.
타티아나는 늘 불안해하는 기질을 가지고도 결코 나아가는 데에 주저하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신중하면서도 과감하게 한 발을 내딛을 줄 아는 용기는 타티아나가 지닌 가장 강한 강점이었다.
미하일은 다른 그 어떤 교수도 그녀를 이렇게 키워 내진 못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미하일.”
“음?”
“자네도 타티아나도 정말 고집이 너무 세.”
물끄러미 바라보던 구세프가 한마디 툭 던졌다.
교내에서 공포의 화신으로 통하는 구세프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 조금 우스워서 미하일은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구세프는 한숨을 내쉬며 이어 말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예전엔 내가 한 고집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니 난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지 뭔가?”
“늙었군, 구세프.”
“빌어먹을.”
강한 고집으로 구세프를 당황시키는 건 비단 타티아나나 미하일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제자인 에르네스트도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기 위해 구세프와 정면으로 맞대응하고는 모스크바를 떠나 버렸으니까.
구세프는 마음처럼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며 술잔을 다시 채웠다. 미하일은 친구를 홀로 둘 생각이 없었기에 자신의 잔도 같이 채우고 건배를 권했다.
“선생들의 영원한 고뇌를 위하여.”
“웃기는군.”
그렇게 두 사람이 잔을 부딪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타티아나가 마지막 곡을 서서히 열었다.
“역시 라흐마니노프인가.”
“그렇지.”
“다시 말하지만 정말 고집스러운 선곡이야.”
구세프가 굳이 이렇게 말하는 건 라흐마니노프여서가 아니었다.
라흐마니노프는 타티아나의 주력 레퍼토리로, 이런 중요 무대에서 반드시 활약해 주어야 했으니까.
그런데 이 곡은 조금 달랐다. 타티아나가 굉장히 어려워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쇼팽 바리에이션을 꺼내다니.”
“처음 말을 꺼낸 건 타티아나였네.”
라흐마니노프의 쇼팽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22.
이 곡은 쇼팽의 프렐류드 op.28의 20번의 테마를 가져와 변주곡 형식으로 옮긴 곡이다.
2분 정도밖에 안 되는 짧고 느릿한 곡이었지만 라흐마니노프의 변주는 그 열 배도 넘는 길이와 난이도를 지니고 있었다.
사실 그 난이도는 문제가 안 된다. 걱정이 되는 부분은 본래 테마인 쇼팽을 타티아나가 어떻게 해석하고 연주하느냐에 있었다.
“……음.”
시작된 연주를 들으며 구세프는 점점 말을 줄였다.
구세프는 쇼팽을 놓고 타티아나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어 본 적도 있었다. 때문에 이 곡을 타티아나가 어떻게 해석할지에 대해 걱정이 많은 듯했다.
타티아나는 쇼팽을 통해서 자신의 음악을 제대로 행할 수 있다고 믿는 피아니스트였다.
하지만 그러한 바람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하고 쉽게 상처받기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 미하일은 타티아나가 쇼팽의 곡을 연주하는 걸 듣지 못했다. 쇼팽을 좋아하면서도 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피아니스트에게 있어서 쇼팽은 정말 중요한 레퍼토리이기 때문에 반드시 연주해야 했지만, 쇼팽 특유의 뉘앙스가 타티아나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걸 느꼈기에 미하일은 그 문제를 언젠가 타티아나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여기고 시기를 미루는 것을 도와주는 데에 주력했다.
아마 다른 교수라면 이런 방식으로 돕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미하일은 자신이 본 타티아나라면 분명 이겨 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항상 방법을 찾아내는 건 저 아이였지.’
설마하니 라흐마니노프의 힘을 빌릴 줄은 생각도 못 했지만, 그건 아주 적절한 선택이었다.
내적 불안감을 떨쳐 내고 무대에 선 타티아나는 이 변주곡을 연주하면서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구사하는 음악엔 쇼팽과 라흐마니노프 모두의 음색이 묻어나고 있었다.
원래 그렇게 연주해야 하는 곡이긴 하지만 타티아나의 음색엔 무언가 더 특별함이 있었다.
“됐군.”
긴장한 채로 화면을 지켜보던 구세프가 짧고 강하게 한 마디 하더니 소파에 누웠다. 완전히 걱정을 내려놓고 감상하려는 자세였다.
미하일은 좋은 와인을 한 병 더 구해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