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244화 (1,244/1,277)

##  1244화

솔직히 말해 에르네스트의 흑역사 시리즈는 재미있었다.

아나스타샤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코를 맞아 코피가 난 후 한 달은 말도 걸지 못했던 일이나, 열 살도 안 된 나이에 모차르트는 슬슬 졸업하겠다는 망언을 했다가 구세프 선생님에게 죽도록 혼이 난 일, 처음으로 큰 콘서트홀에서의 연주가 잡혀서 사인 연습을 열심히 했었는데 단 한 사람도 사인 요청을 하지 않았던 일 등 레퍼토리도 굉장히 다양했다.

‘미안해요, 에르네스트.’

당사자가 없는 곳에서 이렇게 옛날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약간 죄책감도 들었다.

그러나 우린 그의 뒷담화를 하려고 모인 것이 아니다.

작곡가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 베샤스트니흐에 대한 정보가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나와 아나스타샤에게 정보 공유 요청이 들어온 것뿐이다.

우린 아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했기에 응하고 있었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흑역사 폭로전이 되어 버리긴 했지만…… 형태만 놓고 보자면 작곡가의 어린 시절 성격 등을 일화를 통해 알아보는 것이었다.

음악사 시간에 라흐마니노프의 생애를 배우며 그가 젊은 시절 실패도 했었다는 걸 배우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물론 에르네스트에게 아직 작곡가로서 그만한 명성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적어도 여기에만 10명이 넘는다.

앞으로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점점 많아질 테고 전문적으로 에르네스트를 연구하는 음악가도 나오리라. 그건 이미 막거나 거부할 수 없는 수순이었다.

공인으로서 감수해야 할 부분 등을 강요하는 건 아니지만 에르네스트도 아마 어느 정도는 이해하리라. 이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겠지만…….

어쨌든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도 사실 그리 나쁘진 않았다.

{뭐라 해야 할까…… 갑자기 잘 알지도 못하는 그에게서 알 수 없는 인간미가 느껴지네.}

{나도 내가 모차르트를 졸업할 수 있을 줄 알았었지.}

{이즈마일로바 양…… 과장도 섞은 거지?}

{오후에 봤었던 이미지랑 괴리가 크긴 하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음악에 많은 걸 걸고 있는 사람들이고 그만큼 특출하다.

때문에 에르네스트의 일화에서 몇몇 부분은 공감대를 사기도 하는 것 같았다.

분위기를 슬쩍 살핀 아나스타샤는 이 정도면 된 것 같다는 듯 즐겁게 웃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날 휙 돌아보았다.

{자, 그럼 난 이쯤 하고…….}

중간에 끼어들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가만히 듣고만 있던 나는 아나스타샤의 시선에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정해진 순서대로 하자는 듯 손가락을 내밀었다.

{다음은 타티아나 네 차례야.}

{……예?}

{아무도 모르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내가 다 풀었잖아. 그러니까 다음은 네가 수습해 줘야지.}

{어, 어떻게요?}

어이가 없었다.

물론 아나스타샤가 적당히 이야기해 놓으면 그다음 내가 에르네스트의 장점 등을 잘 이야기해서 균형을 맞출 생각이긴 했지만, 그건 아나스타샤가 적당히 해 주었을 때 가능한 상황이었다.

나도 모르는 과거 이야기를 잔뜩 해서 혼을 쏙 빼 놓고는 이제 와서 내게 수습하라고?

당황한 내가 못 한다고 고개를 젓자 아나스타샤는 짙게 웃더니 말했다.

{할 이야기 많지 않니?}

그제야 난 아나스타샤가 이미 내 생각 정도는 훤히 꿰뚫어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장점 이야기를 해도 편하게 받아들여지기 쉽도록 미리 분위기를 조성해 놓은 것이다.

그런 그녀의 의도가 잘 먹혀들었다는 건 지금 다른 사람들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뭐야 베르체노바 양도 할 이야기 더 남았어?}

{우리 작곡가님이 너무 불쌍해지는데.}

내가 배턴을 받을 낌새가 되자 다들 조금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나스타샤가 이야기하기 전까지 에르네스트는 우리에게 곡을 주고는 한참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존재일 뿐이었다.

나조차 그가 낯설 지경인데 다른 연주자들이 느낀 막막함은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이미지가 많이 희석되어서 공감할 수 있는 한 음악가가 되어 있었다.

이참에 아예 이 방향대로 밀고 나갈까 싶기도 했다.

피아노 연주자로서 승승장구하던 에르네스트가 어째서 작곡가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그 이야기를 한다면 아마 그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좋아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필연적으로 에르네스트는 안타까운 사고를 겪은 사람이 되고 만다.

‘그럴 순 없어.’

아나스타샤가 온갖 흑역사를 푼 것에 대해서 에르네스트가 어찌 반응할진 모르겠지만, 모두가 그를 연민의 시선으로 보게 된다면 아마 그는 극심한 상처를 받을 것이다.

난 절대로 그를 나약한 사람으로 포장하고 싶지 않았다.

{불쌍해하실 건 없어요.}

딱 잘라 이야기하자 모두가 멈칫했다. 내가 또 무슨 신랄한 비판을 쏟아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걱정하는 듯했다.

그러나 난 더 이상 불평할 생각은 없었다.

{그가 했던 말 잊으셨나요? 결코 쉽지 않으니 얕보지 말고 최선을 다해 달라고 했던 건 으름장 같은 것이 아니에요.}

{…….}

{지금 들으신 이야기로 그가 조금 친숙하게 느껴졌다면 다행이지만, 그가 열일곱 살에 파이널 의무곡을 의뢰받은 작곡가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아요.}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가 대응해야 하는 건 어린 시절 철없던 에르네스트가 아니라 지금 가장 핵심적인 작곡가였다.

모두가 공통적으로 연구해야 하는 작곡가이기도 하고, 가장 까다로운 작곡가이기도 했다.

살짝 긴장감이 맴돌았다. 난 가볍게 웃으며 이어 말했다.

{이렇게만 말씀드리면 잘 모르실 것 같으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 드릴게요.}

에르네스트에겐 정말 많은 장점이 있었지만 그런 걸 지금 구구절절 이야기하긴 어렵다.

여러 사람을 한 번에 납득시키기엔 역시 외부에서 인정받은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이 빠르다.

그래서 내가 떠올린 것은 그가 문화부 주최 연주회에 올리기 위해 세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을 작곡했던 일이었다.

그 곡은 결국 제대로 연주되지 못하긴 했지만…… 작곡가로서 에르네스트가 엄청난 호평을 받았던 건 사실이었다.

러시아 문화부는 물론이고 프랑스 최고 권위 작곡상인 로마 대상 심사 위원인 브누아 랑베르 교수의 인정까지 받았기 때문이었다.

단 한 곡만으로 에르네스트는 파리 음악원 특례 입학을 제안받았다.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왜 이제야 해?}

{로마 대상 심사 위원? 이미 이야기 끝난 거 아니야?}

예상했던 대로 이야기를 하자마자 모두들 기겁했다. 음악가로서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이다.

타츠야는 경악을 금치 못하는 표정으로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럼…… 베샤스트니흐는 모스크바 음악원과 파리 음악원 두 곳 모두에서 스카우트를 받고도 안 간 거야? 왜?}

역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그게 좀처럼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이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중앙음악학교에서 더 배울 것이 남아 있다고 해서요.}

{대체 뭘 가르치는 곳이야? 중앙음악학교는…….}

{하긴 멀리 볼 필요 없이 여기 있는 두 사람만 봐도…….}

앤서니의 중얼거림에 따라 모두의 시선이 나와 아나스타샤에게 꽂혔다.

열일곱 살의 나이로 여기까지 온 건 우리 둘과 세연까지 셋뿐이었다. 앤서니는 우릴 상당히 높게 평가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앤서니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보다 한참 어릴 때 음악원에 조기 입학하고 콘서트도 여러 번 한 미국의 신동이었으니까.

그래서 이번엔 그의 이야기를 조금 해 보려 했는데, 앤서니는 내게 질문할 기회를 주지 않고 물었다.

{잠깐만, 베르체노바 양. 혹시 음악원 입학 제의 받은 적 없어?}

{있긴 해요.}

{그런데 왜 안 갔어?}

거기에 대해선 사실 나름대로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정신적으로 상당히 불안정했던 시기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난 중앙음악학교에 남기로 한 결정에 대해 후회하지 않고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사정을 잘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저도 아직 배울 것이 많아서요…….}

결국 나온 건 아까 에르네스트의 사정을 이야기했을 때와 똑같은 이야기였다. 어떻게 들어도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조금 비겁하다는 생각이 든다. 에르네스트의 일은 그렇게 떠들어 놓고서 내 이야기는 한 줌 꺼내는 것도 두려워한다는 게.

하지만 오늘 들었던 것들은 확실히 내게 빚처럼 남아 있다.

언젠가 이 사람들 앞이 아니라 에르네스트의 앞에선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공평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

저녁 식사 및 파이널리스트들의 미팅이 끝났다.

뒷정리를 할 시간이 되자 요리를 맡아 준 타티아나와 레이는 자연스레 모든 잡일에서 제외되었다.

그럼에도 타티아나는 뭐라도 하겠다며 팔을 걷어붙였지만 아나스타샤와 세연이 바짝 달라붙어선 그녀를 공동 주방 밖으로 끌어냈다.

그렇게 가장 어린 세 사람이 사라지고, 남은 7명의 파이널리스트들은 정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즘 애들 참 장난 아니지?}

테이블을 닦던 앤서니가 말했다.

그도 20대 중반에 불과하지만 몇 년 차이를 굉장히 크게 느끼는 건 다른 파이널리스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의자에 기대어 구경하고 있던 레이는 피식 웃더니 답했다.

{대단하긴 하지. 난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작곡가 에르네스트가 무슨 생각으로 이곳에 곡을 냈는지 알 것 같더라고.}

{왜 그런 건데?}

{최대한의 통제를 당할 수 있는 곳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은 거야. 영리한 거지.}

레이의 해석은 일목요연했다.

에르네스트가 팔 부상으로 연주자 생활이 불투명해진 사건은 클래식계에 널리 퍼진 소식이었다.

그 후 에르네스트는 작곡가로서 친구들과 동등한 위치에 서려고 했다.

하지만 단지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일을 당한 에르네스트와 동등히 서 줄 연주자는 없다.

에르네스트 역시 그 현실을 일찍 깨달은 것이다.

때문에 그가 택한 방법은 작곡으로 성공해서 같은 위치에 서는 것이다.

단 절대로 도움이나 영향을 받지 않도록 철저한 시스템 아래에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라는 유서 깊은 시스템을 에르네스트는 자신의 의도를 위해 통째로 이용한 것이다.

정말 대범하기도 하고, 심지어 성공시켰다는 점에서 유능함이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컵을 정리하던 레베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타티아나가 속이 타겠네.}

항간의 소식을 근거로 하지 않더라도 타티아나가 에르네스트를 특별하게 대한다는 것 정도는 느껴졌다.

그래서 그렇게 신랄하게 화를 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에게 기대기보다는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택했다.

레이는 그런 행동도 이해할 수 있었지만 레베카는 타티아나에게 이입했다.

{나라면 못 참아……. 에휴, 난 포기해야겠다.}

{포기? 설마 베샤스트니흐 말이야?}

{응.}

{협주곡을 포기하겠다는 건 아닐 테고…… 설마 이상한 의미로 하는 말은 아니지?}

{이상한 의미가 뭔데? 그냥 얼굴이 마음에 들더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레베카의 말에 레이는 할 말을 잃었다.

일단 타티아나가 없는 곳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와 다행이라는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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