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245화 (1,245/1,277)

##  1245화

뮤직 샤펠에 들어온 지 3일째 되는 날.

잠자리는 편했다. 복층 스튜디오에서 자고 일어난다는 것은 환상적인 일이었다. 어제도 난 상당히 늦은 시간까지 피아노 연습을 하다가 잠들었다.

그러나 늦게까지 피아노와 씨름했던 것은 내 의지력보다는 아무래도 커피의 도움이 컸다.

“여전히 예민하구나…….”

피로도 잊고 연습에 임할 수 있었던 건 좋지만 아무래도 생활 패턴이 조금 깨지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어젠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 사람들 앞에서 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잘 웃고 이야기하며 요리까지 해 주었던 건 나 자신을 칭찬해 주고 싶을 정도로 좋았었다고 생각한다.

모처럼 만난 피아노 연주자들이니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것도 진심이었고. 내게 피아노 말고 요리라는 재주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 에르네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커피를 마신 지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난 카페인의 영향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유난히 더 감정적으로 굴기도 했다.

“다신 안 마셔야지…….”

난 중얼거리며 머리를 짚었다.

작곡가 분석을 위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미명하에 했었던 말들을 이제 와 돌이켜 보니 후회가 되었다.

적어도 친구로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그렇게 경솔하게 마구 하면 안 되는 것이 아니었을까.

물론 명분은 있었고, 에르네스트는 내 친구만이 아니라 모두의 작곡가이기도 하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차라리 이기적으로 할 수 있었다면 지금처럼 후회하진 않았을 것 같다.

“으…….”

후회와 창피함 그리고 에르네스트에 대한 미안함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나중에 아나스타샤가 에르네스트의 흑역사 일대기를 풀어놓는 바람에 나도 놀라서 그걸 수습하느라 뒤늦게 열심히 추켜세워 주기라도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건 아나스타샤의 공이니 그녀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 것 같았다.

난 깊게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일단 벌어진 일을 어떻게 할 순 없었다. 어제 잔뜩 불만을 이야기한 것으로 여러 사람에게 내 진정성이 조금 전해진 것 같긴 하다.

남은 건 이제 내 마음이 에르네스트의 계획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었다.

이대로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파이널리스트 중 한 사람으로서 임해야 하나? 어제부터 시작된 고민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을 때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일찍 일어나셨군요, 베르체노바 님.}

{좋은 아침이에요.}

이중문을 열고 방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복도 저편에 있던 마리우스가 날 발견하고는 인사를 건넸다.

난 카디건의 앞을 여미면서 그에게 다가갔다.

{잠시 산책해도 될까요?}

{예, 동행하겠습니다.}

혼자 슬그머니 나가는 건 어차피 안 되니까 아예 마리우스와 같이 산책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게 나도 편했다.

난 뮤직 샤펠에서의 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니 새벽 공기가 선선하게 흐르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춥긴 했지만 이 정도는 머리를 맑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되어서 좋았다.

난 뮤직 샤펠 옆으로 나 있는 정원을 구경하며 천천히 걸었다.

{날씨가 맑네요. 정원도 한적해서 산책하기 좋고요.}

{원래는 방문객이 많아 북적이는 편입니다. 이렇게 조용한 건 1년 중 콩쿠르가 있는 시즌뿐이죠.}

뒤돌아보니 뮤직 샤펠의 거대한 위용이 느껴졌다. 본래 이곳은 수십 명의 거주 연주자가 머물면서 교류하고 연주하는 곳이다.

그렇게 사람이 많을 때도 꽤 재미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지금은 그 모든 리소스가 단 12명에게 향해 있는 상황이다. 그만큼 중요한 콩쿠르의 마지막 순간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뭘 해야 하나요?}

난 기운차게 고개를 들었다.

에르네스트의 일은 일단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도록 철두철미하게 계획해서 행동했다.

현실적인 문제가 없다면 내 마음만 정리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여럿 겪어 봤던 나는 이럴 때일수록 후회하지 않으려면 해야 할 일에 집중하는 것이 낫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내 의무감에서 비롯된 의욕은 상당히 강했다. 하루 종일 무언가 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난 마리우스가 뭘 시키더라도 충실히 할 생각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마리우스는 고개를 살짝 젓더니 대답했다.

{방금 전 확인했는데 오늘은 특별한 일정이 없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시면 됩니다.}

{정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삶이란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모처럼 뭐든 해 보려고 각오를 다지고 있었는데 아무것도 할 게 없다고 하니 맥이 빠진다.

난 다시 뮤직 샤펠 건물을 돌아보며 말했다.

{음…… 그래도 딱히 할 만한 게 생각나진 않네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방에 틀어박혀서 피아노 연습이나 하는 것 정도겠는데요?}

{대부분 그렇게 하시긴 합니다……. 그러나 기분 전환 정도는 하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앞으로 2주 가까이 이곳에 있으셔야 하니.}

마리우스는 단지 날 감시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내 컨디션 관리에도 상당 부분 신경을 쓰고 있는 사람이었다.

담당하고 있는 피아노 연주자가 이곳에 잘 적응하도록 돕는 것도 그의 역할인 것이다.

이미 적응이라면 충분히 한 것 같은데…… 기분 전환이란 말을 들어도 사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잠시 혼자서 생각해 봤지만 그저 피아노만 어른거릴 뿐이었다.

{다른 분들은 쉴 때 뭘 하나요? 이런 것도 물어보면 안 되나요?}

{아뇨, 괜찮습니다. 음…… 보통 책도 읽으시고 카페테리아나 체육 시설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시죠.}

이곳에 여가 시설이 꽤 잘 갖추어져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도 사실 뭘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직접 보면 다르려나?

{조금 구경해 봐도 될까요? 아직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르니까요.}

{그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난 그의 안내를 따라 뮤직 샤펠 본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은 처음이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소장 도서가 굉장히 많았다. 음악에 관련한 도서만 있는 게 아니라 소설류도 꽤 보여서 의외였다.

{세상에, 장 크리스토프도 있네요?}

{고전 서적들도 많이 소장하고 있는 편이죠. 혹시 읽어 보셨습니까?}

{읽어 본 적은 없지만 관심은 있었어요.}

장 크리스토프는 프랑스의 작가 로맹 롤랑의 대하소설이었다. 롤랑은 이 소설로 노벨 문학상까지 받았다.

이 소설은 제목 그대로 크리스토프란 남자의 일생을 그리고 있는데, 이 크리스토프가 바로 베토벤을 모델로 하고 있는 캐릭터라는 사실 때문에 음악가들 사이에선 읽어 볼 만한 고전 작품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나 역시 그 때문에 관심을 가지고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던 책이긴 했다.

하지만 연습도 안 하고 책에만 매달린다면 몰라도 2주 만에 읽을 만한 분량이 아니었다.

애석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난 책들을 지나쳐 갔다.

그 외에도 여러 제목이 눈에 들어오긴 했지만 사실 느긋하게 앉아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다.

평소 책을 읽는 걸 싫어하는 편은 아니지만 정해진 기간이 있는 장소란 것이 알게 모르게 내 신경을 예민하게 조이고 있는 것 같았다.

{다음은 체육 시설인데…… 혹시 운동하시는 것 있으십니까?}

{예? 아뇨…… 없어요. 그래도 구경은 해 보고 싶네요.}

운동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지만 시설 자체를 구경하는 것엔 흥미가 있었다. 애초에 거리도 그리 멀지 않았고.

체육 시설로 다가갈수록 난 묘하게 울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뭐지……?’

뭔가 통통 튕기는 소리다. 혹시 이미 안에 누군가 있는 건가 싶었다.

사실 지금 다른 사람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준비도 안 되어 있는 상태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심하게 발걸음을 돌려 다른 곳으로 가는 것도 너무 꼴불견이었다. 옆에 마리우스가 있기도 했고.

그래서 난 누가 있는 건지 당당하게 확인하기로 결정하고는 문을 열었다.

{베르체노바 양?}

안에 있던 건 두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렌스키 로마노비치 비소츠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갈색 머리의 청년이었다.

그가 이탈리아의 연주자 루카 아르젠토임을 알아본 건 몇 초 지나서였다.

{아침부터 체육관을 찾다니 당신도 역시 상당한 사람이네.}

갑자기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는 걸 보니 조금 무서웠다. 어쨌건 난 산뜻하게 인사부터 했다.

{아,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어제 에르네스트와의 대담에서 레이가 의혹을 제기했을 때, 루카는 적당히 끼어들어서 그것을 끊어 주었다.

분위기가 더 심각하게 흘러가지 않았던 건 그 덕분이기도 했다.

물론 내가 대놓고 그에게 감사를 표시하거나 할 순 없지만…… 약간 빚을 졌다는 자각은 가지고 있었다.

루카는 그런 내 생각은 모른 채 물끄러미 날 보더니 손으로 탁구대를 가리켰다.

{혹시 탁구를 치고 싶다면 잠시 기다려 주시길. 지금 아침 운동이 덜 끝나서요.}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구경만 해도 될까요?}

{탁구를 치실 줄 모르십니까?}

{예.}

{응?}

그럼 대체 여긴 왜 왔냐는 눈빛이 싸늘하게 날아와 꽂혔다. 난 할 말이 없어서 슬그머니 그의 시선 바깥쪽으로 물러섰다.

사실 이런 스포츠를 배워 봐도 재미있을 것 같긴 했지만, 지금같이 중요한 때에 혹 초보자가 잘못하다가 부상이라도 당한다면 정말 그것처럼 바보 같은 일도 없었다.

만약 배워야 한다면 조금 더 여유가 있는 상황에서 배워 보고 싶었다.

그렇게 구경이나 하려고 하는데 루카의 맞은편에 있던 렌스키가 탁구채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손을 들었다.

{난 여기까지 하겠어.}

꽤 지쳤는지 렌스키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적당히 몸을 풀었으니 이쯤 하려는 듯했다.

{지고 도망치는 겁니까? 비소츠키 씨.}

{…….}

하지만 루카는 꽤 집요한 성격인지 렌스키를 도발하면서 다시 탁구대로 끌어들였다.

렌스키는 내 쪽을 힐긋 보더니 잇소리를 내며 다시 탁구채를 쥐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