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업그레이드
'허가한다.'
< 에디 겔로 소유의 배틀슈트 제어권을 강탈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
< 그레이스톤 다이나믹스 사의 제품임을 확인했습니다. >
< 배틀슈트의 최고명령권자를 사용자님으로 변경합니다. >
< 그레이스톤 사의 복제 금지 보안시스템을 해제했습니다. >
< 그레이스톤 사의 배틀슈트 13세대 모델 GD-13의 설계도를 확보했습니다. >
< 그레이스톤 사의 배틀슈트 GD-13은 마그니움나이트 10.3%를 함유한 모델입니다. >
< 에이드릭 사의 배틀슈트 MK-15 모델보다 저가형 모델인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
< 891일 분량의 교전데이터를 확보했습니다. >
< 빅터 그로스 소유의 배틀슈트 제어권을 강탈하는데 성공 ...
시스템 메세지가 셀 수도 없이 올라왔다.
그와 동시에 에디와 빅터의 배틀슈트 전면부가 마름모꼴 금속판 형태로 접히기 시작했다.
결국 마지막에 남은 건 등에 맨 두꺼운 가방형태의 금속덩어리 두 개 뿐이었다.
그러자, 입과 코에서 피를 흘리는 빅터와 배가 살짝 부풀어오른 에디의 모습이 드러나버렸다.
< 에디 겔로, 복부에 내출혈 발생! >
< 54분 이내에 수술하지 않으면 사망할 가능성 91%! >
< 빠른 처치가 필요합니다. >
시스템은 스프린터들에게 잡혀 쉴 새 없이 바닥에 내리쳐진 빅터보다 에어로트럭에 깔려있던 에디의 상태를 더 위중하게 봤다.
"배, 배틀슈트가 저절로 열렸습니다!"
그 모습을 본 스톨즈는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폭발충격으로 고장난 모양이군."
난 일단 배틀슈트가 개방된 이유에 대해서 시치미를 떼기로 했다.
"일단 저온수면 캡슐에 넣는 게 좋겠습니다."
"캡슐에 두 사람을 넣어라."
내가 명령하자, 좀비장갑 스켈레톤 네 마리가 다가와 두 사람을 캡슐 안에 넣었다.
스톨즈는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배틀슈트의 개방에 대해 문제삼기엔 두 사람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었다.
- 저온수면을 시작하시겠습니까?
두 사람을 캡슐에 넣자마자, 캡슐에서 기계음이 들려왔다.
"시작해."
- 저온수면에 접어듭니다.
- 저온수면까지 예상시간 3분 35초 남았습니다.
- MRL-003 모델은 사용자의 신진대사를 30% 수준으로 줄여줍니다.
- 심각한 부상자라도 생존가능시간을 세 배로 연장할 수 있습니다.
스톨즈가 대답한 순간, 저온수면 캡슐에서 알림음이 나왔다.
"그래서 몇 시간이나 버틸 수 있다는 거야?"
- MRL-003 모델은 보급형 제품입니다.
- MRL-003 모델에는 환부 스캔 기능이 없습니다.
- 환부 스캔 기능을 포함한 제품은 MRL-400 이상 제품입니다.
- 저희 메를린 바이오 사는 환자의 안전과 완전한 회복을 위해...
저온수면 캡슐의 설명을 들을수록 스톨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민망한 듯 날 돌아보며 말했다.
"일단 서두르는 게 좋겠습니다."
그가 캡슐을 조작하자 캡슐이 트럭 안으로 삽입돼버렸다.
"바로 운전할 수 있겠습니까?"
"문제없습니다. 저..."
스톨즈는 좀비장갑 스켈레톤들을 보며 말꼬리를 늘렸다.
"우린 위와 좌우에 매달려 경계임무를 수행하겠습니다."
하지만 난 좀비장갑 스켈레톤에 대해서 그에게 설명해줄 생각이 없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잠시 뜸을 들인 스톨즈는 결국 내 눈을 마주친 후 궁금한 표정을 보였다.
하지만 그때 타이밍 좋게 에어로트럭에서 경고음이 터져나왔다.
- 5천 마리 이상의 좀비집단이 1분 거리로 접근했습니다.
- 조속히 현장에서 이탈해주시길 바랍니다.
스톨즈는 그 경고음을 듣곤 바로 운전석에 올라 엑셀을 밟아버렸다.
돌아오는 길은 순조로웠다.
우리는 천 마리 이상의 좀비집단은 좀비보다 빠른 에어로트럭의 속도로 우회해버렸다.
유틀란트 시처럼 전방위적으로 포위당한 상황이 아니라 우회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백 마리 미만의 좀비집단은 좀비장갑 스켈레톤을 믿고 뚫고 달려버렸다.
그러자 1시간도 안되서 장벽에 도착하고 말았다.
에어로트럭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중간에 멈춰버리는 게 아닌 지 걱정도 됐었는데 다행이었다.
"거기, 정지!"
우리가 장벽 엘리베이터에 다가가자, 외골격 로봇을 입은 장벽방어군 병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대구경포의 포구를 들이밀었다.
"차에 실은 그 괴상한 것들은 뭔가? 영락없이 좀비 같이 생겼군."
"암셀연구소 소속 네크로맨서 스톨즈다. 방금 뭐라고 했지?"
그때 운전석 창문으로 고개를 내민 스톨즈가 소리쳤다.
"아, 암셀 연구소 소속이셨습니까?"
"이 자식이 감히 네크로맨서의 연구물품을 괴상한 것들이라고?"
"오해가 있었습니다! 네크로맨서님이 탑승하신 줄 알았더라면...!"
그때 다른 외골격 로봇이 달려오더니, 빠르게 로봇에서 내린 방어군 병사가 손바닥을 비벼대기 시작했다.
"조던! 당장 뛰어내려와서 사과드리지 않고 뭐하는 거야!"
"아... 예!"
그 순간 정지를 외쳤던 병사가 급히 외골격 로봇에서 내려와 군기가 바짝 든 모습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스톨즈님. 이 놈이 도시수복전투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된 신참이라 실수를 한 모양입니다."
"죄수 출신이었다고?"
스톨즈가 돌아보며 묻자, 조던의 얼굴이 붉게 물드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튼, 앞으로는 조심하라고. 우린 부상자도 있는데 시간을 지체하면 어떻게하나?"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실수하지 않도록 제가 단단히 교육하겠습니다."
"그래."
스톨즈가 그들을 지나치려는데, 고참병이 운전석 유리창에 손을 턱하고 올리며 스톨즈에게 물었다.
"스톨즈님, 저거 안전한 물건이... 확실하겠죠?"
"나 암셀연구소 스톨즈야! 내가 장벽 안에 산 좀비를 들이겠나?"
"하하! 형식적인 질문이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쇼."
고참병은 귀 옆의 통신단말을 건드리더니 엘리베이터를 운용 중인 후임병에게 말했다.
"당장 22번 화물 엘리베이터 비워! 스톨즈님부터 올려보낸다!"
곧이어 에어로트럭이 우리를 실은 채로 화물용 엘레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거만했던 장벽방어군들도 암셀연구소 소속 네크로맨서란 말에 설설기는 걸 보면 이 도시에서 네크로맨서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갈 정도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병사들의 헛소리에 기분 상하신 건 아니시죠?"
엘리베이터에 탄 스톨즈는 연신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이, 이 스켈레톤들이 얼마나 귀한 줄 모르는 무지렁이들입니다. 그래서 말씀드리는 건데..."
스톨즈는 은근슬쩍 말을 늘리며 내 눈치를 살피더니 가슴에서 지갑을 꺼내들었다.
"보잘 것 없지만, 제 명함입니다."
거기서 검은색 명함 한 장을 꺼내더니, 내게 건네며 말했다.
< 순수한 마그니움나이트 45그램입니다! >
배틀슈트에 넣기도 아까운 마그니움으로 명함을 만든 것이다.
시스템뿐만 아니라 나도 그 돈지랄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희 암셀학파에 대해 잘 모르시겠지만, D 구역에서 가장 큰 강화시술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기회를 주신다면 발렌틴 학파의 유지를 이으신 아서님을 연구소로 한번 초대하고 싶습니다."
스톨즈는 명함을 두손으로 건네며 눈을 내리깔았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공손한 태도였다.
문제는 내가 발렌틴 학파 소속도 아니고 심지어 발렌틴 학파라는 유파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오늘, 그것도 스톨즈의 입을 통해 들었다는 점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한번 찾아뵙죠."
"여, 영광입니다! 스승님께서도 크게 환영하실 겁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스톨즈는 우상을 만난 소년처럼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었다.
'발렌틴 학파가 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암셀연구소를 찾아가는 건 호랑이굴에 내 발로 걸어들어가는 꼴이야.'
하지만 난 절대로 암셀연구소에 갈 생각이 없었다.
그때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는 알림음이 들려왔다.
< 사용자님의 명령에 따라 좀비장갑 스켈레톤에 대한 영상기록을 남긴 CCTV 4대의 기록을 말소했습니다. >
< 장벽 방어군은 사용자님이 출입했다는 사실만 알 뿐, 좀비장갑 스켈레톤에 대한 기록은 모두 삭제조치했습니다. >
시스템은 실시간으로 좀비장갑 스켈레톤에 대한 영상기록을 삭제하고 차단 중이었다.
'좀비근육이 굳이 밖으로 드러날 필요는 없지. 돌아가는대로 아머드 스켈레톤의 장갑을 좀비근육 밖으로 노출시켜야겠어.'
스톨즈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내게 물었다.
"이대로 암셀연구소로 함께 이동하시는 건...?"
"여러차례 전투를 수행한 이후라 정비를 먼저 해야할 것 같소. 연구소는 다음 기회에 찾아가도록 하지."
"피곤하실텐데, 제가 과한 욕심을 부렸습니다. 그럼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내가 에어로트럭에서 내리자, 장벽 엘리베이터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수 많은 사이보그들의 시선이 나와 좀비장갑 스켈레톤들에게 몰려들었다.
< 시스템의 연산능력으로는 한번에 27개 이상의 컴퓨터를 해킹할 수 없습니다. >
< 빠르게 이 자리를 이탈해주시기 바랍니다. >
< 시스템 업그레이드가 필요합니다. >
시스템은 우는 소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입소문이 도는 건 어쩔 수 없겠군.'
다행히 하수구 입구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언제까지 뒤를 밟을 생각이지?"
내가 뭐 훔칠 게 없을 지 내 뒤를 졸졸 따라오는 사이보그들을 돌아본 순간이었다.
그땐 이미 좀비장갑 스켈레톤이 제일 앞에 선 사이보그에게 발차기를 날리고 있었다.
꽈광! 하는 굉음과 함께 날아간 사이보그가 건물 잔해에 파묻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사이보그들은 호랑이를 만난 토끼들처럼 사방으로 흩어져버렸다.
난 우리를 주시하는 시선이 모두 사라진 걸 확인한 후 하수구로 내려와버렸다.
내가 사다리를 내려와 장막 앞에 서자, 닫힌 문을 통해 테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저것들은 다 뭐에요?
"내가 주문한 물건들은 모두 확보해뒀나?"
내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들어가자, 내 뒤에 늘어선 좀비장갑 스켈레톤들을 본 테리가 놀라 입을 떡하고 벌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렇게 밝은 대낮에 은신처로 데려오면 어떻게 해요? 잠깐, 이 냄새...!"
"좀비 근육을 사용해서 출력을 높였어."
테리는 끔찍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출력이 높은 인공근육이 얼마나 많은데, 인공근육을 놔두고 좀비근육을 사용했어요?"
"저건 장벽 밖에서 무료거든."
문을 닫고 들어오자, 소파 옆으로 네 종류의 금속 주괴들과 배터리 따위가 쌓여있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준 뉴로모픽칩 설계도를 크릭에게 가져가 5천만 크레딧으로 바꾸고 그 돈으로 내가 넘긴 물품리스트를 사온 것 같았다.
"크릭이 제값을 지불한 모양이군?"
"가끔 값을 후려치긴해도 돈을 떼먹을 사람은 아니에요."
테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반나절만에 이렇게 많은 물건을 옮기다니, 테리도 대낮에 하수구를 드나들었겠군?"
"전 매번 다른 입구를 이용해서 들어왔어요. 그런데 이렇게 많은... 이것들을 뭐라고 불러야하죠? 생체근육 안드로이드?"
"안드로이드?"
테리의 질문을 들은 순간,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좀비근육만 숨기면 안드로이드라고 말하고다녀도 아무도 스켈레톤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하겠군.'
난 길가에 널부러진 폐차를 이용해 아머드 스켈레톤을 만들었다.
그 순간 내 스켈레톤들은 언데드인 동시에 기계가 돼버린 것이다.
그리고 스톨즈의 반응을 보면 적어도 이 도시 팔미라엔 기계화된 언데드가 없는 것 같았다.
"이것들을 강화시키려고 5천만 크레딧을 낭비한 거라고요?"
사실 그녀에게 5천만 크레딧어치의 재료를 사오라고 한 건 좀비장갑 스켈레톤을 강화시키려고 한 주문은 아니었다.
'원래는 TTNA-207 합금강으로 쥬드 같은 무인경비로봇 여러 대 만들 생각이었지.'
한 100대 정도 만들면 릴 같은 패밀리 놈들을 고철덩어리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머드 스켈레톤도 모자라 좀비장갑까지 만든 상황에서 쥬드 수준의 무인경비로봇을 개조할 이유는 없었다.
"계획이 바뀌었어. 돈은 얼마나 남았지?"
"70만 크레딧 정도요."
"난 곧바로 작업에 착수해야하니까 테리는 나가서 최신형 통신모듈 19개만 사다줘."
군체정신은 통신모듈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최상의 효과를 빚어내는 스킬이었다.
난 50년 전에 망한 도시에 널려있는 폐차에서 흡수한 통신모듈보다 더 나은 제품이 필요했다.
'업그레이드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