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워슈트
D-3 구역 클라크 케미컬 사 앞 공용주차장.
호너 데이비슨은 검은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공용주차장 기둥 뒤에 숨어있었다.
그는 차량이 지나갈 때마다 기둥 뒤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때 그 앞에 에어로트럭 한 대가 멈춰섰다.
호너는 습관처럼 기둥 뒤로 숨었다.
하지만 에어로트럭의 운전석 창문이 열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너, 날세."
게릭슨의 친구라는 이름 모를 용병이었다.
이번에도 상대는 검은 배틀슈트 차림일 뿐 얼굴조차 드러내지 않은 모습이었다.
"차를 바꿔서 몰라볼 뻔 했군."
그가 다가가자 용병이 운전석 창문을 올렸다.
그러자 창문에 재료 목록이 펼쳐졌다.
- 세이지 크리스탈 (100 캐럿 이상) : 749개
- 진은 : 749 그램
- 오리하르콘 : 106 큐브
- 코발트...
.
.
- 총 매입대금 : 2,459억 크레딧
그 목록을 본 호너는 심장이 멈출 뻔 했다.
'세, 세이지 크리스탈이면... 현자의 돌이잖아?'
그건 고급 마력로의 주요재료인 세이지 크리스탈때문이었다.
'망명귀족이 고작 열흘만에 3,500억 크레딧을 써? 저번엔 진은과 마그니움이더니... 이번엔 고급 마법재료들을 한 가득 요청했어.'
의문의 용병이 모시는 망명귀족이란 자가 얼마나 거물일지 짐작하기가 두려울 정도였다.
호너는 두방망이질치는 가슴을 다독이며 차창문을 톡톡 두드렸다.
그는 남몰래 깊게 호흡한 후 담담한 척 물었다.
"그쪽 보스는 외골격로봇을 연구한다고 하지 않았어? 100캐럿 이상 나가는 현자의 돌이면... 캡틴급 배틀슈트에 들어가는 초소형마력로의 주요재료잖아?"
"문제될 거 없잖아?"
하지만 상대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되물을 뿐이었다.
"이 정도면, 클라크 케미컬의 1년 매출이랑 맞먹는 양이야! 저번에도 천억 크레딧어치 물량을 소화하느라고..."
호너는 용병이 도대체 어떤 주인을 모시고 있는건지 떠보기 위해 너스레를 떨어봤다.
하지만 상대는 그의 말을 딱 자르며 물었다.
"호너, 원하는 게 뭐야?"
상대가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니, 호너도 사실대로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거래가 어그러지고 다신 자신을 찾지 않을테니까.
"네 보스를 만나게 해줘. 이 건을 받으면 나도 이 회사 못 다녀."
***
검은 머리는 모자와 마스크까지 벗으며 말했다.
그러자 게릭슨이 내게 정신파로 물었다.
- 어떻게할까요?
'믿을만 한 인물인가?'
- 제가 살아있었을 땐, 믿을만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 도시에서 수천억 크레딧짜리 거래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인간은 찾기 어렵습니다.
게릭슨은 자신의 친구인데도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초소형마력로의 재료는 바딤 형제한테는 구할 수 없으니... 별 수 없군.'
장벽방어군의 군수창고를 터는 바딤 형제들은 연구자원에 접근할 권한이 없었다.
애초에 이런 재료는 장벽방어군 산하 연구소에서만 취급하기 때문이다.
'재료만 보고, 내가 뭘 만들려고하는지 알아채는 걸 보면 눈썰미가 좋은 놈이야.'
게릭슨은 다시 한번 내 표정을 살폈다.
명확한 명령을 원하는 것 같았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홀로그램 모니터를 터치했다.
그러자 에어로트럭의 문이 열렸다.
호너는 머뭇거리더니 에어로트럭에 올랐다.
내 뒤에 서 있는 데스윙과 제니퍼를 번갈아보더니 그 앞에 앉아있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처음 뵙겠습니다. 호너 데이비슨입니다."
호너는 제법 정중하게 인사해왔다.
"아서다."
"마법사시라고 들었습니다."
"날 보자고 한 이유가 그건가? 내가 마법사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
내가 손을 펼치자, 붉은 마력입자가 순식간에 염력 마법식을 구축해버렸다.
그와 동시에 호너 데이비슨이 앉은 자세로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어!"
난 그가 에어로트럭의 천장에 부딪히기 전에 소파에 내려놓았다.
"시, 실례했습니다."
"겉치레는 그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둘 다 바쁜 사람들 아닌가?"
호너는 마법사인 것을 실감하자, 놀랐는지 옷매무새를 재빠르게 다듬더니 정중하게 말했다.
"이만한 물량을 사들이면 소문이 돌 수밖에 없습니다. 본사에서 감사팀을 가동하기 전에 몸을 빼내야할 것 같습니다."
"나 보고 책임져라?"
"아서님께서 연구재료를 소모하시는 시간을 계산해보시면 이렇게 은밀하게 구하는 것도 한계라는 걸 아실 겁니다."
단순히 자신의 신변을 책임지라는 이야기는 아닌거 같았다.
'연구재료의 소모가 너무 빠르다? 지난번 거래가 언제였지?'
호너의 말을 듣고 저번 거래가 언제였는지 되짚어봤다.
< 정확히 열흘 전이었습니다. >
< 저번 거래의 매입대금은 1,097억 크레딧입니다. >
고작 열흘만에 3,500억 크레딧이 넘는 거래를 해달라고 부탁한 셈이었다.
클라크 케미컬 사는 D구역 핵심지역에 둥지를 틀만큼 규모가 있는 중견기업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중견기업이라도 고작 10일 만에 3500억 크레딧이 넘는 재료를 소모하면 티가 날 수밖에 없다는 소리였다.
"열흘에 3500억... 생각보다 많이 쓰긴 했군."
"그, 그렇습니다. 차라리 회사를 차리고 그 회사를 통해 매입하면 본사 감사팀의 눈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호너의 말은 마치 회사를 차리게만 해주면, 자신이 연구재료 매입은 자신이 있다는 식이었다.
"널 믿고 회사를 차려라?"
"절 못 믿으신다면... 아서님의 수하들을 회사에 배치하시는 방법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장 저를 대체할 사람이 없으신 거 아닙니까? 앞으로 세울 재료매입 전문회사를 저에게 맡겨주신다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호너는 감히 내 눈을 똑바로 마주보지도 못했다.
흔들리는 눈동자와 떨리는 손끝을 보면 진짜 마법사를 마주한다는 사실이 두려운 것 같았다.
하지만 내 턱과 가슴어림을 보면서도 할 말은 다 해냈다.
지난 번 거래를 마치고 열흘이 넘도록 클라크 케미컬에서 발각되지 않은 걸 보면 재주도 있는 인물 같았다.
"말단직원으로 썩히긴 아까운 친구군."
"저, 정말 저를 써주시는 겁니까?"
"앞으로 매입규모가 더 커질 것이다. 만약 중간에 장난질을 친다면... 게릭슨의 친구라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물론입니다! 그나저나... 게릭슨이 죽기 전에 아서님과도 아는 사이였습니까?"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일단 이번 건부터 제대로 마무리 짓고 저 친구한테 연락하도록."
난 운전석에 앉은 게릭슨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본 호너는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말했다.
"이번 물량은 늦어도 3일 안에는 해결할 수 있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게릭슨이 차문을 열었다.
호너가 내리자, 워리어 두 기가 따라내렸다.
"중간에 문제가 발생하면 내 안드로이드들이 도와줄 것이다."
"감사합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우린 호너와 워리어 두 기만 공용주차장에 남겨놓고 집으로 향했다.
***
9일 후, D-135 구역 공장지대 물류창고.
나는 9일동안 만든 은청색 로봇을 바라봤다.
< 탑승형 이족보행병기 [워슈트] 제작이 완료되었습니다. >
< [워슈트]는 크기가 3미터이며 아머드 스켈레톤 워리어가 탑승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습니다. >
< 참수로봇의 작동원리를 적용해 만들었으며 재질은 마그니움 기반 합금강인 M-250강입니다. >
< 팔과 다리는 [바딤의 개조팔]의 구조를 차용하여 강력한 완력을 제공합니다 >
< 병기의 중심이 되는 척추는 카윈 테크놀로지 사의 [군납용 부스팅 척추 임플란트 CTBB-360]을 개조하였습니다 >
< 에너지원은 초소형마력로 A-602 1기와 소형핵융합로 CFR-101 1기이며 탑승자의 배틀슈트와 마력공조가 가능합니다. >
< 현재 두 종류의 병기가 장착되어있습니다 >
< 탑승형 이족보행병기 워슈트를 테스트하시겠습니까? >
시스템은 내 마음을 아는 듯이 시스템 메세지로 스펙을 알려주더니, 워슈트 테스트를 할 지 여부를 물어왔다.
나는 탑승 시동어를 외쳤다.
"콕핏 개방!"
내가 명령하자, 3미터 크기의 로봇에서 붉은 빛이 번뜩였다.
- 아서님의 신원을 확인했습니다.
- 워슈트, 조종석을 개방합니다.
그와 동시에 둥근 가슴이 옆으로 열렸다.
워슈트는 바딤의 개조팔을 보고 그 안에 담긴 참수로봇의 구조를 연구한 끝에 만든 탑승형 로봇이었다.
장갑은 순수 마그니움에 비하면 싸고 단단한 M-250강으로 만들었더니, 전체적으로 은청빛을 띄었다.
'새로운 기간트워리어급 배틀슈트를 우선적으로 만드느라 마그니움이 얼마 남지 않은 게 한이다.'
골렘처럼 장갑 전체를 마그니움으로 만들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현재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 남은 마그니움 주괴는 342억 크레딧입니다. >
< 구 버전의 기간트워리어급 배틀슈트 A-100W 37기가 남아있습니다. >
'출력 차이가 너무 심해서 교체했지만... 팔 수도 없으니 짐덩이로군.'
난 이번에 오귀스트 에너지 사의 초소형마력로 AG-539 모델을 연구한 끝에 초소형마력로 A-602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602 스프린터 파워를 자랑하는 A-602 모델은 워슈트뿐만 아니라 새로운 기간트워리어급 배틀슈트 AW-100W에도 탑재되었다.
그것도 무려 7기나!
< 구 버전 A-100W의 출력은 1,187SP입니다. >
< 신 버전 기간트워리어급 배틀슈트 AW-100W의 출력은 2,338SP입니다. >
< 이는 순간 출력만 비교했을 때, 소형핵융합로를 상회하는 동력원입니다. >
내가 탑승하자, 개방됐던 가슴이 닫히고 사방이 디스플레이로 변했다.
- 내부시스템을 점검합니다.
워슈트의 전투보조시스템이 보고한 순간, 내 가슴 앞뒤에서 위잉! 하는 소음과 진동이 전해졌다.
- 후면 초소형마력로 정상!
- 전면 소형핵융합로 정상!
- 삼중수소 카트리지의 에너지 잔량은 95%입니다.
- 아서님의 배틀슈트와 에너지 공조를 허락하시겠습니까?
"허락한다."
- 아서님의 배틀슈트와 연결합니다.
< 사용자님의 배틀슈트와 워슈트가 연결되었습니다. >
< 워슈트를 급격하게 기동하실 경우, 착용하신 배틀슈트의 마력로가 과열될 수 있습니다. >
- 연결상태 양호!
- 무기를 점검합니다.
- 플라즈마 파워드 건, 전력투입시스템 정상!
- 플라즈마 파워드 건, 가스혼합시스템 정상!
- 울트라소닉 소드, 진동기능 정상!
- 워슈트, 모든 기능 정상입니다.
- 탑승자 타입 : 사령술, 마법 유저.
- 아이디 : 아서.
- 마력 공조체제 연결됩니다.
그 순간 내 몸과 배틀슈트의 마력로 그리고 워슈트의 후면에 설치한 마력로가 연결되는 걸 느꼈다.
손을 뻗으니, 워슈트의 손바닥 장갑 앞에 붉은 마력입자가 나타나 마법식을 이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워슈트가 붉은 빛 격자무늬 배리어로 뒤덮여버렸다.
'마력소모가 말도 안되게 적군.'
내가 다시 손을 내젓자, 적층구조 배리어가 사라졌다.
'한번 테스트해보고 싶긴 한데... 여기선 무리겠지?'
< 물류창고의 내진설계를 감안한 결과, 워슈트의 운동능력을 테스트할 경우 붕괴 위험은 87%입니다. >
'그럼 플라즈마 파워드 건이나 울트라소닉 소드는?'
< 플라즈마 파워드 건의 탄두는 TTNA-207 합금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1킬로그램의 탄두가 마하 8의 속도로 날아갈 경우, 사용자님의 물류창고뿐만 아니라 D-135구역에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 있습니다. >
< 적층구조 배리어를 물류창고 전체를 뒤덮을 만큼 대규모로 사용할 경우, 시정부의 주의를 끌 수 있습니다. >
< 실험을 강행하시겠습니까? >
난 시스템에게 대답하는 대신 울트라소닉 소드를 들어보였다.
- 울트라소닉 소드 온!
- 현재 울트라소닉 소드는 초당 11만 7천 번 이상 진동 중입니다.
순수 마그니움으로 개조한 칼날은 뭐든 썰어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았다.
겉으로 보기엔 초당 11만 번 이상 진동하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평온한 모습이었다.
난 아쉬운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진동기능을 꺼버렸다.
그제야 물류창고를 가득채운 106기의 워슈트가 내 눈에 들어왔다.
'이 정도면... 크랩 정도는 찜쪄먹을 수 있겠어.'
조금 늦었지만, 국지전에 참가해야하나 고민이 될 정도였다.
< 국지전은 팔미라 시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
'벌써?'
< 사용자님께서 배틀슈트와 워슈트를 만드시는 동안 무려 일주일을 싸웠습니다. >
< 4군단 참모부는 이번에 대승을 거뒀다고 알렸습니다. >
< 하지만 국지전에 참가한 용병과 사이보그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은 조금 다릅니다. >
'소문? 설마 마운틴 퀸까지 참전한 건가?'
<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전투가 끝날 때까지 마운틴 퀸은 참전하지 않았습니다. >
< 4군단 참모부의 공지와 소문을 대조해본 결과, 4레벨 엘리트 좀비 브레이커 5 마리를 사살한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
'사실과 다른 것도 있나?'
< 있습니다. >
< 4군단 참모부는 이번 전투를 대승이라고 평가했습니다. >
< 하지만 직접 참전한 용병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번 국지전에 참가했던 골렘 중 3기가 완파됐다고 합니다. >
'이번 국지전엔 골렘이 다섯 기나 참전했다고 하지 않았나? 마운틴 퀸이 참전하지 않았는데도 반 이상이 박살났다고?'
< 공식발표와 다르다고 무시하기엔 너무 많은 용병과 사이보그들이 같은 증언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
'아! 이번에 참전했으면... 부서진 골렘을 만져라도 볼 수 있었을텐데!'
< 참전한 기간트만 150기였습니다. >
< 사용자님께서 참전하셨다고해도 골렘만 만지고 빠져나오기는 쉽지 않았을 겁니다. >
시스템의 조언을 듣고도 아쉬움과 후련함이 교차했다.
마운틴 퀸만 없다는게 확실했으면 꽤나 해볼만한 싸움이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참여했을 때도 마운틴 퀸이 등장하지 않았을 지는 모를 일이긴 했다.
'아쉬워도 어쩔 수 없지.'
그때 샤를이 내게 다가왔다.
"연구소장님, 지난 10일 간의 연구결과를 보고해도 되겠습니까?"
지난 10일이면 연구정령으로 다시 태어난 후 계속 연구를 해왔다는 뜻이었다.
"재생연구에 진척이 있었나?"
"아닙니다. 지난 10일 동안 한 연구는 첫번째 표본과 3레벨 엘리트 좀비 크랩이라고 불리는 생체병기에 관한 실험들이었습니다."
"따로 시킨 적은 없었는데...?"
"연구소장님께 도움이 되고자..."
자아가 있는 정령이라서 그런지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하는 면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한번 들어보지."
내가 묻자, 연구정령 샤를이 내 눈앞에 홀로그램창을 펼쳐보였다.
- 1. 첫번째 표본(이름 : 조셉 메를린)에서 보고되지 않은 변이유전자 11개 발견 및 연구.
- 2. 3레벨 엘리트 좀비 크랩의 비정상적인 힘에 대한 연구.
- 3. 좀비인자의 원리연구.
샤를이 연구한 분야는 세 가지였다.
세 가지 모두 심상치 않은 내용이었다.
솔직히 샤를이 고작 열흘만에 의미있는 연구결과를 내놓았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마음 편히 물었다.
"변이유전자?"
"연구소장님의 시스템과 정보교류한 결과 팔미라 시에서 초상능력이라고 부르는 초능력과 관련된 유전자들입니다."
"뭐?"
난 곧바로 소음마법과 마력차폐결계부터 펼쳤다.
이 세상에서 귀족의 자격조건으로 평가되는 항목이 바로 초상능력이었기 때문이다.
"연구결과 첫번째 표본의 변이유전자 중 7, 8번이 그의 초상능력과 관계되었다는 걸 밝혀냈습니다. 하지만 연구결과 2, 6, 9, 10, 11번 변이유전자가 7, 8번 변이유전자의 초상능력을 저해하고 있다는 걸 알아냈습니다."
내가 연구정령 샤를에게 조셉 메를린을 맡긴 건 폭발에 휘말려 위중한 환자를 살리길 원했기 때문이다.
의뢰를 받고 나왔는데, 의뢰주가 죽어버린다면 앞으로 용병생활이 팍팍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샤를은 한발 아니, 수백 발자국을 더 나아가버린 것 같았다.
"초상능력을 저해하는 변이유전자를 제거하시겠습니까?"
금발에 푸른 눈을 지닌 소녀는 날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며 물었다.
"일단 그건 보류하지. 조셉 메를린은 내 사람이 아니니까."
난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하지만 심장은 거세게 뛰고 있었다.
"조셉 메를린에게서 특정 변이유전자를 골라서 제거할 수 있다는 건... 설마 일반인의 게놈에도 초상능력과 관련된 변이유전자를 삽입할 수 있다는 건가?"
"나노머신의 유전자가위기술을 이용하면 특정 변이유전자를 선별해서 삽입 또는 제거할 수 있습니다. 변이유전자 삽입에 필요한 시간은 36시간입니다."
소름이 돋았다.
볼드윈 가문은 수 세대에 걸쳐서 인공자궁기술을 이용해 더 좋은 유전자조합을 구성해냈다.
하지만... 세대를 거치지 않고 즉시 변이유전자를 조합할 수 있다면?
"귀족을 찍어내는 것도 가능하다는 뜻 아닌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간단한 수술로 얻을 수 있는 능력만으로 그 사람을 귀족으로 칭하는 건 부적절하다고 판단됩니다."
샤를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 시대가 조금... 특별한 상황이긴 하지."
"단지 특정 변이유전자를 물려받아 초상능력을 발현했다고 귀족이란 신분을 갖는 건 불합리합니다."
샤를은 신분제도 자체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아스트라칸이 땅 속에 파묻히기 전엔 신분제가 없는 사회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좀비가 집어삼킨 세상을 실감해본 난 생각이 조금 달랐다.
"저들은 그 초상능력으로 도시를 지키고 인류를 보호해왔어. 물론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움직인 거긴하지만, 그들이 없었다면 팔미라 시도 폐허도시 유틀란트처럼 좀비들에 의해 무너졌을 수 있지."
"연구소장님의 의견에 따라 팔미라 시 3대 귀족의 공로를 인정하겠습니다."
인류의 입장을 말하자, 샤를은 금방 납득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샤를의 초상능력 관련 연구를 돕는 게 앞으로의 성장을 돕는 길이란 걸 느꼈다.
"뭘 도와주면 네 연구에 진척이 있을까?"
"더 많은 표본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표본?"
"더 많은 변이유전자를 확보할 수 있으면, 더 많은 초상능력에 대해 연구할 수 있습니다. 조셉 메를린이 가진 변이유전자는 고작 11개뿐이었습니다."
"흠... 적절한 방법이 있을 것도 같군. 조셉 메를린을 바로 깨울 수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