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애도
그 시각, T-76 구역 상공 500미터.
난 전술 통신망으로 들어온 구조신호를 따라 빠르게 북쪽으로 비행하고 있었다.
우린 지난 1시간 반 동안 무려 여섯 용병연합을 구출했다.
그 과정에서 매번 수십만 마리의 좀비떼를 처리했다.
하지만 엘리트 좀비가 아니라 상대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건 사망자 수였다.
4군단의 블러드 클라우드로 뿌린 피비를 맞은 지 1시간이 넘어가자, 만나는 용병연합마다 수천 명의 사망자가 쌓여있었다.
'이런 식이면 용병들을 운송할 차량이 모자라겠어.'
밀러쉴더스처럼 대기업 산하 사냥기업 소속의 용병들은 하나같이 에어로트럭을 보유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군소 용병단 출신들은 일반 수송트럭을 가져온 게 문제였다.
수십만 마리의 좀비떼를 상대하는 과정에서 수송트럭은 때론 벽으로 때론 피라미드의 일부분으로 사용됐다.
그 과정에서 내구력이 약한 일반 수송트럭은 필연적으로 고장날 수밖에 없었다.
시체와 부상자는 많은데 그들을 수송할 차량이 부족한 이유였다.
워슈트를 타고 비행하는 내가 선두였다.
그 뒤로 에어로트럭을 탄 용병들은 밀러쉴더스의 휴고 가르시아 사냥 1팀장이 이끌었다.
마지막은 6개 용병연합 중 일반수송트럭을 탄 용병들이었다.
그들은 사냥 2팀장인 세사르 알마챠가 이끌고 뒤를 따르고 있었다.
문제는 에어로트럭을 탔건 일반 수송차량을 탔건 부상자와 사망자의 시신을 과적하는 바람에 속도가 느려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맨 끝까지 잘 따라오는지 모르겠군.'
내가 꼬리가 너무 길어질까 걱정한 순간, 전술 통신망으로 낯선 목소리가 전해졌다.
- 아, 아군이다!
- 이, 이쪽입니다!
- 에라트 용병연합은 아직 건재합니다!
내려다보니 야트막한 시체산 위에서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드는 용병들이 보였다.
그들은 내가 못 보고 지나갈까봐 두려운지 필사적으로 팔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예상했던대로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시스템, 지금 워슈트를 내보내도 괜찮나?'
< 전술 통신망 정보를 검색합니다. >
< 아군 용병 중 고급 광학줌 기능을 탑재한 배틀슈트는 317기입니다. >
< 고급 광학줌 기능 탑재 배틀슈트의 시야 계산 중... >
< 밀러 쉴더스 93기, 6개 용병연합 212기, 에라트 용병연합 12기가 고급 광학줌 기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
< 이 중 에라트 용병연합 12기는 현재 시야범위를 고려할 때, 고급 광학줌 기능 사용시 아군의 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
< 전술통신망 기록상 일반적으로 중근거리 교전시에 고급 광학줌을 켜는 경우는 3% 이하입니다. >
'확률이 낮다고는 해도 이런 식이면 곤란해... 방법을 찾아야겠어.'
밀러쉴더스나 다른 용병연합과는 이미 수십 킬로미터 떨어졌으니, 그들의 시선은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날 애타게 올려다보는 에라트 용병연합의 눈은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아공간 사용을 들키지 않을 방법을 찾아봐야겠어.'
그때 지상에서 꽈광! 하는 폭발음이 터졌다.
에라트 용병연합의 전선 한축이 좀비떼를 버티지 못하고 자폭용 폭발물을 쓴 것 같았다.
< 지금입니다! >
< 모든 광학줌 탑재 배틀슈트의 시야가 사용자님을 벗어났습니다. >
폭음 때문에 모두 시선을 돌린 모양이었다.
'자, 이제 시체는 그만 먹고 다들 힘 써야될 시간이다!'
내가 명령한 순간이었다.
내 머릿 속에 메카닉 네크로맨서의 무덤 속의 모습이 펼쳐졌다.
3층 시체보관실에서 산처럼 쌓인 2레벨 좀비 스프린터의 시체를 증식장갑에 먹이고 있던 아머드 스켈레톤들이 하나둘, 증발해버렸다.
증발하듯 사라진 아머드 스켈레톤들이 모습을 드러낸 건 4층 기체보관실이었다.
기체보관실 거치대에 거치된 워슈트에 빠르게 탑승하는 아머드 스켈레톤들을 보는데, 시스템이 메세지를 띄웠다.
< 준비된 워슈트부터 출고하시겠습니까? >
< 현재 준비된 워슈트는 3호기, 4호기, 6호기... >
'출고해!'
난 양손을 등뒤로 펼치며 명령했다.
그 상태로 급강하하는데 내 뒤로 퍼벙펑! 공기 터지는 소리를 내며 워슈트들이 출고되기 시작했다.
한 대뿐이었던 워슈트가 87기로 늘어난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난 그대로 급강하해서 좀비들 위로 떨어져내렸다.
쿠구구궁! 하는 굉음과 함께 내려선 워슈트들은 초당 5,6번씩 울트라소닉 소드를 휘두르며 좀비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87기의 워슈트는 빠르게 좀비떼를 베어넘기며 위태위태하게 전선을 유지하던 에라트 용병연합의 용병들 앞에 섰다.
- 가, 감사합니다. 바서 에라트입니다.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파도처럼 밀려오던 좀비 대부분을 베어내자, 에라트 용병연합을 이끌던 바서 에라트가 전술 통신망을 통해 인사를 해왔다.
그는 그제야 숨이 트인다는 듯 우측에서 달려드는 스토커를 여유롭게 베어내려고 했다.
그 순간 미친 듯이 바서 에라트에게 달려들던 1레벨 좀비 스토커가 우뚝 멈춰섰다.
그리곤 뜬금없이 북쪽을 멍하니 쳐다봤다.
워슈트 안의 왼쪽 디스플레이가 놈이 바라보는 방향을 비춰줬다.
하지만 그 방향엔 놈이 싸우다말고 고개를 돌릴만큼 중요한 무언가가 보이지 않았다.
< 사용자님, 모든 좀비가 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
그 순간 시스템이 워슈트의 모든 디스플레이에 멍청한 표정으로 북쪽을 바라보는 좀비들의 모습을 비춰줬다.
난 그 현실감 없는 모습에 옆에 선 좀비들의 목을 베어버렸다.
놈들은 목이 잘려나가기 직전까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북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한순간에 좀비떼가 쏟아내던 괴성도 사라져버렸다.
세상에 때아닌 정적이 찾아온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이지?'
내가 영문을 알 수 없는 현상에 고개를 갸웃한 순간이었다.
- 크아아악!
- 크롸라!
좀비들은 갑자기 괴성을 내지르며 북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마치 지금까지 상대하던 용병들의 존재를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 같은 태도 변화였다.
나는 좀비들의 이상행동을 곧바로 전술 통신망에 공유했다.
- 아서! 집단광기네!
- 어, 어서 피해야해!
그러자, 사냥 1팀장 휴고 가르시아와 사냥 2팀장 세사르 알마챠의 다급한 목소리가 전술 통신망에 울렸다.
'집단광기?'
< 통합 데이터베이스와 전술 통신망에 공유된 데이터를 종합합니다. >
< [집단광기]란 3레벨 이상의 좀비가 진화할 때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
< 3레벨 이상의 좀비가 진화과정에 접어들면, 그 주변에 있는 좀비들이 광기에 빠집니다. >
< [집단광기]에 빠진 좀비는 극단적인 [동족포식]을 감행합니다. >
< 그 과정에서 저레벨 좀비의 진화가 촉진된다는 연구결과를 발견했습니다. >
'사람을 두고 지들끼리 잡아먹는데 그게 더 빨리 진화하게 만든다? 근데 저 놈들은 왜 서로 잡아먹지 않고 북쪽으로 달려가는 거야?'
< 광기의 근원을 찾아 이동하는 [집단광기] 특유의 이상행동입니다. >
< 통상적으로 3레벨 좀비 머슬이 4레벨 좀비 디스트로이어로 진화할 때, 집단광기가 미치는 범위는 약 15킬로미터 정도입니다. >
< 이때 진화 중인 좀비와 가까울수록 인근의 좀비들이 더 강렬한 광기에 전염된다는 기록을 발견했습니다. >
< 진화 중인 좀비와 가까울수록 [동족포식]으로 인한 진화확율까지 높아진다는 연구결과를 발견했습니다. >
< 이때 [집단광기]의 영향을 받은 좀비는 최초 진화과정에 접어든 좀비를 중심으로 군집체를 이룹니다. >
그때, 에레트 용병연합의 살아남은 용병들이 동산을 뛰어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좀비 시체에 파묻힌 트럭을 꺼낼 생각도 하지 않았다.
트럭뿐만 아니라 5천 명에 가까운 부상자들까지 내버려두고 혼비백산해서 좀비들이 향한 북쪽을 제외한 모든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4레벨로 진화하는 정도라면 용병들이 저렇게 호들갑 떨지는 않았겠지?'
4레벨 좀비 디스트로이어로 진화하는 중이라면 진화를 마친 디스트로이어보다 사냥하기가 쉬울 게 뻔했다.
그런데 팀장들이 야단을 치는 것도 모자라, 조금 전에 죽을 고비를 넘긴 용병들이 젖먹던 힘까지 다해 달리는 모습을 보니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 정찰드론의 수색 결과, 반경 100킬로미터 안에서는 진화 중인 3레벨 이상의 좀비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
'100킬로미터? 방금 전에 3레벨 좀비 머슬이 4레벨 좀비 디스트로이어로 진화할 때, 집단광기 현상이 15킬로미터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했잖아?'
내가 묻자, 시스템은 내 시야에 영상을 띄워줬다.
그건 하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정찰드론의 시야였다.
정찰드론이 내려다보는데 땅 위로 새카맣게 몰려든 좀비들이 북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사방을 봐도 모든 좀비들이 북쪽으로 향하는 모습뿐이었다.
< 이 영상은 현 위치에서 북쪽으로 145킬로미터 부근을 비행하는 정찰드론이 촬영한 실시간 영상입니다. >
< [집단광기]가 미치는 영역이 최소 4레벨 좀비 진화과정에 비해 10배 이상인 것으로보아 5레벨 좀비로 진화하는 중인 것으로 판단됩니다. >
< 통합 데이터베이스와 전술 통신망으로 공유된 데이터에는 5레벨 이상의 좀비 진화 또는 [집단광기]와 관련된 정보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
'5레벨이면... 마운틴 퀸 급이잖아?'
< 그렇습니다. >
난 그제야 이게 어떤 상황인지 파악했다.
- 아서, 5레벨 좀비의 탄생은 로두스 성국도 꺼릴만 한 일이네. 여기서부턴 4군단과 로두스 성국의 싸움이 될테니 우린 빠지세!
- 맞아. 괜히 어물쩡거리다가 놈들의 싸움에 우리까지 휘말릴 수도 있어!
사냥 1팀장 휴고가 말하자, 세사르가 말을 보탰다.
"현재 위치가 어디쯤이십니까?"
- 이제 T-79구역이고 퀼러 용병연합하고는 10분 거리네.
퀼러 용병연합은 에라트 용병연합을 만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구한 여섯번째 용병연합이었다.
다섯 곳의 용병연합을 구출하면서 밀러쉴더스가 이끄는 용병의 수가 4만을 넘어섰다.
사냥 1팀장 휴고는 4만에 달하는 생존자와 그들이 끝까지 버리지 못한 동료 용병의 시신까지 싣고 오느라 나와 거리가 벌어져버렸다.
"퀼러 용병연합까지 합세하면 거의 5만 명에 육박하겠군요?"
- 그들이 도망치지 않고, 우리와 합류한다면 5만 3천명 정도 될걸세.
자기 살 길을 찾아서 사방으로 흩어진 에라트 용병연합의 용병들을 일일이 찾아내는 건 4군단이라도 힘들 것이다.
하지만 5만 명이 뭉쳐서 이동하는 우리는 어떨까?
'절대 놈들의 레이더에서 벗어날 수 없어.'
차라리 집단광기와 그 모습을 보고 찾아온 로두스 성국의 병력들 너머로 도망친다면?
4군단은 우리보다 로두스 성국에 신경써야할 것이다.
"계획대로 곧장 남하하기엔 우리 병력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5만 명이 이동하면 4군단은 우릴 놓아주지 않을 겁니다."
-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차라리 국지전이 있었던 동쪽 백골산까지 이동해서 크게 남쪽으로 돌아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럼 4군단의 시선이 집단광기나 그걸 보고 찾아올 로두스 성국으로 향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 이번 작전의 목적이 로두스에 복수하기위함이니... 가능할 것도 같군.
사냥 1팀장 휴고 가르시아는 내 의도를 정확히 이해한 것 같았다.
"저도 최대한 빠르게 정비한 후 이동하겠습니다."
- 서두르게. 우리한테 얼마나 시간이 남아있는지 장담할 수 없어.
"걱정마시고 먼저 출발하십쇼!"
- 무운을 비네!
휴고 가르시아의 통신이 들리고, 워슈트 제일 위쪽 디스플레이를 통해 동쪽으로 방향을 트는 트럭행렬의 모습이 비춰졌다.
그리고 그 아래의 디스플레이에는 다리를 다쳤는지 쩔뚝거리며 시체산을 내려가는 에라트 용병연합의 부상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부상자들을 남겨두고 도망치는 게 에라트 용병연합뿐이었을까?'
- 적어도 20만 명 이상의 용병들이 살아남았을 겁니다. 그들도 집단광기 현상을 목격했을테니 각자 살길을 찾아 도망 중일 겁니다.
내가 묻자, 데스윙이 정신파로 대답했다.
그때, 하늘을 뒤덮은 붉은 구름이 눈에 들어왔다.
최소한 15만 명의 용병들이 사방으로 도망치며 4군단의 이목을 끌어줄테니, 더는 놈들의 시선을 가릴 필요가 없었다.
아니, 블러드 클라우드를 가지고 이동하면 그게 더 관심을 끌 것 같았다.
그래서 제니퍼에게 명령했다.
'제니퍼, 참느라 고생했다. 이젠 저 구름... 거둬들여도 좋다.'
- 그, 그... 말씀만 기다렸습니다.
제니퍼의 목소리와 함께 힘겨움과 환희가 뒤섞인 그녀의 감정이 정신파를 통해 전해졌다.
그 순간, 제니퍼 머리 위의 구름이 소용돌이 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위잉~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제니퍼를 태운 워슈트 4호기의 콕핏이 열렸다.
그 안엔 배틀슈트까지 해제한 제니퍼가 간절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하늘을 향해 오른 손을 들어올리자, 한줄기 핏빛 소용돌이가 그녀의 손을 감싸고 돌기 시작했다.
- 흐아앙!
제니퍼가 묘한 신음소리를 남긴 순간이었다.
< 유니크 등급 언데드 [아머드 스켈레톤 뱀파이어릭 위치]가 유니크 등급 스킬 [흡혈]을 사용했습니다. >
< [아머드 스켈레톤 뱀파이어릭 위치]가 통제하는 [블러드 클라우드]의 무게는 약 250톤 규모로 추정됩니다. >
< 250톤의 혈액을 [흡혈]하기까지 예상소요시간은... 6시간 17분 입니다. >
'6시간까지 기다릴 순 없어. 남은 혈액은...'
- 주인님! 제발 피를 버린다는 말씀만은...!
그때 내 생각을 접한 제니퍼가 애원해왔다.
"시체보관실에 보관했다간... 좀비 시체와 범벅이 될텐데, 곤란하군."
제니퍼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혈액을 좀비의 썩은 피와 섞으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니퍼는 한번도 썩은 피를 탐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연구정령 샤를이 말했다.
- 연구소장님, 그 정도 혈액이라면 제 연구소에 보관할 수 있는 양입니다.
내부 통신망을 통해 전해진 내 목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그럼 되겠군. 제니퍼, 흡혈할 수 있는 양만큼만 흡혈하고 나머지는 샤를의 연구소에 보관하자."
- 주인님, 정말... 감사합니다!
난 제니퍼의 감사인사를 뒤로하고 산 정상에 쌓여있는 배틀슈트로 다가갔다.
그건 에라트 용병연합이 버리고 도망간 사망자들이었다.
'사망자 수는 얼마나되지?'
< 에라트 용병연합이 전술 통신망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3,111명입니다. >
그야말로 엄청난 수였다.
난 4군단의 수작에 사망한 희생자들을 내려다보며 가볍게 고개숙여 애도를 표했다.
그리곤 그들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일어나라, 아머드 스켈레톤!"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훌륭한 애도는 죽은 자를 다시 살려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