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초토기사
다음 날, D-3구역의 한 꼬마빌딩 145층.
영역 상으론 팔미라 시 서쪽, 1군단의 관할구역에 위치한 빌딩이었다.
"다른 건물에 비하면 작긴한데...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인데 건물을 통째로 살 필요가 있을까?"
"일단 입지가 좋습니다. 제가 다니던 클라크 케미컬도 가깝고 용병협회나 종합정부청사와도 가깝습니다."
검은 머리에 안경을 쓴 정장차림의 남자가 이 빌딩의 입지에 대해 장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클라크 케미컬에서 나와 내 밑에서 본격적으로 물자 매입을 하기로 했던 호너 데이비슨이었다.
"좀 작은 건물을 사거나 임대를 해도 되잖아?"
"보통 500인 수준으로 꾸려지는 정규편제 용병단이면 단장님 말씀대로 임대해도 상관없습니다."
따로 회사를 차리려다 아서용병단이 몸집을 불린 김에 자재매입부를 맡기로 한 호너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우린 8천 명이니까 곤란하다?"
"20명이 에어로트럭 한 대씩만 운용해도 400대가 넘는 차량이 주차할 공간이 필요하잖습니까?"
"그건 생각 못했군."
"차량뿐만이 아닙니다. 용병들이 쉬고 훈련하고 다음 임무를 준비할 공간도 필요합니다. 거기다 자재매입이나 의뢰수주까지 고려한다면 건물을 사시는 게 거래처에 신뢰를 줄 겁니다."
난 호너의 말을 듣고 따라온 휴고와 세사르를 돌아봤다.
"우리가 신생용병단이니 의뢰주나 거래처에서 신뢰하게하려면 건물을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호너 씨, 여긴 얼마라고 하셨었죠?"
세사르가 호너에게 물었다.
"2천억 크레딧입니다. 임대한다면 한달에 8억 크레딧 이상 줘야할 겁니다."
최상층인 145층 유리창 너머로 건너편 건물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이 빌딩보다 높은 건물들 뿐이었다.
팔미라 시는 장벽 안에 건물을 올리기 때문에 D 구역의 빌딩이라도 200층이 넘지 않는 곳이 드물었다.
'D 구역이긴해도 도심이라 그런지 시티뷰는 괜찮군.'
작긴해도 내 빌딩을 갖는다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한국에서 이 정도 건물을 가졌으면 대기업 오너 부럽지 않았을텐데...'
난 새삼 이 세상과 내가 떠나온 세상의 괴리를 느꼈다.
그때 엘리베이터 소리가 들리더니, 반백의 용병이 내렸다.
밀러쉴더스에서 사냥 4팀장으로 활동했던 틸로 훔멜스였다.
"단장님. 중상자 206명, 샤를 연구소에 직접 인도하고 오는 길입니다."
"수고했습니다."
난 간단히 대답했다.
하지만 곱슬머리에 얼굴 반이 회색수염으로 뒤덮인 틸로 훔멜스 팀장은 내게 할 말이 있는 표정이었다.
그는 휴고와 세사르가 실력과 신뢰도 그리고 다른 팀장들을 아우를 수 있는 리더십을 갖춘 인물이라고 평가해서 내 용병단에선 3팀장 자리를 맡긴 인물이었다.
"특이사항이라도 발생했습니까?"
"그게 아니라..."
틸로 훔멜스는 휴고 가르시아와 세사르의 눈치가 보이는지 입을 떼지 못했다.
"단장님께서 물으시는데 왜 우리 눈치를 봐?"
세사르가 톡 쏘듯 말하며 틸로 훔멜스의 팔뚝을 때렸다.
"샤를 연구소란 업체는 처음 듣는데, 무척 친절하더군요."
세사르에게 한 대 얻어맞은 틸로 훔멜스 3팀장은 엄살을 부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 표정만봐도 그가 뭘 걱정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신생업체라 믿기 어렵죠?"
"아무래도 블랙마켓에서 신체복원 서비스를 사용해본 적은 없어서... 조금 걱정됩니다."
3팀장은 내가 밑밥을 깔아주자 그제야 속마음을 내놓았다.
"그리고 얀은 오른쪽 어깨까지 날아가버렸는데 겨우 20일이면 오른팔을 복구할 수 있다고해서... 볼드윈 메딕스도 그 정도 시간 안엔 복원할 수 없을테니까요."
"한번만 절 믿어보세요. 아마 20일 후엔 깜짝 놀랄겁니다."
난 불안해하는 틸로 훔멜스 3팀장을 다독이며 생각했다.
'206명이면 새로운 좀비인자를 상당수준 얻을 수 있겠군.'
난 중상자들의 DNA보다 그들이 강화시술과정에서 획득한 좀비인자와 그 좀비인자가 보유한 특이능력에 더 관심이 갔다.
- 단장님.
그때, 차에서 기다리던 테리가 통신을 보내왔다.
"무슨 일이지?"
- 용병협회에서 협조공문을 보내왔어요.
"협조공문?"
그 순간 시스템이 내 시야에 테리에게서 넘겨받은 공문을 띄워줬다.
- 발신 : 용병협회
- 수신 : 아서 용병단
- 제목 : 긴급 협조요청...
***
30분 후, D-2 구역의 용병협회 빌딩.
전에 방문했을 땐, 아이언스톰들이 협회건물을 지키며 삼엄하게 경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이언스톰은 한 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정문 앞에 에어로트럭을 세우자, 검은색 바탕에 붉은색으로 장식한 배틀슈트 두 기가 다가왔다.
"처음뵙겠습니다. 아서 단장님."
두 사람은 조수석 앞에 서자마자 헬멧을 해제하고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빈슨용병단 부단장 오렐 그로처입니다."
그 순간 내 아공간 메카닉 네크로맨서의 무덤에서 피를 흡수하던 제니퍼의 정신파가 들려왔다.
- 초토기사의 심복입니다.
'초토기사?'
- 용병협회장이 바로 초토기사입니다. 팔미라 시에 4명뿐인 5단계 강화시술자죠.
난 제니퍼의 대답을 들으며 차에서 내렸다.
내 뒤로 휴고와 세사르가 따라내리는데, 그로처 부단장이 두 사람에게 가볍게 목례하며 말했다.
"협회장님께서 아서 단장님과 단둘이 말씀을 나누고 싶어하십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보니 휴고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단장님과 독대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아서 단장님께서 원하신다면요."
그로처 부단장은 그렇게 대답하곤 입을 다물었다.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 초토기사 라이언 빈슨은 귀족들의 암살시도에 여러차례 시달려서 심복이 아니고는 누구와도 단 둘이 만나는 일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 사람도 참... 피곤하게 사는군.'
단지 3대 가문의 눈밖에 난 것만으로도 5단계 강화시술자라는 강자가 행동 하나 하나에도 몸을 사려야한다는 소리였다.
"급한 일이라고 하셨으니까 일단 올라가봅시다."
내 대답을 들은 그로처 부단장이 날 용병협회 정문으로 이끌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착한 곳은 뜻밖에 지하 11층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날 반긴 건 금속으로 뒤덮힌 인테리어였다.
'응?'
신기하게도 지하 11층을 뒤덮은 금속에선 마그니움 향기가 진하게 풍겼다.
나도 모르게 엘리베이터 버튼 옆의 합금벽을 만진 순간이었다.
< 마그니움 함유율 17% 수준입니다. >
'마그니움을 내벽재로 바르다니... 사치스럽군.'
난 2조 크레딧이 넘는 마그니움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돈이 많아도 남에게 과시하기위해 벽에 마그니움을 쳐바르는 짓은 하지않을 것 같았다.
그로처 부단장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나를 안내했다.
그가 검은 문 앞에 서자, 두께만 30센치미터가 넘는 마그니움 합금문이 양옆으로 열렸다.
'문만 떼어서 가져가도 보급형 배틀슈트 10기는 만들겠군.'
난 속으로 혀를 차면서 그로처 부단장을 따라 들어갔다.
그곳엔 백발의 거인이 왕좌에 앉아 날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왕좌에 앉아있는데도 나와 눈높이가 비슷한 걸 보면 2미터는 훌쩍 넘을 것 같았다.
머리는 짧은 백발이지만, 몸만큼은 증식장갑을 입은 워리어들에 비할 수 있을만큼 우람한 근육을 자랑하고 있었다.
< 순수 마그니움으로 만든 의자를 발견했습니다. >
< 바닥과 일체형입니다. >
< 사용자님께서 지금 딛고 계신 바닥은 마그니움 함유량 73%입니다. >
내가 시스템 메세지를 읽고 황당함을 느낀 순간이었다.
백발의 거인이 왕좌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그의 발밑에서 끼기기기긱! 하고 마그니움 합금이 짓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라이언 빈슨이다."
2.3미터는 족히 될 듯한 용병협회장이 거대한 손을 내밀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서용병단의 단장 아서입니다."
내가 손을 내밀자, 라이언 빈슨은 천천히 내 손을 잡았다.
그건 마치 금이 간 계란이 깨질까봐 조심하는듯한 모습이었다.
그 순간 으득! 하고 순수 마그니움으로 만든 내 배틀슈트와 손이 우그러들어버렸다.
"이, 이런...! 미안하게 됐네."
라이언 빈슨은 내 손이 우그러드는 소리를 듣곤 자신의 이마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정말 미안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배틀슈트와 의체까지 우그러든 모습을 보니, 화가 치밀었다.
그때 그로처 부단장이 다가와 말했다.
"아서 단장님. 이건... 협회장님께서 단장님께 힘을 과시하려고 장난치신 게 아닙니다."
"그럼 초면에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일단 자리에 앉으시죠. 천천히 설명드리겠습니다."
그로처 부단장이 말했을 때, 그의 수행원이 거대한 문을 닫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로처 부단장은 마치 80대 노인을 부축하듯 협회장의 손과 팔꿈치를 잡고 검은 왕좌에 앉는 걸 도왔다.
신기한 건 초토기사라고 불리는 라이언 빈슨이 자리에 앉는 순간, 쿵! 끼기긱! 하는 쇳소리가 들렸다는 점이었다.
< 의자와 바닥의 소재를 토대로 계산한 결과, [초토기사]의 몸무게가 최소 800톤 이상이란 사실을 파악했습니다. >
'800톤?'
내가 믿을 수 없는 숫자를 보고 놀라 시스템에게 물은 순간이었다.
"자네도 이제 알겠지만... 난 내 무게를 주체할 수가 없네."
라이언 빈슨 용병협회장은 부끄럽다는듯이 말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신 겁니까?"
"5단계 강화시술을 받은 후부터 몸무게가 늘기 시작했으니까...35년쯤 됐겠군."
"설마... 이 마그니움 의자와 내장재도 다 협회장님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서 제작하신 겁니까?"
"돈 지랄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이 정도 합금이 아니라면 내 몸무게를 감당하지 못해서 말이야."
난 용병협회장 라이언 빈슨의 말을 듣고나서야 그가 왜 300층이 넘는 초고층빌딩의 꼭대기가 아니라 지하 13층에 자리잡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엘리베이터가 추락하고, 계단을 오르면 건물이 무너져내릴지도 모를 무게겠군.'
< 통합 데이터베이스 검색결과, [초토기사]는 엄청난 폭발능력을 지녔다고 알려져있습니다. >
< 그 폭발능력이 800톤에 달하는 [초토기사]의 몸무게와 관련된 특이능력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
그 순간 용병협회장을 지키겠다고 협회건물 주변을 순찰하던 아이언스톰들의 모습이 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저번에 아이언스톰들이 경호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정말 그들 말대로 귀족들의 암살을 걱정하시는 겁니까?"
"내 몸무게와 실력을 숨기기위함이지. 놈들은 타이탄급 골렘을 만들고 마법을 연구하는 귀족이야. 내 능력과 그 한계를 파악하면 얼마 안 가서 날 죽일 방법도 찾아내겠지."
암살시도 자체가 아니라 그 암살시도들로 자신에 대한 정보가 귀족들에게 넘어가는 것 자체를 경계한다는 뜻이었다.
"그런 사정이라면, 저도 납득했습니다."
"아무튼 협조요청에 응해줘서 고맙네. 일단 앉지."
난 오해가 풀린 후에야 그로처 부단장이 권한 자리에 앉았다.
"자네도 알다시피 동부사막에서 국지전과 사막정화 작전이 연이어 펼쳐지면서 팔미라 시의 용병계가 큰 타격을 입었네."
용병협회장이 말한 순간 회의실 테이블 위에 홀로그램창이 띄워졌다.
- 총 사망자 17만 명 이상.
- 팔미라 시 용병협회에 등록된 용병 중 31.5%에 해당하는 인원.
그 모습을 본 라이언 빈슨 협회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런 사고가 없었으면 관급의뢰가 무응찰되는 경우도 없었을 거네."
그 순간 홀로그램창에 새로운 지도가 펼쳐졌다.
그건 팔미라 시 서남부의 지도였다.
거대한 호수와 붙어있는 회색 영역에는 몇 줄의 설명문이 쓰여있었다.
- 크라노야 전선
- 현재 관측된 소드테일의 수 : 8천만 마리 이상.
그때 그로처 부단장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아서 단장님께선 혹시 소드테일에 관해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