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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패왕-7화 (7/243)

7화 달이 차면 기운다.

* * *

삼 일 후 호뢰관 성루.

진양의가 뜨거워진 눈시울로 소리쳤다.

“철수했어. 드디어 철수했어!”

하지만 진천산의 안색은 밝지 못했다.

“그런데 우리도 사흘 동안 만 명이나 죽었네.”

막상 예측한 대로 상황이 흐르자 마음이 무거워진 것이다.

총 십만 명의 군사가 있었는데 만 명이나 죽었다. 군의 사기에 좋지 못한 영향으로 작용하리라.

게다가 적군은 대부분의 병력이 국경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적이 일단 물러갔지만 대국적 견지에서 누가 불리하고 누가 유리한지는 명확한 것이 아닐까?

고진이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

“군사들이 동요할까 봐 걱정하십니까?”

진양의가 걱정스런 얼굴로 반문했다.

“당연히 그렇지 않겠소?”

“뭐, 그렇겠지요.”

“예?”

진양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군사의 동요를 짐작하면서도 저리 태평천하라니.

그런데 고진이 말했다.

“고선무는 심리전을 의부님께 배웠습니다. 고선무가 아는 것을 의부님이 모를 리 있겠습니까? 다 나한테 맡기시고 기다리십시오. 일만 병력의 희생은 두려움보다 적의 흉악함에 대한 저항을 불러일으킬 겁니다. 그럼 죽음도 불사하고 맹렬히 맞서 싸우겠지요.”

진양의와 진천산은 놀란 눈으로 서로 마주 보았다.

* * *

고선무는 검은 말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만 명의 부상병을 데리고 가까운 성으로 가는 길이다.

그는 호뢰관을 점령하지 못했음에도 만족스러웠다.

이미 호뢰관에 남은 진군에 두려움의 씨앗을 심어 놓은 것이다.

호뢰관에 갇힌 진군 만 명의 죽음이 적의 호전성을 자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무슨 문제일까?

내일 팔십만 군사가 성 아래에 이르면 마음 깊은 곳의 두려움이 다시 튀어나올 텐데.

그 두려움이 저들의 호전성을 순식간에 무너뜨릴 것이다.

눈앞에 큰 성이 보였다.

팔십만 군대의 거점이자 옛 진국 도성을 제외하고는 가장 큰 성이다.

‘상성’이라는 곳인데, 육 국의 대부호(大富豪)들이 일어선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손안에 있었다.

멀리서 장수 하나가 달려와 맞이했다.

“대원수, 돌아오셨습니까!”

“상성 안에서 장사꾼의 이상한 행동이 있었나?”

고선무가 묻자, 맨 앞에 있는 젊은 장수가 대답했다.

“없습니다, 대원수. 안심하십시오. 상성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 철저히 감시하고 있습니다.”

“그래?”

고선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행렬은 성 중심에 있는 드넓은 연병장으로 향했다.

출정하는 병마 외에 최소 삼십만 대군이 그곳에 주둔하고 있다.

연병장으로 향하던 고선무는 갑자기 눈살을 찌푸렸다.

멀리 있는 연병장에서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탁탁!

요란한 폭죽 소리가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고선무가 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게 된 거냐?”

젊은 장수가 웃으면서 말했다.

“송국 도성의 상인들이 우리 장졸을 위로하러 왔습니다.”

돌연, 고선무의 안색이 급변했다.

“상인이라고?”

순간 육 개국 최고의 부자 고해가 떠올랐다.

생각과 행동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고선무는 채찍으로 타고 있던 흑마의 볼기를 때렸다.

“이랴!”

검은 말은 화살같이 앞으로 질주해 나갔다.

고선무는 곧바로 연병장으로 달려갔다.

그와 시간 연병장 한쪽.

한 무리의 비단옷 입은 사람들이 중년 남자에게 공손히 절하고 있었다.

선두의 통통한 사람이 공손하게 말했다.

“태자의 칭찬이 너무 과하십니다. 저희 상인들은 단지 이것으로 성의 표시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 송국이 갈수록 융성하는 것을 보니 실로 기쁜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국의 고해가 틈을 파고들지 못하게 물품을 드리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앞에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있었다.

그가 바로 송국의 태자였다.

태자는 상인들을 보며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때, 한 병사가 달려와 보고했다.

“대원수가 돌아왔습니다.”

고선무가 큰 흑마를 타고 가까이 다가왔다.

멀지 않은 곳에서는 폭죽 터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고선무는 냉랭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송태자가 웃으며 말했다.

“대원수를 뵈오.”

상인들이 절했다.

“대원수를 뵙습니다!”

고선무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송태자가 웃으며 말했다.

“송국 팽성의 상인들이오. 대원수가 천하의 곡창과 약재 창고를 관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하더구려. 고해가 장난질 쳐서 송국의 보급을 차단할까 봐 그랬다고 들었소. 그래서 팽성 상인들은 자발적으로 보급품을 실어와 나라를 도우려고 하는 거요.”

고선무는 의외라고 생각하며 잠시 침묵했다.

고해가 진국 군대를 지휘한다는 소식에 고선무가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고해가 전장으로 가는 보급을 모두 차단시킬 수 있다는 우려였다.

또한 그것이 미리 선수를 쳐 대비를 한 이유였다.

그런데, 팽성 상인들이 이렇게 나올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통통한 상인이 미소하며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대원수께서 진왕이 세상을 하직하도록 만드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훌륭하십니다. 자, 여기 필요한 모든 보급품을 가지고 왔으니, 부디 대원수께서 우리 마음을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고선무는 한동안 상인들을 살펴보았다. 그들이 고해가 보낸 첩자가 아닌지 의심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 산더미로 쌓여 있는 식량이며 약재.

그것을 보니 첩자는 아닌 듯했다.

진심으로 온 사람들이라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

고선무는 안색을 풀며 부드럽게 말했다.

“부하를 대신해서 감사하게 생각하겠소. 내가 먼 길을 오느라 좀 피곤하구려. 여러분을 초대하지 못하는 점 부디 이해하시오.”

상인들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태자도 웃으면서 말했다.

“대원수는 가서 쉬시오. 여긴 내가 맡겠소.”

예를 표한 고선무는 말머리를 돌렸다.

그날 저녁, 임충이 고선무의 장막으로 들어왔다.

“전부 조사해 보았습니다. 식량과 약재는 이상 없습니다. 모두 최고급품입니다. 팽성 상인들은 고해와 관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임충의 보고에 고선무는 눈살을 찌푸렸다.

“모두 최고급이라고?”

임충이 웃으며 말했다.

“예. 상인들이 너무 친절합니다. 이따 불꽃놀이 대회도 있을 거라 합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고선무는 마음이 찜찜했다.

“사람을 보내서 상인들을 감시해라.”

“그 사람들은 내일 아침이면 떠날 겁니다. 어찌…….”

고선무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썩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 혹시 모르니까 잘 감시해라.”

임충은 의아했지만, 고선무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다음 날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난 고선무는 세수를 끝냈다.

그런데, 밖에서 폭죽 터지는 소리가 또 들리는 게 아닌가?

고선무가 차갑게 소리쳤다.

“임충!”

대답은 즉각적으로 들려왔다.

“예, 대원수!”

임충이 나는 듯 장막 안으로 들어왔다.

“팽성 상인들을 감시하라고 했는데 지금 이게 무슨 소란이냐?”

“그들은 아침 일찍 떠났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운성의 상인들이 왔습니다. 그들도 대량의 약재와 곡식을 가지고 왔다 합니다. 팽성 상인들과 마찬가지로 가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운성의 상인들?”

고선무는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임충이 웃으며 말했다.

“예, 곡식과 약재 모두 최고급입니다. 제가 이미 다 조사해 보았습니다. 하하. 이제 고해의 수작 따위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고선무는 여전히 의혹에 찬 눈빛이었다.

* * *

송국의 도성인 송성 안에 전부(田府)라는 곳이 있다.

지금 고해는 전부에 머물고 있는 중이다.

그의 앞에 바둑판이 보였다. 고해 혼자 대국을 하고, 옆에는 고한이 서 있었다.

고한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팽성, 운성, 혜성의 상인들이 연이어 상성으로 가서 의부님 명대로 대량의 식량과 약재를 내놓고 있습니다. 의부님, 몹시도 궁금합니다. 이렇게 많은 식량과 약재를 적에게 보내는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입니까?”

고해는 바둑판에 흰색 바둑알을 놓고 미소하며 말했다.

“내가 무슨 이유로 그랬을까? 고한아, 네 생각을 말해봐라.”

고한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더니 홀연 고한의 안색이 변했다.

“아! 이제 알았습니다. 고선무는 우리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충분한 곡식과 약재를 준비했지요. 그래서 우리가 보내는 보급품은 쓸모가 없습니다. 보급품이란 부족할 때엔 아주 귀하게 여기지만, 너무 많으면 쓸데가 없습니다. 관리하고, 지키고, 운반까지 해야 하지요.”

고한은 빙그레 미소하며 말을 이어갔다.

“금전(金錢)은 상으로 줄 수 있지만, 식량이란 놈은 상으로 주기도 어렵습니다. 설령 상으로 내린다 한들 위험한 전장에서 이를 가져갈 수도, 보관할 수도 없지요. 전장에서 과도하게 넘치는 식량과 약재란 폐물이나 다름없지만, 사람을 기만하기에는 최고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달이 차면 기운다(月滿則亏)는 것이지. 너무 많으면 쓸데가 없을뿐더러 오히려 해로울 수도 있는 법.”

“예. 병사들은 그 많은 보급품이 병영에 도착했는데도 자기들에게 전혀 이익이 없으면 불만이 팽배할 겁니다.”

고한이 말하고는 웃었다.

고해가 딱! 소리와 함께 흑돌을 바둑판 위에 놓으며 물었다.

“그리고?”

고한은 고해가 가르침을 내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열심히 분석하던 고한의 눈이 갑자기 번쩍거렸다.

“불꽃놀이?”

고해가 살짝 웃으며 또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상성엔 삼십만 병력이 주둔하고 있고, 나머지 오십만 병력은 여러 성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상성은 본진이라 부상병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합니다. 정병은 출전시키고 부상병은 돌아오지요. 부상병은 팔이나 다리가 끊어지고 몸이 상처투성이며 마음도 괴롭습니다.”

고한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차며 말을 이어갔다.

“부상병들은 앞날에 대한 절망을 느낄 수도 있지요. 그런 마당에 사지육신 멀쩡한 자들이 밖에서 춤추고 폭죽을 쏘아대면 부상병은 더 괴로울 겁니다. 이건 상처 위에 소금을 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지요.”

고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계속해.”

“밤에 보는 불꽃은 현란합니다. 마치 부상병들에 대한 풍자라고나 할까요? 그래요, 불구자들의 미래에 대한 풍자입니다! 대량의 식량과 약재가 계속 들어오는데 모두에게 분배되지도 않습니다. 부상병들은 더 비관할 겁니다. 왜 누구는 부귀영화를 즐기고, 왜 누구는 좌절해야만 할까…….”

고해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재촉했다.

“또 있느냐?”

고한은 한참 심사숙고한 후에야 말했다.

“의부님은 혹시 상성 백성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고해는 바둑돌을 내려놓고 고개를 다시 끄덕였다.

“그래. 고선무는 육십만에 달하는 진군을 죽였다. 이 육십만 명은 모두 백성들이 사는 집의 기둥이지. 그들은 누군가의 아들, 남편, 아버지야. 한데, 그토록 귀한 자들이 전쟁으로 죽었어.”

“아!”

“백성의 고통과 슬픔이 어떠할까? 앞날이 없는 절망을 안은 채 살고 있을 뿐이지. 침략자에게 저항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해. 그런데, 지금 이 침략자들은 승리에 도취되어 자신들의 행복만 생각하고 있어. 아마 그곳 백성들은 원한은 하늘에 사무칠 것이다.”

고한이 깊은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원한이 폭발하면 아주 무서울 겁니다.”

그런 고한을 보며 고해는 말을 마쳤다.

“기억해 둬라. 그 누구도 폭발하는 백성의 울분을 감당할 수 없다. 분노의 파도가 휩쓸어 오면, 바로 그때야말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지. 그 누구도 막아내지 못할 것이야.”

고한은 가슴속에서 냉기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새삼 고해를 향한 경외심을 느꼈다.

고한은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부님, 저는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폭죽과 불꽃놀이 따위의 사소한 것들이 그리도 무서운 용도로 사용되어 사람의 마음을 흔들 수 있을 줄이야…….”

고해는 심유한 눈으로 바둑판을 보며 말했다.

“사람의 마음은 무엇보다 강하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은 가장 약하기도 하지. 사람 마음을 죽이는 게 전쟁의 시작이니라.”

고해는 다시 딱! 소리를 내며 바둑돌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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