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백성의 한이 쌓이니
* * *
팔십만 송군.
이제 그들은 의지할 곳 없이 쫓기는 처지가 되었다.
오만 진군은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백인당적(百人當敵)의 무용으로 공격하는 곳마다 적을 쓰러뜨렸다.
한쪽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다른 한쪽은 전의가 없었다.
이 마음가짐에서부터 이미 승패는 판가름 난 것이다.
고선무와 태자는 일부 호위병의 보호를 받으며 급히 전장을 벗어났다.
고선무는 임충의 칼에 팔을 찔려 피가 흘렀다.
하지만 자신의 팔에서 흐르는 피는 중요하지 않았다.
고선무는 사방으로 패주하는 송군을 보면서 마음속 고통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하하! 고해! 하하하하! 고해!!!”
나오는 것은 그저 허탈하고 처절한 웃음뿐.
모든 면에서 최선을 다했건만 어찌 고해를 따라잡을 수 없는가?
놈의 계책이 이리도 무섭게 목을 조여 올 줄이야!
태자는 절망한 나머지 탄식했다.
“끝났소! 이제 어떡해야 하오?”
고선무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언젠가는 진상이 밝혀질 겁니다. 그나마 지난 여러 차례 전투에서 육십만 진군을 죽였으니 다행입니다. 적은 병력이 적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우리 송국이 비록 군심을 잃어 오늘 싸움에 졌지만, 이 고선무는 다시 군병을 일으킬 겁니다. 다만…….”
태자가 힐끗 고선무를 쳐다보았다.
고선무는 쓰게 웃으면서 말했다.
“고해가 저보다 더 빨리 움직일까 걱정입니다.”
* * *
며칠 후, 상성.
어느 점포에 소식 한 통이 전해졌다.
고선무가 싸움에 지고 팔십만 송군이 도망쳤다!
고선무의 생사조차 알 수 없다!
송국은 패전했다!
소식을 접한 백성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전해진 소식 중에는 송국 패잔병을 죽여서 성지를 되찾으라는 격문도 있었다.
성지의 빈부귀천, 즉 가난한 자와 부자, 귀한 자와 천한 자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격동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초상 난 집에서 폭죽을 터뜨리고 춤을 추던 송군들이었다.
사람을 가리지 않고 학살하며 보이는 전부를 빼앗으면서 춤추고 폭죽을 터뜨렸던 놈들이었다.
놈들의 살가죽을 벗겨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백성들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가족들의 죽음을 보면서도 할 수 있는 건 눈물을 흘리는 게 전부였다.
그러던 차에 유성처럼 날아든 이 기막힌 소식!
이제 백성들은 지금껏 쌓인 원한을 풀고자 했다.
송군은 백성의 눈빛이 달라진 걸 깨달았다.
얼마 전까지 두려워하던 그들이 살기 띤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전장으로부터 확실한 소식이 후발로 전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백성들은 증오에 찬 눈빛만 보일 뿐 막상 나서서 복수를 실천해 옮기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돌아온 탈주병 하나가 떠들고 다녔다.
“졌어! 다 졌다고! 팔십만 송군이 대패하고 말았어!”
소문은 빠르게 퍼졌고 백성들은 자신감을 얻었다.
송국이 대패했으니 이제 진국도 다시 회복할 수 있으리라.
고선무도 막지 못한 고해를 누가 감히 막을 수 있을까!
그날 어둠은 적막 속에서 흘러갔다.
하지만 날이 밝자마자 송군을 죽이자는 외침이 상성을 가득 메웠다.
“죽이자!”
“복수해야지!”
“당한 걸 갚아야 해!”
집집마다 거리마다 살기가 넘쳐흘렀다.
마침 상성에 남은 송군 숫자도 그리 많지 않았다. 더 이상 눈치를 살필 필요도 없었다.
이제야말로 쌓이고 맺혔던 원한을 실컷 해소할 시간이었다.
전부 죽이자!
천하 방방곡곡에서 복수의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 * *
며칠 후, 청하종의 대전 안.
청하종주와 송갑종주는 그들의 동생을 데리고 대전 양쪽에 서 있었다.
아름다운 흑의 여인과 유년대사 또한 수하 세 명과 함께 북쪽 방향에 서 있었다.
진천산은 송갑종주의 동생과 나란히 섰다. 막 여인에게 보고를 올리던 참이었다.
유년대사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석 달도 안 지났는데 팔십만 송군이 참패할 줄이야. 게다가 군신 고선무는 허겁지겁 도망을 쳤다니. 또 진국은 잃었던 절반의 강토를 다시 되찾았군. 삼 개월도 안 되는 시간에 말이야.”
진천산은 의기양양하게 응수했다.
“바로 그렇습니다.”
옆에 있는 송갑종주의 동생은 꿀 먹은 벙어리였다.
송갑종주가 노한 기색을 띠고 말했다.
“도대체 고해는 어떤 전략을 세워서 싸운 거지?”
반면 청하종주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송갑종주 좀 참으시오. 끝까지 들어봅시다.”
여인은 몹시 호기심을 느끼는 표정이었다.
고선무의 출중함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선무가 나름 여러 가지 수를 두며 대응했음에도 불구하고 고해가 단기간에 송군을 무찌르며, 빼앗겼던 진국의 땅 절반을 다시 수복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전혀 뜻밖이야. 고해는 대체 어떤 수단을 쓴 거지?’
여인은 어떤 불가해(不可解)함을 느끼고 있었다.
* * *
송성.
고해는 여전히 바둑판 앞에 앉은 모습이었다.
평소 습관대로 그는 바둑알을 만지작거렸다.
보통의 바둑판은 가로세로 열아홉 개의 선이 있었으나, 고해 앞에 놓인 바둑판의 선은 삼십 개나 되었다.
바둑판의 선이란 하나가 늘어날 때마다 변수도 늘어나는 법인데, 고해의 바둑판에는 선이 자그마치 스물두 개나 더 많은 것이다.
고해는 언제나 혼자 바둑을 두었다.
여태까지 그는 단 한 번도 다른 이와 바둑을 둔 적이 없었다.
곁에 선 고한은 무척이나 고무된 기분이었다.
“의부, 성공했습니다! 팔십만 송군은 일패도지(一敗塗地)하고, 패장 고선무는 도망쳤습니다. 고선무가 심기일전의 각오로 다시 병력을 모으고 있습니다만,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고해가 백돌은 내리며 말했다.
“송국 멸망 계획의 일단계가 끝났군.”
“그렇습니다. 다음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고해가 웃으면서 흑돌을 내려놓았다.
“이단계는 ‘민심 흔들기’다.”
“그러합니까? 하지만 민심 흔들기는 예삿일이 아닐 겁니다.”
고한의 말에 고해는 입술을 비틀었다.
“고선무, 송태자, 송황제…… 그 세 명은 나를 저주하고 있을 거야. 그것도 엄청나게 말이지. 그 증오는 바로 민심을 잃은 데에서 오는 것이다. 백성이란 곧 나라의 근본. 근본이 흔들리면 나라도 흔들리는 법이 아니겠느냐?”
* * *
고선무와 황태자는 으슥한 골짜기에 천막을 쳤다.
몇 안 남은 호위병들이 천막 밖에서 경계를 서고 있었다.
고선무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하긴, 패전지장(敗戰之將)의 얼굴이 밝다면 그게 이상한 노릇이리라.
태자는 지난 며칠 사이 병이라도 든 듯 초췌해 보였다.
한 호위병이 천막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보고드립니다!”
태자가 다급히 물었다.
“찾았나?”
“……태자 전하, 보시고 노여워 마십시오.”
죄스러운 표정으로 말한 호위병이 옆으로 비켜섰다.
다른 호위병들이 들것과 함께 천막으로 들어왔다.
들것에는 시신 한 구가 있었는데, 그 정체는 다름 아닌 황태손 송정서였다.
시신의 상태는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얼마나 난자당했는지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아마 옷이 똑같지 않았다면 알아보는 것조차 힘들었을 것이다.
급히 다가간 태자는 오열을 금치 못했다.
“으흑! 내 아들이……!”
고선무는 들고 있던 서찰을 내려놓고 물었다.
“어디서 찾았느냐?”
호위병이 송구함을 감추지 못하며 대답했다.
“쓰러진 임충 옆에서 찾았습니다. 황태손을 호위하던 병사들도 전부 죽었습니다. 병기와 상처를 대조해 보니 황태손을 해친 자는 임충으로 판단되었습니다.”
태자는 가슴을 내리치며 소리 질렀다.
“임충!”
고선무는 무거운 탄식을 뿜어냈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게 지금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래도 이 상황에 침묵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태자 전하. 저도 나름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럼에도 고해가 펼친 계략에는 따라잡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아, 고해……. 제가 너무 오만했습니다.”
태자는 하늘을 우러러 저주를 토해냈다.
“고해를 찢어 죽이지 못하면 나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순간, 고선무의 표정이 변했다.
“아뿔싸!”
천막 안팎의 모든 시선이 고선무를 향했다.
고선무는 음침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호뢰관에 있던 자는 진짜 고해가 아니었어.”
뜻밖의 말에 사람들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고선무는 두 주먹으로 탁자를 치며 이를 갈았다.
“진즉 간파했어야 했는데……. 애당초 호뢰관을 칠 때 전력을 다했어야 했다. 아!”
후회막급하기 이를 데 없었다.
호위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원수의 그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고선무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고해는 송성에 있을 것이다. 그가 송성에 있어야만 이런 음모들을 만들어 낼 수 있어. 호뢰관에 있던 사람은 고해로 위장한 자였을 것이야, 암!”
그렇다.
만약 고해가 송성에 없었다면 어찌 임충의 일을 꾸밀 것이며, 또 어떻게 황태손까지 구할 수 있었겠는가?
“고해는 송국 수도, 송성에 있는 게 분명해!”
태자가 다그치듯 물어왔다.
“대원수는 지금 그 말을 장담할 수 있소?”
고선무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고해는 분명히 송성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고해라면 이 정도로 끝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건 단지 시작에 불과합니다.”
태자의 얼굴이 핼쑥하게 질려버렸다.
“이제 시작이라고?”
“고해의 목표는 겨우 팔십만 송군 정도로 끝나지 않습니다. 최종적으로 송국을 멸망시키려는 심산이 틀림없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고해는 분명 또 다른 음모를 꾸밀 겁니다.”
천막 안에는 한숨 소리만 흘렀다.
지금까지 고해는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부터 그가 본격적으로 나설 것이라고 한다.
저마다 몸서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누군가가 다급히 물어왔다.
고선무의 눈빛이 차갑게 번들거렸다.
“아직은 괜찮다. 우리뿐만 아니라 진군 또한 많이 죽고 상했으니까. 송군 중에서 도망친 병력만 삼십만 명…… 그들만이라도 어떻게 재집결시킬 수 있다면 아직 희망이 있는 것이지.”
태자는 겨우 정신을 차리면서 결연하게 말했다.
“옳소! 진군도 잔존 병력은 얼마 되지 않지. 대원수, 변강 지역에서 다시 군사들을 모아보시오. 나는 직접 부황을 만나 뵙고 흩어진 병력을 다시 모을 수 있도록 부탁드려 보겠소.”
고선무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은 밝지 못했다.
“훌륭한 생각이십니다. 그런데, 시간이 촉박하군요.”
태자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시간이 촉박한 건 고해도 마찬가지 아니겠소?”
고선무는 고개 저었다.
“다른 자였다면 그렇겠지요. 하지만 우리 상대는 고해입니다.”
“대원수, 설마 고해를 무서워하는 건가?”
“생각해 보십시오. 군병의 신뢰를 잃은 처지에 대군을 다시 모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가 변심한 사람의 마음을 되돌리는 겁니다. 어쨌든, 저도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고선무가 그리 말하니 태자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고선무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저는 국경에서 병력을 모아야 하니 여기 있겠습니다. 전하는 폐하와 대소신료들에게 고해의 음모를 알리고 긴장을 늦추지 말라 전하십시오. 다시는 음모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나가려던 그가 잠깐 걸음을 멈추고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탈주병들의 죄는 사면해 주셔야 합니다.”
고선무가 신신당부했다.
태자가 이를 갈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나는 지금 바로 출발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