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고로마두(古老魔頭)
* * *
며칠 후, 송국 조당(朝堂).
송황제는 용좌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문무 대신들이 좌우 두 줄로 늘어섰다. 그들 가운데에는 태자도 함께 있었다.
황제와 문무 대신은 태자의 설명을 듣는 중이었다.
태자는 그동안의 모든 일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이윽고 설명이 끝나자 곳곳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왼쪽에 있던 늙은 대신 하나가 말했다.
“팔십만 대군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다니! 폐하! 무릇 패전의 책임은 장수에게 있는 것이옵니다. 우리 송국의 팔십만 강군을 일거에 망쳐버린 고선무에게 모든 책임을 물으소서!”
그는 금년 팔십이 세의 송황보다 더 늙어 보였다.
태자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방 태사. 고선무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다만, 고해의 음모가 실로 악독 교활하여 방비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방 태사는 못마땅한 얼굴로 응수했다.
“고선무는 대원수입니다. 전쟁의 공적과 책임이 모두 고선무에게 있는 것입니다. 고선무가 최선을 다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패전의 책임이 상쇄되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흰 눈썹을 꿈틀거리며 방 태사는 강조했다.
“황태손을 구하지만 않았어도 송국의 공든 탑은 결코 무너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송정서가 거론되자 태자의 마음은 쓰라렸다.
그래도 태자는 꾹 참고 말했다.
“돌아오기 전에 사람을 보내 판관을 잡아왔습니다. 그날 사건을 알아보니 판관은 벗어나기 힘든 함정에 빠져 어쩔 수 없이 황태손을 구출하는 일에 동참한 것입니다. 어쨌든 지금은 누구 책임인가를 따질 상황이 아닙니다.”
송황이 고개를 끄덕이고, 방 태사도 표정이 누그러졌다.
태자는 적극적으로 고선무를 비호했다.
“고선무는 현재 국경 지역에서 병력을 재정비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제가 돌아오게 된 것도 우리가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춰 고해에게 그 어떤 빈틈도 주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용상의 송황이 물었다.
“고선무는 뭐라고 하더냐?”
태자는 고개 숙이며 대답했다.
“탈주병들의 죄를 묻지 말고, 최대한 빨리 군사를 재정비해 달라고 했습니다.”
송황은 바로 승낙했다.
“음, 그리하라!”
태자는 한 가지를 더 요청했다.
“고해의 행방을 찾아내야 합니다. 놈이 붙잡아 간 백성도 찾아서 고해가 꾸민 모든 일을 설명하게 해서 떠난 군심을 다시 회복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온 나라가 또 음모에 속지 않게 방비해 주십시오.”
송황은 이 또한 승낙했다.
“그리하라!”
* * *
송성의 어느 주루(酒樓).
고해와 고한은 창가 쪽에 앉아서 술을 마셨다.
옆자리에서는 방문 한 장을 둘러싸고 손님들의 열띤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고해 영감이 팔십만 대군을 전멸시켰대!”
대략 이러한 분위기의 대화였다.
처음에는 걱정하고 분해하는 말들이 주류였다.
그러다 대화가 길어지니 차츰 다른 쪽으로 발전해 나갔다.
거기에는 온갖 과장과 허풍, 괴담이 첨가되었다.
경악은 경이로, 경이는 신비로, 신비는 신화로 탈바꿈되었다.
“그 고해는 삼두육비에 동두철액(銅頭鐵額)이래!”
동두철액이란 성질이 모질고 완강하여 거만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른다.
“심지어 천기를 마음대로 주무른다고 하던데?”
“주문을 외면 구름 속에서 천병(天兵)이 나타난다고!”
웬만한 연극보다 더 흥미진진했다.
사람들은 손발을 휘저으며 자기가 직접 본 듯 얘기했다.
이른바 풍문이요, 유언비어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러던 어느 순간.
“……고선무가 육십만 진군을 꾸준히 죽인 게 그나마 다행이야. 안 그랬으면 우리 진국의 팔십만 대군이 일패도지한 지금 당장 나라가 멸망할 위기에 이르지 않았겠는가? 그럼 우리는 망국의 노예가 되어버린다고.”
“조만간 고해가 대군을 이끌고 오면 큰일인데…….”
“죽일 놈의 고해! 그놈 때문에 내 조카를 잃었어!”
“내 아들도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모르고 있어!”
주객들은 아까와는 달리 고해를 증오하기 시작했다.
창가의 고해와 고한은 말없이 술만 마셨다.
문득, 고한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송국이 의부님을 매우 무서워하는 것 같습니다. 전쟁에서 있었던 세세한 사실들까지 백성에게 알려주고 있으니까요. 이를 달리 말한다면 백성에게 증오를 심어주려는 것이겠지요.”
그 말에 고해도 슬쩍 웃었다.
“저들이 증오하고 두려워할수록 송국은 더 빨리 망할 것이다.”
고해는 술을 마시면서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의부, 이제 시작하는 건가요?”
“아직은 아냐. 송국 사람들이 나를 더 증오해야 돼.”
“아직 부족합니까?”
“아직 너무 약해. 증오심을 더 키우면 좋을 텐데.”
고한은 고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고해가 술을 따르면서 말했다.
“가둬둔 자들을 풀어줘라. 그들 입을 통해서 내가 악인임을 알리게 해주라고. 그러면 내가 앉아서 꾸민 음모로 팔십만 대군을 참패시켰다는 걸 모두 알게 되겠지. 후후후! 나를 향한 증오와 두려움은 하늘을 찌르게 될 거야.”
고해는 말을 끝내며 하얀 웃음을 지었다.
* * *
청하종의 앞뜰.
당주라 불린 흑의 여인과 유년대사가 바둑을 두고, 청하종주, 송갑종주와 진천산 등도 함께 자리했다.
여인이 흑돌을 놓으며 말했다.
“고해가 자취를 감췄다던데?”
진천산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만에 하나 계획이 틀어질까 봐 조심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송국을 없앤다고 했으니 약속을 지킬 것입니다.”
옆에 있던 송갑종주가 실소했다.
“송국을 없애는 게 애들 장난인가? 비록 고해가 송의 군심을 흔들기는 했어도 송국에는 아직 수십만 병력이 있어. 반면 진국은 병력을 육십만이나 잃지 않았나? 고해의 장난질도 이제 끝이야.”
청하종주가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고해가 어떻게 할 것인지도 모르면서 벌써 이렇게 격앙되어 있으면 어떡하오?”
“어험!”
헛기침을 뱉은 송갑종주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럴수록 청하종주는 더 의기양양해졌다.
여인이 유년대사를 보면서 물었다.
“대사는 어떻게 생각해?”
유년대사는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고해가 기가 막힌 수를 두는군요. 여태 진행된 것만도 대단한데, 아직도 끝이 아니라고 하니……. 허허. 사람마다 바둑을 두는 방법이 다르다지만, 저는 아직도 고해의 수를 모르겠습니다.”
여인은 정말로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모르겠으면 이어서 봐야겠지. 이번 판에는 또 어떻게 놀라게 할까?”
* * *
송성.
흉흉한 민심에 불을 지르는 사건 하나가 발생했다. 고해에게 잡혀간 병사들의 식솔이 전부 풀려난 것이다.
안 그래도 최근 호뢰관에서 참패 등으로 시끄럽던 송성이었는데, 잡혀갔던 사람들이 풀려나 그동안의 사정을 설명해 주자 민심은 더욱 끓어올랐다.
고해! 이 모든 것의 원흉이 바로 고해 그놈이다!
진상을 알게 된 백성의 원한은 불길처럼 치솟았다.
태자는 전해진 소식을 듣고 탁자를 내리쳤다.
노화가 끓어올랐다.
“고해 그놈이 직접 사람들을 풀어줬다고? 쳐 죽일! 이제 아무도 네놈 수작에 속지 않는다! 두고 보자, 이놈!”
아들 송정서의 비참한 죽음은 아직도 믿을 수 없었다.
실로 원통하기 짝이 없어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이었다.
태자는 고해를 잡아서 찢어 죽이겠다고 스스로 맹세했다.
수하 한 명이 굽실거리며 말했다.
“전하! 고해의 만행을 알게 된 백성들이 놈의 껍질을 벗겨서 삶아 먹겠다고 합니다.”
태자는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놈을 씹어 먹고 싶은 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다. 그건 그렇고, 송성을 수색하는 일은 어떻게 되고 있지?”
태자의 물음에 수하가 대답했다.
“많은 곳을 수색했으나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인근 지역까지 낱낱이 훑어라! 내 고해 그놈을 직접 봐야겠다! 그리고 나라 안 방방곡곡에 고해의 악행을 알려라! 놈은 천하의 만고 악적으로 알려져야만 한다!”
수하가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전하. 이미 나라 전체가 분노에 떨고 있습니다. 그런데 민심을 더 자극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혹시, 고해가 또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기 때문입니까?”
태자는 차가운 눈길로 수하를 보며 말했다.
“만약의 경우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다. 이제부터 온 나라가 불철주야 경계를 유지해야만 한다. 그래야 고해가 다시 수작 부릴 때 문제 되는 것을 전부 놈에게 떠넘길 수 있지 않느냐? 명심해라. 모든 흉사의 근원은 고해 그놈이니라.”
“알겠습니다. 지금 가서 전하겠습니다.”
수하는 급히 밖으로 나갔다.
“이놈 고해…….”
태자는 허공을 응시하며 이를 갈았다.
* * *
송성의 어느 주루.
지금 주루 한쪽 방에는 술병이 널려 있었다.
고해와 고진은 창 너머 거리를 살폈다.
길목마다 군사들이 삼엄한 경비를 선 게 보였다.
그런데 고해의 모습이 제법 요상했다.
염색과 화장을 해서 마치 중년처럼 변장한 것이다.
길 건너편 은포(銀鋪)를 보던 고진이 웃으며 말했다.
“저곳이 송성에서 제일 큰 은포입니다.”
고해는 은포 입구에 걸린 간판을 살폈다.
고송은포(古松銀鋪).
간판에서 눈을 뗀 고해는 술잔을 들며 말했다.
“예전에 개업할 때 내가 직접 축하해 준 곳이지. 옛날 주인은 아마 몇 년 전에 죽었지?”
“예. 그는 삼 년 전에 죽었습니다. 지금은 아들이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지요. 그 사람한테 의부님 요구를 전했으니 그도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을 것입니다.”
고해는 머리를 끄덕이며 거리 전체를 둘러보았다.
고송은포는 유명하고 큰 상가였지만 백성들은 더 이상 그곳에 가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갈 때마다 욕을 퍼부었다.
“염병할! 고해라는 놈과 연결된 가게라고.”
“저긴 절대 가지 마! 빌어먹을 곳이야.”
“폐하가 왜 아직도 저곳을 가만 놔두는 거지?”
이러한 이유로 근래 고송은포는 매우 주목을 받고 있었다.
주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별로 유쾌하지는 않은 주목이었다.
고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중이떠중이 모두 욕을 하고 있군요.”
고해는 씁쓸히 웃었다.
“보아하니 다들 잔뜩 독이 올랐구나.”
“이제 송국에서의 우리 장사는 망한 것 같습니다. 비록 지금은 법 때문에 다들 욕만 하고 있지만, 조만간 누군가는 참지 못하고 은포를 날려버리려고 할 겁니다.”
고해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이름도 알렸고, 약도 올렸다. 송국이 움직이기 전에 선수를 쳐야겠지. 지금 바로 시작하자.”
“예!”
고한이 대답하고 머리를 숙인 순간.
휙! 소리와 함께 술잔 하나가 창밖으로 던져졌다.
몇몇 마의인(麻衣人)이 아래를 지키고 있었다.
쨍그랑!
술잔이 땅에 떨어져 깨졌고, 순간 마의인들의 표정이 변했다.
서로 눈길을 나눈 그들은 행인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마의인 중 하나가 크게 소리쳤다.
“고해! 그 마귀 같은 놈이 우리 송국을 망하게 하고 있다! 그런 마당에 법은 무슨 놈의 법이냐?! 나라를 망친 놈의 가게를 박살 내는 것이야말로 나라에 보답하는 길 아닌가?!”
곳곳에 흩어진 다른 마의인들도 연달아 소리쳤다.
“맞아! 법이 나쁜 놈을 지켜준다는 게 말이 되는가?!”
“박살 내자! 놈의 돈은 전부 우리 돈이야! 빼앗아버려라!”
“그렇다! 먼저 뺏은 사람이 임자다!”
이미 울분에 찼던 행인들에게 선동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하나둘씩 소매를 걷고 고송은포로 몰려들었다.
“나도 더 이상 못 참겠다!”
“암! 고해 놈의 가게라면 그냥 둘 수 없지!”
“죽이고 빼앗자!”
“와! 가자!”
살기등등한 함성이 들불처럼 크게 일어났다.
오늘만을 기다려온 듯 너도나도 은포로 돌진해 들어갔다.
콰당! 소리가 나며 문짝이 부서지고, 사람들이 물밀듯 쏟아져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