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불멸의 패왕-18화 (18/243)

18화 상과 벌

일단 폭동이 시작되니 아무도 제지할 수 없었다.

소동을 듣고 멀리 있던 자들까지 달려왔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합세하여 물건을 빼앗았다.

“악! 이놈아! 그만 밀어!!”

“개자식들아! 내 것도 좀 남겨!”

어느덧 폭도들은 서로 싸우면서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있었다.

지켜보던 고한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의부님! 이건 미친 짓 아닙니까?”

고해가 웃으며 말했다.

“은포에는 금은 수만 냥이 있다. 법? 지금 같은 상황에 법은 무용지물. 이렇게 많은 자들이 법을 짓밟는데 누가 말리겠느냐? 은포를 털어서 나라에 보답한다는데 누가 동참하지 않을까? 이왕에 빼앗는 것, 너도나도 떳떳하게 빼앗아야지.”

고한이 탄식하며 말했다.

“의부께서는 저들에게 도둑 심리를 심으시려는 거군요.”

고해가 냉소하며 반문했다.

“도둑 심리?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

난동 속에서 고송은포는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얼마 안 있어 은포 자체가 진흙처럼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놀람과 흥분에 찬 고함 소리가 거리를 가득 메웠다.

“악! 가게가 무너졌어!”

“흐흐! 뭐, 상관없지. 이 돈 좀 보라고!”

“털 만큼 털었는데 그만 가지!”

와! 함성을 지르며 폭도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들의 손에는 약탈한 금은동화가 쥐어져 있었다.

상당수가 흩어졌지만 아직 적잖은 자들이 폐허를 헤치며 돈이 되는 물건을 찾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도 들려왔다.

“악! 내 다리!

“내 팔!”

“머리가 깨졌다!”

적지 않은 자가 부상을 당해 여기저기 나뒹굴었다.

서로 싸우다가 다치고, 가게가 무너지면서 다친 자들이었다.

근방이 아수라장이 된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고해와 고한은 모든 상황을 지켜보았다.

혀를 끌끌 차던 고한이 물었다.

“은포가 왜 갑자기 무너진 걸까요?”

고해가 쓴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은포 안에 있던 가구며 기둥 전부 최고급 재질로 만들어졌으니까.”

“예?”

고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럼, 저들이 가구와 기둥까지 전부 뽑아갔다는 말씀입니까?”

“이미 보았지 않느냐? 공짜를 가져가지 않을 리 없지.”

“하!”

고한은 기가 차서 헛웃음을 뱉었다.

폭도들이 가구를 들고 가는 걸 확실히 보긴 했다.

그래도 보석이며 돈 등을 가구에 숨겨서 가져간다고 여겼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 보니 값어치 있는 건 돈이든 가구든 전부 훔쳐갔다지 않은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고한이 탄식하던 그때, 수많은 관병들이 은포를 향해 몰려가고 있는 게 보였다.

선두에서 말을 타고 온 군관이 불호령을 내렸다.

“네놈들 당장 멈추지 못할까?!”

그때까지 잔해를 뒤지던 자들은 사방으로 도주해 버렸다.

고해가 흥이 떨어진 얼굴로 말했다.

“태자부에 사람을 보내서 좀 더 선동시켜. 내일이 관건이다.”

고한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그동안 태자를 구워 삼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아직 태자의 생각이 어떠한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의 귀에 들어가게 하는 것쯤은 간단한 일입니다.”

* * *

고송은포가 폭도에게 털렸다는 소문은 곧바로 전국으로 퍼졌다.

폭도들 중 상당수가 하루아침에 부자가 되었다고 했다.

반면, 동참하지 못한 사람들은 땅을 치며 후회했다.

사람들은 황실에서 보일 반응을 주목하고 있었다.

내일 아침 조회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까?

조정 대신들은 마음이 복잡했다.

조회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사람들은 서로 의논하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황실의 분위기도 제법 뜨거웠다.

황족들은 입을 모아 잘했다는 평가를 내렸다.

“고해 놈 은포라면 털려도 괜찮지.”

“민심이 바로 천심이라 하지 않나.”

“아마 폐하도 내심 반기지 않으실까?”

대다수 사람들이 만족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지금 처소에 앉아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다.

황제란 나라의 지존(至尊)이며, 따라서 그 관점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황제의 생각은 다른 자들보다 훨씬 장기적이고, 다각적이며, 심층적이다.

그러므로 황제는 여러 변수를 계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에 잠겼던 황제가 밖을 향해 지시했다.

“방 태사와 유 승상을 불러와라.”

“예, 폐하!”

* * *

태자부 안.

고송은포가 털렸다는 소식에 태자는 껄껄 웃었다.

“하하하하! 십 년 묵은 체증이 싹 가라앉는 소식이군!”

아들의 죽음에 이를 갈던 차에 고해의 점포가 털렸다는 소식은 조금이나마 그의 마음을 풀어주었다.

그런데 앞에 있던 참모 중 하나가 태자의 기분을 언짢게 하는 말을 했다.

“전하. 송구한 말씀이지만, 지금 웃을 때가 아닙니다.”

웃음이 굳어진 태자는 참모들을 바라보았다.

다른 참모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 백성들이 고해의 점포를 턴 일은 몇 가지 새로운 문제를 야기시켰습니다.”

“어떤 문제?”

“약탈한 자들에게 상을 줘야 합니까, 아니면 벌을 줘야 합니까? 백성들의 행동이 잘한 것입니까, 잘못한 것입니까?”

“음!”

뜻밖의 말에 태자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벌을 주자니 백성도 그들 나름으로는 나라를 위해 한 일이다.

하지만 상을 주는 것 또한 엄연히 법을 무시하는 것이다.

실로 계륵과 같은 문제가 아닌가?

눈을 굴리는 태자에게 다시 참모 하나가 말했다.

“국법은 엄한 것입니다. 누구도 약탈해서는 안 되고, 이를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법치를 어지럽히는 짓이 용납되어서는 안 됩니다. 법을 짓밟는 것은 황권을 짓밟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참모가 다소 조심스럽게 말을 보탰다.

“벌을 주자니 나라를 위해 한 일이고, 상을 주자니 명백히 법을 어긴 것이다……. 아! 참으로 골치가 아픈 문제군요.”

태자도 그제야 심각함을 느꼈다.

방 안에 침묵이 흘렀다.

저마다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그러기를 얼마쯤 지나고, 이윽고 태자가 중얼거렸다.

“관부에서 고송은포를 제대로 조사했다면 이런 문제는 없었을 텐데…….”

기다렸다는 듯 참모 하나가 말했다.

“그도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겁니다. 고해의 점포가 송국에 해를 준다는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함부로 수색을 할 순 없지요. 심증만 가지고 수색했다면 천하의 상인들이 우리나라와 거래를 하지 않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태자는 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백성들이 물건을 사고팔 수 없게 되면 나라 경제가 흔들리고, 민심은 요동칠 것입니다. 모름지기 백성에게 있어 먹고사는 일만큼 큰 문제는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부디 그 점을 헤아려 주십시오.”

태자는 그저 한숨만 지을 뿐이었다.

그때, 하인 한 명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태자 전하.”

“무슨 일이냐?”

“전 선생이 만나 뵙기를 원하고 있사옵니다.”

“전 선생? 전한이라는 상인 말이냐?”

참모 하나가 말했다.

“전한이 머리는 잘 돌아갑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돈밖에 모르는 자입니다. 너무 신용하지 마십시오.”

태자는 자세를 고치며 지시했다.

“전한을 안으로 들여라.”

곧 전한, 아니, 전한으로 위장한 고한이 들어왔다.

고한은 넙죽 인사를 올렸다.

“태자 전하, 불초가 전하께 인사드리러 왔사옵니다.”

태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전 선생, 오늘따라 너무 예의를 갖추는 것 같구려. 그래, 어떻게 방문하셨소?”

고한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전하께서도 고송은포의 일을 들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얼굴을 굳혔다.

태자도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선생도 그 일 때문에 온 것이오?”

고한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저는 일개 상인에 불과하옵니다. 어찌 전하의 고충을 알 수 있겠사옵니까? 오늘 찾아뵌 이유는 제가 알고 있는 몇 가지를 알려드리기 위함이옵니다. 전하께 약간이나마 참고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람들은 궁금한 표정으로 고한을 바라보았다.

* * *

다음 날, 송성 조당.

대신들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송황제는 용상에 앉아 대신들의 토론을 지켜보았다.

어느 순간, 모두의 시선이 태자에게로 향했다.

태자가 황제를 향해 말했다.

“부황. 대신들과 많은 논의를 거쳤으나, 결국 백성들이 고송은포를 노략질한 것은 범법행위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 주목해야 할 것은 고송은포가 다름 아닌 고해의 소유라는 사실입니다.”

왼쪽 열에 있던 방 대사가 말했다.

“태자의 설명을 좀 더 듣고 싶습니다.”

태자가 오히려 유 승상에게 물었다.

“유 승상은 어떻게 처리해야 마땅하다고 보시오?”

유 승상이 몇 걸음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훔친 금품을 되돌려주고 벌은 면하되 경고해야 합니다.”

태자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백성들이 돌려주겠소? 아마 그들은 원하지 않을 것 같소만. 더구나 누가 어떤 금품을 훔쳤는지도 알지 못하오. 우리 송국이 그동안 고해에게 당한 일을 생각해 보시오. 훔친 것을 고해한테 돌려준다라…… 하하. 과연 백성들이 뭐라 생각하겠소?”

태자의 냉소에 유 승상이 바로 대답했다.

“압수만 하고 고해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됩니다.”

태자는 고개 저으며 응수했다.

“고해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국고에 보관해야 하오. 그리되면 당연히 불만을 품는 백성이 나오겠지요. 고해 놈의 금품을 놓고 백성들과 쟁탈전을 벌이자는 말이오? 나라와 백성이 분열하는 꼴이 될 뿐이오.”

유 승상은 황급히 부인했다.

“결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태자는 완강하게 주장했다.

“환수한 금품을 고해에게 돌려줄 수도 없고, 또 국고에 보관할 수도 없소. 오히려 백성의 화만 불러일으킬 따름이오. 이 상황에서 가장 최선은, 고해의 행위를 널리 알리는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오.”

한숨 돌린 태자는 강조하듯 말했다.

“어중간한 태도는 모두에게 해로울 뿐이오. 환수한 금품을, 고해의 물건을 돌려주는 짓은 꿈도 꾸지 마시오. 그런 짓을 하면 백성은 우리가 그들을 우롱한다고 여길 것이오.”

유 승상을 포함한 대신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침내 황제가 침묵을 깨며 말했다.

“참으로 곤란한 노릇이구나.”

태자는 재빨리 응수했다.

“부황. 이 사건은 너무 애매합니다. 국법과 민심이 상충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애초부터 따진다면 전부 고해 때문에 발생한 일입니다.”

황제는 음! 하는 무거운 한숨을 토했다.

태자가 이어서 말했다.

“나라에 위협이 되는 자는 누구라도 그냥 둘 수 없습니다. 우리 송국이 왜 철천지원수라 할 수 있는 고해의 점포를 우리 국법으로 보호해야 합니까?”

몇몇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했다.

태자는 대신들을 둘러보며 다시 말했다.

“이번 일은 백성의 잘못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고민하고 있을 때, 백성들이 먼저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것이 우리 백성의 민심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민심을 받들어야 합니다. 백성이 우리와 함께한다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대신 중에는 미간을 찌푸린 자들이 제법 있었다.

하지만 섣불리 반박하지는 못했다.

태자는 결연하게 말했다.

“그동안 백성의 마음이 우리에게 향하도록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백성을 엄벌하면 우리 노력이 무용지물이 되지 않겠습니까? 나라는 신망을 잃고 놀림감이 될 것입니다. 저는 그런 꼴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황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가 달라지자 유 승상이 급히 말했다.

“전하. 백성들은 결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번 결정하면 두 번 다시 고치지 못합니다. 만약 여기서 법보다 민심을 중시한다는 결론이 내려지면, 당장 내일부터 고해의 다른 점포들도 전부 털리게 될 것입니다. 그게 뭘 뜻하는지 모르시겠습니까?”

태자는 코웃음 치며 응수했다.

“유 승상께서 그리도 고해의 사업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무엇이오?”

그 말에 유 승상이 펄쩍 뛰었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고해의 재산은 무궁무진하오. 그런 재산이면 누구라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자 없겠지요. 나 또한 그 많은 재산을 환수해 국고에 비축하고 싶소. 하지만 유 승상, 돈보다는 나라가 더 중요하지 않겠소?”

유 승상은 그저 쓴 입맛만 다실 뿐이었다.

태자가 황제를 향해 돌아섰다.

“부황. 고해의 재산이 많다고 하나 우리 송국의 국고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송은포가 털린 일은 그냥 방치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그것이 우리 송국에게 유리합니다.”

누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태자는 말을 이어갔다.

“고해의 죄상을 백성에게 알린 건 우리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은포를 약탈한 것입니다. 그 또한 백성의 우국충정이 아니겠습니까? 하오니 부디 백성의 마음을 헤아려 이번 사건은 눈감아 주십시오.”

여태 듣고만 있던 방 태사가 말했다.

“태자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민심의 안정이 최우선입니다.”

곧 여러 대신들이 동의를 표했다.

한순간, 조당의 결정은 태자 쪽으로 기울었다.

황제는 대신들의 의견이 정리되는 걸 보며 마음을 굳혔다.

황제는 백성과 강토를 지키는 일이 가장 중요했다.

이윽고 황제는 큰 소리로 승낙을 내렸다.

“태자 말대로 하라!”

대신들은 고개를 조아리며 외쳤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 * *

조회에서 내려진 결정은 곧바로 알려졌다.

기다리던 고해와 고한에게도 그 소식이 전해졌다.

고한이 흥분한 표정으로 웃었다.

“송태자가 결국 저의 조언대로 했습니다. 이제 머잖아 우리 고씨 집안을 더욱 싫어하게 되겠군요. 하하. 본격적으로 송국이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고해는 차를 들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내 이미 말했잖느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