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천원잔국(天元殘局)
* * *
삼 일 후, 백운호의 대전 안.
고해가 가부좌를 한 채 앞에 놓인 진용선천공의 죽통을 보면서 공법을 연습하고 있었다.
단전으로부터 용의 울음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진용선천공이 움직이면서 진기가 용 모양으로 변했다.
진기들이 돌면서 다른 진기들을 억누르고는 다시 진원 속으로 들어갔다.
“용형(龍形)!”
고해가 나직이 소리치며 두 손을 확 펼쳤다.
순간.
콰웅!
보라색 용 모양의 안개가 형성되고, 두 손에 고인 진기도 용의 발 모양을 이루면서 포악한 기운을 나타냈다.
고해가 내심 감탄해 마지않았다.
‘천지영기를 두 배로 흡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악룡의 기운도 함께 발휘할 수 있군. 훌륭한 공법이다.’
고해는 손안에서 휘돌고 있는 진기를 내려다보았다.
용 모양의 진기가 진원을 돌면서 진원을 도와 주변의 기운을 진기로 만들어 갔다.
그러기를 얼마였을까?
이윽고 연공(練功)이 끝났다.
고해는 호흡을 갈무리하며 천천히 일어났다.
몇 걸음 나가 문을 열자 고선무가 서 있었다.
고선무가 고해에게 인사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타주!”
그는 다짜고짜 감사하다는 말부터 건넸다.
“돌파했나?”
고해가 묻자 고선무가 대답했다.
“예, 타주와 진천산 선배 덕분에 선천경을 돌파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영기가 많지 않아 타주가 주신 상품 영석을 모두 써버리고 말았습니다.”
“영석은 그저 돌멩이에 불과해. 다음에 또 얻으면 되지.”
고선무는 감격해서 두 손을 맞잡고 고개를 숙였다.
고해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이제 곧 선천잔국계로 들어가겠군. 자네가 선천경을 돌파했으니 나한테는 큰 도움이 될 걸세. 자, 이건 진용선천공이라고 하는데, 그 공법의 효능이 매우 특출나지. 잘 외워서 수련하도록 해.”
고해가 죽통을 꺼내 내밀었다.
고선무는 놀라서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진용선천공이라면, 일품당의 공법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주가 타주에게 준 선물인데, 어찌 제가……?”
고해가 웃음을 지었다.
“괜찮아. 선천경 공법일 뿐이야. 기초부터 잘 다지도록 하라고.”
“감사합니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고해는 죽통을 건네며 고선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이후 고해는 과 유년대사를 만나러 갔다.
고선무는 손에 든 죽통으로부터 시선을 들어 올렸다.
조금 전과 달리 그의 눈에는 한기가 가득했다.
고선무는 누구 못지않게 총명한 사람이다.
그래서 고해가 자신을 충직한 우군으로 만들려 한다는 것쯤은 눈치채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고해.
진송 전쟁에서 씻을 수 없는 패배를 안겨준 적수가 고해 아니었던가?
어느 순간, 고선무의 눈에서 한기가 사라졌다.
그는 고해의 등을 향해 공수(拱手)의 예를 올렸다.
* * *
거선 백운호는 망망대해 위에서 멈춰 섰다.
고해와 용완청, 유년대사는 멀리 있는 거대한 섬을 바라보았다.
그 섬은 구오도보다 몇 배나 더 컸으며, 전체적으로 황량하고 메마른 느낌이었다.
무너진 담과 폐허가 긴 세월 동안 씻겨 내려간 듯한 모습이었다.
“저곳이 천원도?”
고해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중얼거렸다.
자욱한 먹장구름이 섬을 사방으로 에워쌌고, 구름 사이로 이따금 번갯불이 번쩍였다.
이 먼 곳까지 느껴질 정도로 숨 막히는 위압감이었다.
다가온 용완청이 말했다.
“섬 주변의 구름이 바로 천겁(千劫)이야. 절대 사라지지 않을 천겁.”
고해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고요?”
“음. 하늘의 분노가 아직 사그라들지 않았어. 그 옛날 선천잔국계로 들어왔던 혁천각의 제자들은 섬을 나가려고 했지만 천겁의 재난에 시달리는 바람에 그렇게 하지 못했지. 팔백 년 전에는 요행으로 천겁에서 살아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죄수처럼 섬 안에 갇혀 살아야 하는 신세야.”
“아무도 떠날 수 없다는 말씀입니까? 미생인은 어떻게 떠날 수 있었죠?”
“미생인은 혁천각의 제자가 아니니까.”
고해는 다시 천원도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으로는 아직 천원도를 한눈에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유년대사는 가능했다.
유년대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보아하니 우리가 한발 늦은 모양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선천잔국계로 입장했습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선천잔국계가 열리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고 했다.
당연히 서둘러 그곳으로 들어가야만 미생인을 찾을 수 있는 시간도 그만큼 많아지는 것이다.
“그래.”
용완청이 대답하고는 한쪽을 향해 손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 즉시 하인은 배의 방향을 천원도 쪽으로 틀었다.
배는 쾌속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이제 곧 천원도에 당도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까악!!
거대한 선학(仙鶴) 한 마리가 나타났다.
선학은 배를 향해 곧장 날아오고 있었다.
용완청의 낯빛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저건 외조부가 키우는 학인데?”
선학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사람들이 놀랄 사이도 없이 갑판에 내려앉았다.
선학이 펼쳤던 날개를 접자 한 줄기 돌풍이 휘몰아쳤다.
선학은 두 명의 사람을 세워 놓은 것만큼이나 키가 컸다.
“당주를 뵙습니다.”
선학이 놀랍게도 사람의 말을 했다.
“허!”
고해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용완청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일로 왔지?”
“주상께서 당주님을 찾아가라고 명하셨습니다. 하지만 당주님이 어디 계신지 몰라 천원도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주님의 배를 발견하고 이렇게 찾아뵌 것입니다.”
“그래, 주상께선 뭐라고 하시던?”
“주상께선 바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응? 돌아가라고? 뭔 소리야?”
“당주님의 누이동생께서…… 사고를 당하셨습니다.”
그 순간 용완청의 낯빛이 냉랭하게 변했다.
“갑자기 무슨…… 외조부님이 곁에 계시잖아?”
“그녀가 요괴의 영을 삼켰습니다. 마(魔)가 스며들어 그녀와 융합하고 있습니다. 주상께서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었고요. 융합이 진행되는 것을 막긴 했지만, 그녀가 스스로 마화되기를 원했던 것이기에 그녀 스스로 마음을 되돌리지 않으면…….”
잠깐 말을 흐린 선학이 다시 설명을 이어갔다.
“요괴의 영을 끌어낸다고 해도 마는 제거하지 못합니다. 당주님께서 곧바로 돌아가셔서 그녀가 마화를 포기하도록 마음을 돌려주셔야 합니다. 주상께서는 그녀가 당주의 말씀은 들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망할 계집애 같으니! 그건 그렇고 그 애가 접촉하지 못하도록 주의했어야 하는 거 아냐?”
“당주님, 지금 가셔야 합니다. 주상께서는 당주가 늦으면 늦을수록 그녀가 위험해진다고 하셨습니다.”
“대답을 회피하기는…….”
“어서 서두르셔야 합니다.”
선학이 재촉했다.
용완청은 멀지 않은 천원도를 바라보며 갈등했다.
잠시 후 용완청이 유년대사에게 말했다.
“대사, 나는 선천잔국계에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아. 수고스럽겠지만 나 대신 미생인을 찾아줘.”
유년대사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소승의 임무는 당주를 안전히 보호하는 것입니다.”
“하필 이 상황에 동생에게 일이 생겼으니…… 암튼 잠깐이라도 갔다 오지 않을 수 없어. 동생의 일만큼이나 우리 어머니의 복수도 중요해. 그러니 어느 것 하나 포기할 수 없지. 대사, 내 마음을 헤아려서 부디 도와줘.”
용완청이 간청했다.
그러나 유년대사는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용완청은 실망과 함께 노기가 치밀었다.
그런데 유년대사는 태연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당주님,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소승을 대신할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누구……?”
유년대사가 고해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용완청도 이해했다.
용완청이 고해에게 말했다.
“고해, 나 대신 들어가 미생인을 찾아줘. 꼭 찾아야 해.”
그녀의 당부에 고해는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당주님, 저는 미생인은 물론이고 선천잔국계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 게다가 수행계에 대해서도 잘 모르니 감당하기가 실로 어렵습니다.”
유년대사가 갑자기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고 타주.”
“예, 대사.”
“원래대로라면 무리한 일은 시키지 않았을 거네. 하지만 상황이 이러하니 어쩔 수 없군.”
“그렇지만 대사…….”
고해의 말을 유년대사가 한 손을 들어 막았다.
“우리도 마찬가지야. 미생인이 어디에 있는지, 선천잔국계의 환경이 어떠한지 우리도 알지 못해. 사실상 고 타주와 별다를 바가 없지.”
유년대사가 용완청을 한 번 돌아다보고 나서 계속해서 말했다.
“당주께서 집안일로 부득이 떠나셔야 하니 이번에는 타주에게 수고를 끼칠 수밖에 없어. 이것이 곧 인과인 것이겠지. 당주님이 타주가 선천경을 이루게 도왔듯 이번에는 타주가 당주님을 도왔으면 하네.”
고해는 잠깐 침묵하다가 결국 응낙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그제야 용완청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떠올랐다.
“고마워.”
하지만 용완청은 고해가 미덥지만은 않았다.
고해는 이제 막 수행계에 발을 들여놓은 상황이었다.
비록 자신이 고해의 능력을 높이 사서 그를 영입했다고는 해도, 고해가 정말로 미생인을 찾아낼 수 있을지는 솔직히 의문이었다.
그래도 어쨌든, 지금은 고해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혹 미생인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려줄 수 있는 게 있습니까? 그가 어떤 외양을 하고 있는지, 어떤 특징이 있는지 하는 것들 말입니다.”
고해의 질문에 용완청은 조금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없어.”
“예?”
고해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무것도 없다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용완청이 씁쓸하게 말했다.
“미생인의 생김새나 특징에 대해서는 아무도 몰라. 나도 그가 저 안에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야.”
고해는 할 말을 잃었다.
이래서야 어떻게 미생인을 찾는단 말인가?
아는 것이라고는 달랑 이름 하나뿐인데.
유년대사가 말했다.
“그 안에서 아무 특징도 없는 자를 찾는 것이 바다에서 바늘을 찾듯 어려운 일임을 아네. 하지만 미생인은 분명 자신만의 특징이 있을 거야. 어렵더라도 최선을 다해 주게. 그리고 미생인을 찾으면 이 서신을 전해주게.”
유년대사가 용완청을 돌아보았다.
기다렸다는 듯 용완청이 작은 상자 하나를 고해에게 건넸다.
고해는 곧바로 상자를 열었다.
상자 속에서 든 것은 비녀 한 개.
비녀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여염집 아녀자의 것이었다.
고해가 의뭉한 시선으로 용완청을 보았다.
“일품당주가 죽었다고 그에게 말해. 그는 바로 알아들을 거야.”
짐작하건대, 이십 년 전 살해된 용완청의 모친이 전임 일품당주이리라.
고해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람을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이 비녀는 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유년대사가 말했다.
“안심하게. 미생인은 매우 교만하기 때문에, 자기 이름을 바꿀 리 없으니까. 그 이름을 가지고 천천히 찾아보면 될 것이야. 아, 그렇지. 예전에 몇몇의 사람들이 천원도에 들어갔다더군.”
“어떤 사람들입니까?”
“토타주, 몽태, 그리고 토타. 그들 역시 미생인을 찾고 있어. 그들이 먼저 조우할 수도 있으니 주의하게.”
유년대사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고해는 미간을 찌푸렸다.
유년대사의 말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낀 것이다.
배는 섬의 높은 지대를 향해 날아갔다.
배가 잠시 멈추고, 고해 일행은 하선했다.
용완청이 산꼭대기의 네 사람을 향해 말했다.
“조심해.”
고해는 손을 모아 인사했다.
“당주님도 보중하십시오. 최선을 다해 찾아보겠습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인 용완청이 하인들을 향해 명을 내렸다.
“가자.”
배는 남서쪽을 향해 금방 멀어졌다.
산꼭대기에는 남은 사람은 네 명뿐이었다.
고해, 진천산, 송청서, 고선무.
송청서는 배가 떠난 직후부터 눈빛이 달라졌다.
그는 다른 세 사람 뒤에서 고해의 등을 노려보며 냉소를 띠었다.
그런데 고해가 느닷없이 휙 뒤돌아섰다.
“어?”
깜짝 놀란 송청서의 냉소가 그대로 굳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