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요복사녀(妖仆蛇女)
고해가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진천산과 고선무도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몸을 돌렸다.
둘은 찌그러진 송청서의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
송청서는 짐짓 놀람을 감추며 차가운 어조로 물었다.
“타주님, 왜 그런 눈으로 저를 보십니까?”
갑자기 고해가 빙그레 웃었다.
“당주 일행이 떠나고 우리 넷만 남았네. 나는 일품당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는 것도 별로 없지. 송청서, 진천산, 자네들은 종문의 제자들이니 일품당의 규칙을 잘 알겠지. 일품당에서 하극상은 어떤 죄인지 말해줄 수 있나?”
송청서는 속으로 매우 당황하고 있었다.
‘놈이 뭔가를 벌써 눈치챈 것인가? 그래서 선수를 치려는 수작인 건가?’
송청서는 입을 열지 않는 게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고해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진천산이었다.
“하극상은 중죄입니다. 심각할 경우 죽이기도 하지요.”
고해가 웃으며 물었다.
“심각하다는 것의 기준은? 만일 수타의 제자가 타주를 살해하려 했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의 죄인가?”
진천산이 정석적으로 대답했다.
“당연히 죽을죄이지요. 일품당의 제자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렇군. 송청서, 자네는 어찌 생각하지?”
고해가 송청서를 보며 물었다.
송청서는 입술에 침을 바르며 겨우 대답했다.
“……당연히 죽을죄입니다.”
고해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죽을죄로군. 알겠네.”
송청서는 등골에 식은땀이 맺혔다.
진천산과 고선무가 고해와 송청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산꼭대기의 바람은 차갑고 사나웠다.
높은 곳의 바람이란 원래가 그러한 법이다.
* * *
천원도(天元島).
고해 일행은 입구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큰 산을 넘자 곧바로 거대한 골짜기의 중심에 다다랐다.
바닥에서는 짙은 안개가 살아 있는 것처럼 넘실대고 있었다.
진천산이 말했다.
“저기가 입구입니다. 저희도 처음 오는 것이지요. 듣자하니 안개로 싸인 지역을 지나면 선천잔국계에 들어갈 수 있다더군요.”
“그렇군.”
고해는 사방을 한 번 살피고는 걸음을 떼었다.
맨 끝에서 따라가던 송청서는 아직도 가슴이 서늘했다.
송갑종주가 고해를 죽이라고 했음에도 방금 전 고해가 자신을 돌아보던 순간의 그 느낌, 그 기억은 발밑에 깔린 안개보다 더 기분 나쁘게 가슴을 욱죄어 왔다.
송청서는 두 주먹을 불끈 거머쥐었다.
‘뭘 겁내는 거지? 놈은 이제 막 선천경을 얻은 약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놈을 무서워한다고? 웃기는 소리!’
그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일행은 천천히 안개 속을 이동해 갔다.
안개 속의 이동은 완만하고 조심스러웠다.
그렇게 얼마나 긴장한 채로 나아갔을까?
어느 사이 일행은 안개 속을 벗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안개를 빠져나오니 눈앞에 펼쳐진 것은 아까 보았던 골짜기가 아니었다.
천원도는 풀 한 포기 없는 불모지였다. 그런데 이곳은 풀과 나무가 울창하여 사방을 푸르게 물들였다.
“이것은?”
고해가 놀라 주변을 돌아보았다.
지나왔던 뒤쪽은 여전히 안개로 자욱했다.
진천산이 사방을 휘 훑으며 말했다.
“종주님 말씀에 따르면, 이 안개가 낀 곳이 바로 출입구라고 합니다. 길 때는 일 년 동안 안개가 걷히지 않는다는군요. 하지만 안개가 걷히는 때야말로 선천잔국계가 닫히는 순간이지요.”
고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정말 무서운 기운이군.”
온 사방이 쥐죽은 듯 고요했다.
고해는 시선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 작은 태양이 보였다. 하지만 고해는 저 태양이 바깥 세계의 태양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진천산 역시 쓴웃음을 지었다.
“과연 선천경만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군.”
고선무가 물었다.
“자네들 지금 기분이 어떤가?”
고해 역시 진천산과 송청서를 바라보았다.
진천산이 경탄하며 말했다.
“머리 위로 산이 솟은 것 같은 기분이네. 우리가 선천경의 최고봉에 다다르면 억제할 수 있겠지. 수련 경지를 더욱 높여 선천경을 깨우치면 천지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걸세.”
고해의 눈이 약간 밝아졌다.
비록 자신이 선천경의 제일이라고 해도, 세상에는 자신과 필적할 만한 실력자가 적지 않을 것이었다. 하물며 그는 아직도 외공을 계속 수련하는 중이었다.
그때, 진천산이 한곳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저쪽에 사람이 많은데요?”
계곡 너머에서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려왔다.
“말해라.”
“말하지 않으면 그녀를 죽이겠다.”
“백반도수가 있는 곳을 말해라.”
고해 일행이 보니 많은 수련자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계곡 주변으로 갈수록 마른 핏자국이 점점 더 많아졌고, 풀숲에는 잘린 지 한참 된 팔다리 등도 보였다.
고선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예전에 여기서 전쟁이 벌어진 건가?”
진천산과 송청서는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고해는 잘린 팔다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풀숲을 헤친 고해는 자세히 살펴보았다.
뒤에 있던 고선무가 말했다.
“과거에 여기서 벌어진 싸움이 매우 끔찍했던 것 같습니다. 저쪽에는 절단된 사지육신이 아직도 많이 있고, 입관한 시체도 꽤 있습니다.”
풀숲을 살피던 고해가 무겁게 말했다.
“이건 잘린 지 얼마 되지 않았군.”
“그렇습니까?”
고해와 고선지는 수련자들을 향해 다가갔다.
수백의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으니 실로 장관이라면 장관이라 할 수 있었다.
고해는 이렇게 많은 수련자를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가자 외곽에 있던 자들이 나누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의 말은 중구난방이었다.
“삼 일 전 이 소세계가 열리고 여러 실력자가 들어왔지. 여기 원주민들은 외부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는데, 들어온 자들과 막는 자들이 서로 살상해서 매우 끔찍했다더군.”
“당시 원주민 열 명을 생포해서 이곳의 지형과 보물 위치가 어디인지를 알아내려고 했지. 하지만 그들은 한마디도 않고 대부분 혀를 깨물었다더군.”
“이곳 원주민은 정말 지독한 자들이군.”
“백반도수를 찾아야 돼. 거기서 열리는 복숭아 하나에 백 년 수명이 늘어난다고.”
“저 요괴가 얼마나 버텼는지 보라고.”
홀연 인파 속에서 가녀린 울음소리가 들렸다.
“난 정말 몰라. 모른다고.”
즉시 사나운 음성이 윽박을 질렀다.
“모른다?! 그럼 너는 어떻게 왔느냐? 괴롭히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냥 우리를 그곳으로 데리고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아니면, 너도 그들처럼 되고 싶은 것인가?”
고해와 고선무는 사람들을 지나쳐 맨 앞으로 나아갔다.
“음!”
고해는 눈앞의 광경에 흠칫 놀랐다.
사람의 머리에 뱀의 몸, 인두사신(人頭蛇身)이었다.
머리는 열일곱 정도 되어 보이는 여인의 형상이었고, 몸은 이 장이 넘는 검은 뱀이었다.
인두사신은 돌벽에 박혀 있었고, 인두사신을 돌벽에 박아 고정시킨 것은 세 자루의 검이었다.
인두사신의 몸은 피투성이였으며, 얼굴은 멍으로 가득했다.
붉은 옷의 남자가 냉소하며 말했다.
“백반도수는 어디에 있나? 그것만 알려준다면 더 이상 너를 괴롭히지 않고 놓아주겠다.”
인두사신을 향한 수련자들의 눈초리는 차가웠다.
인두사신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몰라. 난 일개 시종일 뿐이야. 매일 약초밭을 지키는 일만 했을 뿐이라고. 난 정말 몰라.”
홍의인의 눈가에 이채가 번뜩였다.
“약초밭은 어디에 있느냐?!”
“나도 몰라. 그냥 그들이 나를 여기 끌고 왔어. 끌려오기 전엔 큰 상자에 실려 있어서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라. 이제 제발 나를 좀 놓아줘.”
그녀가 애처롭게 울부짖었다.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보군. 그럼 좋다!!”
홍의인의 검이 인두사신을 찔렀다.
“악!”
몸에 또 하나의 깊은 상처가 생겨났다.
인두사신은 괴로워하면서 울었다.
“정말 몰라! 구해줘, 누가 날 좀 구해줘…….”
사방에서 수련자들이 죽이라는 외침을 토해냈다.
물론 연민을 느끼는 수련자들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나서지 않으려고 했다.
이 뱀의 몸에 인간의 얼굴을 한 요물은 모든 수련자의 적이라 할 수 있었다.
동정심 때문에 섣불리 나섰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몰랐다.
“흥! 악독한 짐승 같으니. 시간만 버렸다. 죽어라!”
홍의인이 검으로 인두사신의 머리를 내리쳤다.
“안 돼! 날 죽이지 마!”
그녀는 울부짖었으나 몸이 바위에 박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때.
어디선가 돌멩이 하나가 날아와 검을 때렸다.
팅!
소리와 함께 검에서 불꽃이 튀었다.
빗나간 검이 인두사신의 머리 바로 옆에 박혔다.
검을 쥐고 있던 홍의인은 팔이 마비되는 듯했다.
“누구냐?”
그는 대뜸 노발대발했다.
모든 수련자가 돌이 날아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백 명의 시선이 화살처럼 날아가 박힌 사람은 고해였다.
고해 일행을 제외한 모든 수련자들이 우르르 물러섰다.
고해는 발길을 앞으로 떼며 냉랭히 말했다.
“적당히 하시오. 수백 명이 어린 여인 하나를 위협하고 고문하다니, 수련한 사람으로서 부끄럽지도 않소?”
홍의인이 마비된 팔을 주무르며 물었다.
“너는 누구냐?”
고해는 계속 걸어가며 대답 대신 자기 할 말만 했다.
“당신들 모두 각 종문의 고수들이겠지. 선천잔국계가 이렇게 큰데, 왜 다른 곳을 확인하지 않고 일개 노예를 붙잡고 늘어지는 거요? 여기서 시간을 낭비해 봤자 무슨 의미가 있소?”
송청서와 진천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천산이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송청서가 가로막았다.
송청서는 음침한 눈으로 고해를 주시했다.
홍의인은 마비가 풀리자 검을 고쳐 쥐며 소리쳤다.
“감히 방해하고 나섰으니 각오도 되어 있겠지?”
인두사신은 다가오는 고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기대감이 가득했다.
“나리! 저를 살려주세요!”
인두사신의 애원에 고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서, 나를 막겠다고?”
그때,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무엄한! 무명소졸이 아니라면 이름을 밝혀라!”
고해는 코웃음 치며 대답했다.
“일품당의 수타주에게 감히 맞서고 싶은 자가 있는가?”
수련자들의 안색이 일제히 돌변했다.
“일품당?!”
과연, 명성이 주는 위력이란 대단했다.
군중 가운데 일품당의 소문을 듣지 못한 자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삽시간에 주위는 침묵에 잠겼다.
고해는 그들 중 한 사람을 유심히 보았다.
유독 돋보이는 사내로 그는 수염을 길렀다.
그 사내의 뒤에 있던 수하 중 몇이 고해를 노려보다가 성큼 앞으로 나서려고 했다.
하지만 이내 수염 사내가 손을 들자 그들을 뒤로 물러나게 했다.
고해와 홍의인의 간격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홍의인은 역력히 위축된 모습이었다.
눈을 굴리며 이런저런 생각을 견주어보던 그가 갑자기 냉소를 흘리며 소리쳤다.
“흥, 헛소리! 일품당에는 현재 수타주가 없다!”
군중 속에서 웅성거림이 흘러나왔다.
고해는 두 팔을 으쓱거렸다.
“아, 그래?”
말과 함께 별안간 고해의 지척으로부터 정기가 분출되고 뜨거운 열류가 사방으로 치솟더니 보랏빛을 띤 용 모양의 정기가 솟아 나왔다.
그 즉시 홍의인의 살기가 흩어지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음?”
수염 사내의 안색이 일순간 바뀌었다.
군중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진용선천공……?”
“진용선천공이다!”
“일품당 수타주의 공법이다!”
고해의 말이 사실이었음을 깨달은 수련자들은 질린 얼굴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고해의 걸음은 돌벽 앞에서 멈췄다.
그는 인두사신의 몸에 박힌 검을 하나씩 뽑아냈다.
“아악!”
인두사신은 고통의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녀가 흘리는 눈물은 고통이 아닌 감격의 눈물이었다.
홍의인은 펄펄 뛰며 광분했다.
“그럴 리가 없어! 내가 떠나 올 때만 해도 일품당에는 수타주가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일품당주는 내 종주님과 구오도에 함께 있었다고! 누구냐?! 네 정체가 뭐냐?!”
고해는 홍의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두 번째 검을 뽑았다.
“보아하니 동향인가 보군. 과거 시점으로 말한다면 당신 말은 틀리지 않지. 당주께선 당시 구오도에 계셨고, 지금 나는 막 수타주로 임명받은 참이지. 소개가 늦었군. 고해라고 하는데, 혹시 아는가?”
홍의인은 입을 달싹거리다가 이내 침묵했다.
‘고해? 그놈은 늙은 영감인데 이리 젊을 수가 있나? 진송 전쟁에서 진국의 군사를 지휘하는 자가 여기 오다니……? 설마 송국이 지기라도 했다는 건가? 그럴 리 없어! 망할 놈! 역시 거짓말이구나!’
눈을 돌린 고해가 홍의인을 보며 물었다.
“아까부터 날뛰던데, 당신은 누구지?”